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미국

조회 수 2812 추천 수 321 2005.05.11 05:35:53
미국은 땅이 커서 그런지 모든 것이 크다. 사람만 큰 것이 아니라 심지어 쥐, 다람쥐, 고양이도 크다. 당연히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피해도 아주 크다. 3대 자연 재해로 꼽히는 허리케인, 토네이도, 지진으로 매년 입는 피해는 엄청나다. 그런데 연례 행사처럼 겪다 보니 다들 아주 덤덤하게 대한다. 또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빈 땅이 널렸는데도 여전히 그 재해 지역에 눌러 앉아 사는 것을 보면 언뜻 우리 눈에는 이해가 안 된다.

미국의 대도시 중에 이 3대 재해와 전혀 무관한 곳은 딱 한군데 밖에 없다. 록키 산맥 자락 아래 자리 잡은 콜로라도 주의 덴버(Denver)다.(혹시 미국 이민 가시려는 분은 참고 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덴버에 가서 살 수는 없다. 어차피 자연 재해란 언제 어느 곳에나 어떤 형태로든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태평양 연안에는 곳곳에 상습 쭈나미 피해지역 표시가 있는 곳도 있다. 골프장에서 벼락 맞아 죽는 자도 부지기 수다. 결국 사람은 오랜 동안 살아 익숙해진 고향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일 수 밖에 없는가 보다.  

금년 초 캘리포니아에 근 백년 만에 보는 집중호우로 언덕에 자리 잡은 어떤 집이 윗집에서 진흙이 무너져 내려(Mud Slide-일종의 조그만 산사태) 뒷마당 잔디와 화단을 망쳤다. 윗집 주인에게 변상을 요구했더니 자연 재해란 인간도 어쩔 수 없는 ‘신의 행위(the Act of God)’라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했고 실제 보험에서 보상 받을 길도 없다. 물론 지진, 태풍, 토네이도 등은 별도 보험에 들면 되지만 일단 손해가 나면 집 한 채 값을 다 물어주어야 하니까 보험료가 엄청 비쌀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일반 서민들은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만 큰 것이 아니라 인재도 크다. 쉬운 이유로 주에 따라 총기 소지가 자유롭고 고속도로도 왕복 10차선에 시속 80마일(약130키로) 정도로 달리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나아가  문화와 관습이 전혀 다른 온갖 인종들이 모여 살다 보니 미친(?) 사람도 자주 설쳐댄다. 예를 들어 몇 달 전 LA에선 한 젊은 남자가 자살하려고 자기 SUV(Sports Utility Vehicle) 찝차를 기차 건널목에 세워 놓았다가 막상 기차가 달려오자 차를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애꿎은 기차 승객만 20여명 넘게 죽었다. 몇 년 전 뉴저지주에선 외딴 곳에서 차에 숨어 행인들을 무작위(無作爲)로 저격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LA에선 새벽에 고속도로를 차 타고 지나가다 아무 관계 없는 자를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6건이나 발생했고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한마디로 미국은 사건 천국이다. 10여년 전 한국이 자고 나면 대형사고가 연발해 사고천국이라는 별명이 붙은 적이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미국은 거의 매일 한국으로 치면 전국민이 놀라 자빠질(?) 대형 사고가 일어난다. 또 한국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데 선수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매번 똑 같은 사건들이 발생하니 오히려 미국이 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선수는 같은 선수이지만 고치는 모습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대한다는 것이다. 천연재해는 모든 첨단 과학 장비를 다 동원해 사전에 발생 시각과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일단 관계기관에서 경보를 발행하면 모든 주민은 자발적으로 대피한다. 정확한 예측이 가장 손쉬운 태풍의 경우는 경고가 발행되면 주민들은 두꺼운 합판이나 스티로폴 같은 것을 자기 비용으로 사다가 유리 창문을 막고 일정기간 동안 정해준 피난처에 중요물품만 들고 가서 대피한다.

따라서 천연 재해에 대한 피해는 전부 당사자 개인과 보험회사의 책임이다. 물론 각지에서 성금이나 자원 봉사가 답지한다. 또 연방정부나 주 정부 차원에서 재해지역을 선포해 지원해주지만 그럴 때도 무상 지원보다는 피해복구를 위해 융자해 주는 것이 주(主)다. 말하자면 천연재해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방도는 최선을 다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예방 말고는 사실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합의한 셈이다.  

