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를 되살리라

조회 수 2560 추천 수 366 2005.05.11 05:29:23
남편은 뒷짐을 지고 앞에서 성큼성큼 저만치 앞서 가고 아내는 머리에 봇짐을 이고 등에는 젖먹이 아이를 들쳐 업고 한 손에는 보따리를 다른 손에는 또 다른 아이 손을 잡고 낑낑대며 따라가는 풍경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어렸을 때에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아닌데…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저렇게는 안 해야지” 하고 마음 먹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의지의 한국인의 피는 속일 수 없었는지 미국 이민 와서도 쇼핑몰 같은 곳을 가면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고 아내를 한창 앞서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어렸을 때의 그 다짐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머쓱해지기도 하고 집사람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것도 쇼핑한 물건을 아내에게 들리게 하고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이런 모습을 미국 사람이 보면 저 한국 사람은 완전히 무식한 미개인이라고 욕할 것이다. 우리가 애국(愛國)하는 것이 별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것부터 고쳐야 해” 하면서 아내와 일부러 걸음의 보조를 맞추고 짐도 내가 들고 자동차 문도 열어주곤 해보지만 솔직히 지금껏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드디어 이민 온지 15년 만에 말로만 걱정했던 일을 오늘 아침 산책 중에 당했다. 집 주위를 약 30분 걸려 걷는데 마지막 부분에 오르막 길이 있어 나도 모르게 마누라는 뒷전에 제쳐두고 또 한 10미터 정도 앞장 섰던 것 같다. 때마침 지나치던 미국 노인에게 평상시처럼 “굿모닝”하고 인사했더니 당연히 저쪽에서도 “굿모닝”이 반사적으로 따라 나와야 할 텐데 첫마디가 “왜 너 마누라는 혼자 뒤에서 따라오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띄고 농담조로 말했고 그 후 서로 기분 좋게 아침 인사를 나눴지만 분명히 기본 에티켓도 모르는 놈이라는 빈정댐이었다. 개인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미국 놈(?)에게 야단 아닌 야단을 맞고서야 앞으로 진짜 정신차려 이 버릇만은 고쳐야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사람 속에 있는 생각이 겉으로 말과 행동으로 되어 나온다. 동일한 말과 행동이 잦아지면 태도가 되고 태도가 굳어지면 습관이 되며 습관이 고착화되면 인간 자체가 바뀐다. 역으로 습관을 먼저 고쳐 새로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자연히 생각도 그에 따라 바뀌게 된다. 우리 눈에는 미국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하니 아이 러브 유”라고 아내에게 일부러 아양 떠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을 하고 있는 동안만은 사실은 빈 마음이 아니다. 원체 어려서부터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순간적으로 냉정해지며 또 그런 후에는 아예 언제 그런 말을 했던 양 입을 싹 닦는 것이 탈일 뿐이다.        

데이트에서 성공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영화 ‘Hitch’가 최근 한국에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주인공을 맡은 귀여운(?) 흑인배우 Will Smith 가 미국 ABC TV의 아침 방송에 나와 영화선전을 겸해 인터뷰를 하면서 “자동차 문을 열어주거나 식당에서 의자를 뒤로 당겨 기다려 주는 등 여자에 대한 기본적 매너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데이트 성공에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물론 여성학대를 하는 자들도 꽤 있지만 정상적 미국인들은 힘 센 남자가 연약한 여자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은 생각에서 나온 말이자 행동이자 완전히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지 절대 겉치레가 아니다.      

한국은 지금 호주제 폐지로 논란이 분분하다. 정파간, 지역간, 빈부간, 세대간 갈등이 이제는 남녀간의 분열에까지 이어졌다. 인간의 잘잘못을 따지기 앞서 마치 눈에 안 보이는 거대한 손이 나라를 갈갈이 찢어 발리고 있는듯해 섬찍한 기분이 드는 것이 단지 국외자(局外者)로서의 노파심과 기우에 불과할지…. 그런데 참다 못한 어떤 분이 요즘 남편들이 TV도 제 마음대로 못보고 마누라 보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푸념과 함께 호주제 폐지에 대해 위헌 심사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는 절대적 완전성을 갖출 수 없다. 그것을 만드는 인간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틀림 없이 조만간 호주제 폐지에 따른 색다른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며 다시 보완하자고 남녀 양쪽에서 다 난리를 칠 것이다. 그럼 그때 가서 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면 된다.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실제로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고 특별히 우리나라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데는 최고의 기술과 전통을 자랑하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이번 호주제 폐지를 한국 남성들이 그 동안 얼마나 여성들에게 잘못해 왔는지 진심으로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저부터라도 잘못을 열거하려면 끝이 없지만 솔직히 TV채널 선택권을 수십 년간 독점해 왔지 왔는가? 또 아내가 한 여름에 비지땀이 흘러 속곳까지 젖어 낑낑 대며 제대로 따라오든 말든 시원한 삼베 고의 적삼 입고 합죽선을 신선 같이 흔들어 대며 팔자 걸음으로 먼발치에 앞장서 갔지 않는가? 이것 두 개만이라도 반성할 필요 충분 조건은 된다.    

남편이 TV 채널 선택권을 독점해도 된다. 어쩌면 그런 가정이 더 분란이 없고 행복해진다. 단지 남자라는 위세(power)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남편과 가장의 권위(authority)로서 하면 말이다. 남자의 힘은 남자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남자다울 때만 나온다. 그리고 그 정말 남자다운 힘에 여자가 자원해서 기쁨으로 따라줄 때 비로소 남자로서의 권위가 생긴다.

지금 한국 남성들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것은 호주제라는 법의 정비 보완이 아니다. 과연 우리 모두 진정으로 남자다운 남자인지부터 반성해 보자. 남성우월주의 생각이 말과 행동을 낳고 그것이 태도가 되었고 또 습관으로 변해 결국에는 한국남성 자체가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 바뀌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전체 분위기와 제도도 그런 고착화된 사고를 더 굳게 만들어 주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이참에 한국 남성들이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할 때도 되긴 되었다.  

채널을 이전처럼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고 불평한다는 것 자체가 남자가 선택권을 독점 내지 최우선권을 가져야 한다는 굳어진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벌써 남자로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실토다. 힘으로 뺏으려면 얼마든지 뺏을 수 있는데도 못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완전히 구겨졌기 때문이지 않는가? 지금부터라도 “여보 사랑해요”는 아직 쑥스러워 하지 못하겠다면 “여보 수고했어”라도 하루에 한 번쯤 해주고, 길을 걸을 때 마누라를 뒷전에 질질 따라오게 하지 말고 손을 잡거나 아니 보조라도 맞추고 가는 날이 될 때에 한국의 진정한 호주제도 틀림 없이 되살아 날 것이다.
  
(3/13/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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