한국 사람들은 고스톱을 거의 광적으로 즐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세 명(간혹 두 명이라도) 이상의 정족수만 차면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두드리기 시작한다. 한 때는 국제선 여객기나 세계의 유수한 국제공항의 대합실에서도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즐겼다. 그런데 고스톱에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단순하게 한국민 전부를 돈 독에 핏발이 선 도박광으로 매도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꼴찌가 일등을 이길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다. 다른 화투 게임에선 피는 아무 소용이 없다. 더구나 쌍피는 완전히 천덕꾸러기인데 고스톱에서만은 최강의 위력을 발휘한다. 다른 게임에선 최고로 대접 받는 광(光)이 그것도 세 개가 한꺼번에 들어와도 별로 반갑지 않는 유일한 게임이다. 광 밝히다 설사한 것 받아 먹고 보너스로 피 한 장씩 거두는 재미는 세상에서 최고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고(Go)’ 했다가 겨우 운 좋게 3점 난 약자에게 바가지 쓰는 모습만큼 통쾌한 일이 없다. 거기다 순서에 밀려 칠 수 없는 자마저 광을 팔 수 있는 기회를 주니 이보다 더 공평한 게임도 없다.
권력과 금력과 학력에다 심지어 지역 배경의 위력에 찌들린 한국 사람이 고스톱에서마나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면 나라가 벌써 절단 났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고대 세계의 성문 앞이나 시장 광장처럼 여론 형성의 역할을 해야 할 추석날 사랑방 좌담회도 시국 돌아 가는 것이 더 이상 골치 아파 고스톱 도박장으로 바뀐지 오래다. 한국의 정치가들로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서양 화투의 하이로우(High & low)라는 포커 게임이 바로 이 고스톱과 비슷하다. 소위 말하는 끗발이 가장 낮은 패를 쥔 자도 판돈의 반을 먹을 수 있다. 각자가 자기 패를 보고 높은 끗발끼리 혹은 낮은 끗발끼리 어느 쪽에서 승부를 걸지 선택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낮은 자는 낮은 자끼리 붙어서 가장 낮은 자가, 높은 자는 높은 자끼리 붙어서 가장 높은 자가 이기도록 규칙을 정해 놓았다.
미국으로 이민 온 첫해 둘 째 아이가 국민학교 3학년일 때 학예회(Talent Day)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한마디로 그것은 학예회가 아니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누가누가 잘하나?”가 아니라 거꾸로 “누가누가 못하나?”를 경쟁하고 있었다. 전곡을 완벽하게 소화해 하나 실수 없이 하는 진짜 재능(Talent)을 가진 아이가 독주나 독창 순서를 맡지 않고 박자와 음정 틀리는 것은 둘째 치고 중간중간에 잊어버리고 뛰어넘는 것이 예사인 꼴찌들이 맡고 있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구경 온 학부형, 선생. 학생들 모두 그런 실수 연발에도 누구 하나 웃지 않고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끝까지 조용하게 들어주다가 잘하는 아이보다 더 열렬한 박수를 쳐주었다. 엉터리(?) 같은 연주를 괜히 쑥스러워 하고 지겨워 하는 자는 유일하게 참석한 동양인인 나 혼자였다. 그 순간 갑자기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고 꼴찌를 오히려 대우하고 격려해주는 사회를 배울 수 있게 된 것 하나만으로 온갖 실패 끝에 도망치듯 이민 온 보람이 있구나라고 감사했었다.
한국의 교육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절감한다. 실력이 떨어지거나,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고, 입시 지옥에 고생하게 한다는 것들은 사실은 이차적인 문제다. 꼴찌도 대우 받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는 교육은 실종되었고 무조건 일등 하라는 교육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학생들 스스로 자기 특성 분야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주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낮은 패를 쥔자도 서로 격려해서 활개 칠 수 있는 바탕을 전혀 마련해 주지 않고 있다.
지금 전교조이든 교총이든 가장 먼저 시급하게 해야 할 것이 학부형으로부터 돈봉투를 받지 않아 부정을 없애고 학교 운영체계를 직접 참여 방식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못하는 아이들을 학예회 때에 발표 시키고 그것을 보는 모든 부모가 박수칠 수 있도록 바꾸는 교육을 해야 한다. 서로 독주 순서 맡기려고 돈 봉투 갖다 바치는 일은 상식적으로 낯이 뜨거워서라도 당연히 안 해야 한다. 선생들이 좌우로 나눠 데모부터 하지말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학예회부터 한 번 바꿔보라. 당장 다음 날로 한국에서도 아이들 가르칠 보람을 찾는 자가 생기고 조기유학의 열풍도 수그러들 것이다.