반면에 인재에 대해선 그 대책이 전혀 다르다. 캘리포니아 폭우 예를 또 들면 언덕 위의 고급 집들이 그 지반이 내려 앉은 경우가 많았는데 911(긴급전화)로 신고하면 가장 먼저 시나 주정부의 안전관리요원과 소방관이 나와 안전진단부터 한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노랑 테이프(경찰, 소방관들이 사용하는 접근금지 표시)를 집 전체에 두르고 그 위험 정도에 따라 노란색, 빨간 색 경고문을 부친다. 노란 색은 말 그대로 위험하니 주의하라는 표시지만 빨간 경고가 붙으면 아무리 집주인이라도 무조건 별도 대책이 수립될 때 까지 자기 집에서 나가야 한다. 그 별도 대책 가운데는 안전 당국에서 임의로 집을 부수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 집의 안전뿐 아니라 이웃집의 안전까지 고려한 조처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내 집과 함께 죽겠다는 것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그 피해도 본인의 책임이다.

요컨대 폭우가 와서 지반이 무너져 내린 것까지는 천재지만 그 이후의 붕괴 위험에 대비하는 것은 인재라는 뜻이다. 일단 인재라고 판단되면 정말 당사자가 갑갑하고 지루할 정도로 철저하게 대처한다. 돌다리도 단순히 두드려 보고 건너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의 발생 가능성을 두고 실험하고 대책을 세운다.

미국이 당한 인재 중에는 2001년에 9/11에 발생한 뉴욕의 쌍둥이 빌딩 테러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차 사고 수습이 끝난 후인 2002년 말 국회에 초당파적으로 독립적인 대책위원회(The 911 Commission)를 구성하고 2년간에 걸친 정밀조사 끝에 585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2004년 8/21 작성했다. 사고 경위와 원인 분석에 10개 항목(338 페이지)을 할애했고 나머지 2개 항목(68페이지)에는 무엇을(What to do?) 어떻게(How to do?) 할 것인가 그 대책을 열거했다. 일반 서점에 발매되자 보통 사람들에게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또 Time 잡지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911 이후 부시 대통령은 테러 전담 부서인 국토 안전부를 신설하여 이전에는 내무부 산하이던 이민국을 관장하게 했다. 또 이 보고서에 근거해 그 동안 CIA, FBI, 각군 정보기관, 주정부 경찰 등에 분산 되어 있던 정보 수집 통제 대응 기관들을 완전히 하나로 통합했다. 놀랍게 들릴지 몰라도 미국은 국제 공항, 항만이 곳곳에 널려 있고 외국에서 오는 방문객이 원체 많다 보니 911 이전에는 이민국과 정보기관의 데이터 베이스끼리 출입국과 범죄 관련 정보의 공유가 안 되었고 전국적인 온라인(on-line)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그것부터 고쳤고 미국으로 입국하는 외국인들이 모두 지문을 찍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조치의 일환이다.

흔히 한국에서 미국 비자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고 한다. 미국 대사관의 태도가 너무 고압적이고 인터뷰 약속에만 한 달이 넘게 걸린다고 불평이 많다. 그러나 사실은 이 미국 출입국자들의 전국적인 온라인화 작업을 한국뿐 아니라 전 해외 공관에 까지 확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중동지역 국가들을 더 엄격하게 대하지만 좀 심한 말로 하자면 일단 외국에서 입국하는 방문객전부를 잠재적인 테러 가능자로 분류해 놓고, 즉 모든 발생 가능한 위험에 대비해 대책을 세워 나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한 한국의 야당 P대표도 공항에서 지문 찍고 신발 벗고 검색대를 통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이 나온 김에 참고로 일본은 미국과 무비자 협정을 맺고 있다. 일본인들은 미국 방문하려면 복잡한 서류 준비나 한달 이상 인터뷰 대기할 필요 없이 여권 들고 비행기 표만 사서 오면 된다. 일본이 우리 보다 국력이 세고 잘 살아서가 아니다. 테러 분자가 생길 가능성이 적어서도 아니다. 오직 일본의 비자 위반율이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큼 현저하게 낮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일본인들은 미국의 출입국 관리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고 불법체류를 거의 안 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우리 같아도 비자발급 규정을 까다롭게 하지 않겠는가? 비자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이 일방적으로 일본을 우대하고 한국을 깔보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미국도 사건이 많이 난다. 천재든 인재든 자고 새면이 아니라 하루 중에도 이곳 저곳에서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많이 생긴다. 간단하게 한국 같은 나라가 50개 모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많이 생기겠는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데는 한국보다 분명 더 선수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도적이 와서 소를 훔쳐 간 원인은 자물쇠가 안 잠겨 있든지, 펜스나 담벼락이 부실했던지, 야간 경비를 서지 않았던지 몇 가지 중에 하나다. 그래서 그 대책도 간단하다. 자물쇠를 채우고 담벼락을 고치고 경비원을 세우면 된다. 그러나 이는 국민학생도 할 줄 아는 원인 분석과 대책 수립이다. 말하자면 아이가 산수 성적을 삼십 점을 받아왔다. 아빠가 왜 그랬느냐 어떻게 할 것이냐고 따졌다.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그랬고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했고 아빠가 “그래 열심히 해봐”라고 한 것이나 다름 없다.  