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교육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거짓말, 폭력, 강도, 살인, 아내를 포함하여 남의 물건을 뺏는 것은 나쁘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분명한 도덕적 진리다. 마찬가지로 3X3=9라든지 만물에 인력의 법칙이 작용한다든지 하는 것도 과학적 진리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완전한 진리는 하나의 가감 없이 그대로 따르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옳고 그른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른 상대적인 이론에 불과하다. 옳고 그르다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선택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인간의 기원에 대해 창조와 진화 둘 다 가르치는 학교도 꽤 있는 이유가 그들이 기독교 국가라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창조와 진화 둘 다 1+1=2라는 식으로 과학적으로 완전히 입증된 학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그 내용만 소개하고 판단과 선택은 그들에게 맡긴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린이들에게 영어, 수학, 과학 등의 일반 교과 과목과 도덕은 객관적 진리로 교육해야 한다. 반면에 사상과 이념에 관한 것은 어느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소개만 해서 자신의 판단력과 분별력이 정립되는 어른이 된 후에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청소년기의 교육의 목적은 어른이 되어서 그런 선택을 잘할 수 있는 기본적인 판단력과 분별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공교육의 현장에선 소위 말하는 의식화 교육을 하지 말아야 한다. 공산주의를 가르치지 말아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좌경 의식화이든 우경 의식화이든 벌써 ‘화(化)’가 들어가면 고의적으로 한쪽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의 좌경의식화 교육이 그 동안 일방적으로 우경의식화 된 교육의 반발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해줄 부분은 있지만 이해해 줄 수 있다는 것과 옳고 그른 것은 다른 것이다. 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시적인 과도기 현상으로 그쳐야지 좌경의식화 교육이 지속되면 또 다른 도그마를 만들어내고 자라는 학생에게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재량권을 박탈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의식화보다 더 나쁜 것은 좌경이든 우경이든 교과 내용에 교묘하게 숨겨서 어린 학생들을 속이려 드는 것이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를 완전히 까발려 양 쪽 다 공평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정계에선 몰라도 교육계에서 만큼은 제발 좌우익 싸움이 당장 없어져야 한다. 도대체 학교에서부터 좌우로 나뉘어 서로 박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자는 말인가? 교육 시스템을 고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제도를 아무리 눈이 팽팽 돌아가도록 자주 고쳐봐야 꼴찌도 학예회에 독주 순서를 맡는 것이 당연시 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하이로우’ 포커에는 고스톱에는 없는 특이한 룰이 하나 있다. 숫자는 최고로 낮지만 끗발로는 아주 높은 패가 나오면 반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판돈의 전부를 따게 한다. 그래서 양쪽 다 쥐고 흔든다는 뜻으로 ‘스윙(swing)’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고스톱이 시대를 풍자하여 온갖 룰이 등장하듯이 포커의 ‘하이로’와 ‘스윙’이 바로 미국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낮은 자에게도 반드시 기회를 균등하게 주지만 결국에는 겉으로는 아주 낮아 보이지만 실력은 최고인 자에게 그 판의 전부를 주도하게 하는 것이다.
꼴찌만 우대하면 공산주의가 된다. 일등만 우대하면 자본주의가 된다. ‘하이로’ 게임으로 둘 다 함께 갈 수 있어야 하되 반드시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국민을 왕으로 모시는 겸손한 자가 사회 전체를 이끌고 가야 한다. ‘하이로’만 강조하면 자칫 좌익은 좌익끼리 우익은 우익끼리 분열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선 ‘하이로’와 ‘스윙’을 함께 할 수 있는 분별력 있는 지혜와 양보의 미덕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한국인들이 고스톱에 열광하는 것이 자칫 꼴찌가 일등을 복수하는 재미에만 너무 맛들인 것 아닐까? 잘 모르지만 최근 고스톱에 오광(五光)이 독식하는(?) 포커의 스윙 비슷한 제도도 생겼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빛이 번쩍번쩍한 광이 판을 이끌어가게 해선 언제쯤이나 꼴찌가 대우 받을 사회가 될 수 있겠는가? 정말 실력은 최고이면서 겸손하며 분별력과 포용력을 갖추어 좌우를 함께 아우르며 갈 지도자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