반면에 도적이 어떤 도구를 사용했으며 자물쇠가 왜 쉽게 열렸는가, 앞으로 어떤 도구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가, 펜스나 담벼락을 어떤 재료로 얼마나 튼튼하게 해야 어떤 침입에도 안 부숴질 것인가, 펜스에도 어떤 경보 장치를 어떻게 달아야 할지, 야간 경비를 어떤 위치에 몇 명을 몇 교대로 세워야 하며, 경비원들이 도적에 대비해 어떤 무기와 장비를 구비토록 해야 할지, 등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분야별로 박사 논문이 나올 만큼 파고 들어야 한다. 산수 시험에 삼십 점을 받았으면 단순 나누기는 잘했는데 분수 나누기는 틀렸고, 소수점이 나오면 헛갈린다는 것까지 아버지와 아들이 분석하고 집중적으로 비슷한 문제를 갖고 연습해야 한다.  

인재든 천재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고가 끊일 날이 절대 없다. 문제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방법이다. 또 사고를 고치는 데는 사고를 직접 당한 사람이 가장 낫다. 말하자면 사고가 발생한 직후 관련 당사자들끼리 몇 년이 걸리더라도 원인 분석과 대책에 매어 달리고 일단 최선의 대책이 세워지면 하나하나 고쳐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책 수립과 수정은 당대(當代) 사람들의 몫이고 후세 사람들은 단순히 그 공과(功過)만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기는 잘 하는데 죄송한 말로 산수 삼십 점 맞은 국민학생 수준이다. “지역 감정이 너무 심하니까”와 “서로 화합하도록 노력합시다”는 원인분석도 아니고 대책도 아니다. 단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지적한 것 뿐이다. 이런 대책을 들고나와 머리에 두건 쓰고 모여 주먹 불끈 쥐고 구호만 외친다고 외양간이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다. 또 인재와 천재의 구별이 모호하다. 천재든 인재든 일단 무조건 정부 당국의 잘못으로 몰아 부치고 시비부터 건다. 억지를 쓰면 얼마라도 보상금이 나올 것을 예측한 짓거리다.

그리고 꼭 속죄양을 한 사람 골라내어 모든 죄를 덮어 씌워야 국민 감정이 풀리고 그 속죄양이 처단되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된 양 착각한다. 나아가 어떤 경우는 당대 사람이 대책을 세워 고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공과만 평가해야 할 후세 사람들이 사또가 나팔 불고 행차한 한참 후에야 길을 새로 닦겠다고 나선다. 내가 소라도 이런 주인과 그 외양간은 도저히 못 미더워서 살 수 없을 것이다  

911 테러에 너무 크게 당한 미국으로선 현재 전국가적인 관심사와 부시 대통령의 정책 우선 순위는 해외에서 미군들이 좀 희생당하더라도 자기 국토 안의 국민들의 안전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내자는 것에 두고 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대처도 같은 선상에서 보면 된다. 그래서 지금도 911 보고서에 따라 하나하나 대책을 수립하고 시행해 나가고 있다. 언제 모든 대책이 완결될지 모르며 다음 정부에서도 큰 변경 없이 그대로 이어갈 것이다.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지나는 것은 똑 같으되 인간과 똑 같은 무게의 돌을 굴려 본 후에 건너 가는 것과 단지 손으로 톡톡 두드려 보고 지나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겠는가?

5/3/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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