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 축구 게임에서 마지막 쿼터 십초 정도 남기고 5점(Touch Down이 아니면 뒤집지 못하는 점수차)이나 뒤진 팀이 공격권을 상대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당시는 미식축구에 대한 상식이 일천(日淺)했을 때라 상대에게 공격권이 넘어간다면 십초 만에 역전한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키커(Quicker)가 평소처럼 상대팀을 향해 공을 하늘 높이 차올리지 않고 땅볼로 걷어 찼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공을 따라 양팀이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지고 있는 팀의 선수 하나가 공을 낚아채 쏜살같이 내달아 상대 골 진영에 공을 찧었다. 기어이 승부를 뒤엎은 것이다.
또 프로 농구(NBA) 게임에서 단 1초를 남겨두고 2점을 지고 있는 팀이 마침 상대 진영에서 드로잉(Throwing: Side Line에서 코트 안 쪽으로 공을 투입하는 것)할 차례였다. 이 때도 게임은 끝났구나 하고 무심코 보고 있었는데 패스를 받은 선수가 받자마자 마치 배구 토스하듯이 바로 3점 슛을 때려 역전했다. 요즘은 한국에도 위성중계로 많이 소개되므로 심심찮게 보는 장면들이다. 프로 선수들은 마지막 1초를 남겨 놓고도 최선을 다하여 그야말로 손에 땀을 지게 하는 명장면들을 연출한다. 관중들이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열광 할만 하다.
그런 반면에 NBA에선 마지막 쿼터 몇 십초 정도 남기고 점수 차가 많으면 이기고 있는 팀이 그저 공을 슬슬 돌리거나 전원 후보 선수로 교체해 끝내는 경우도 자주 본다. 그럼에도 야유하거나 콜라병을 던지는 관중은 아무도 없다. 이미 승부가 확연하게 끝이 난 상태에서 서로 괜히 힘을 빼거나 부상 당할 소지를 없애자는 것이다. 나아가 공을 잡아 24초 내에 슛을 쏘지 못하면 공격권을 상대에게 넘겨 주게 되어 있는데 역으로 따져 그 24초 동안은 공 잡은 팀이 삶아 먹든 볶아 먹든 상대팀이나 관중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해진 규율을 위반한 적이 없으니 농구에서 지공(遲攻)이나 미식 축구에서 공을 땅에 굴리는 것 둘 다 작전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주식, 부동산 투자, 사업 비결 등을 다룬 “Money”라는 잡지가 있다. “Fortune”지가 기업가가 보는 것이라면 개인이 財테크를 위해 참조하는 잡지로 전국적인 판매부수를 자랑한다. 기억컨대 1991년 어느 달인가 “부시 대통령은 어떻게 세금을 절세(節稅)하는가?”라는 토픽(Topic)을 다룬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말한다. 특이했던 내용 중의 하나가 임기 내내 주민등록을 고향인 텍사스에 둔 채 워싱턴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알다시피 자치정부인 50개 주가 모인 연방 국가이다. 그래서 세금도 각 주에 내는 세금과 연방에 내는 세금 두 종류로 나뉘며 대표적으로 종합소득세는 연방세이고, 자동차 등록세, 재산세, 판매세(Sales Tax:한국의 부가가치세) 등은 주세(州稅)다. 주세는 재정이 튼튼한 주와 약한 주에 따라 당연히 세율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아마 부시의 고향인 텍사스가 백악관이 위치한 콜롬비아 특별구나 메릴랜드 주보다 여러 면에서 세율이 낮았던 모양이다.
미국은 동회가 따로 없고 차량등록국(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에서 주민의 모든 거주 기록을 취급하므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았다는 뜻은 운전면허를 옮기지 않고 텍사스 주의 것으로 그대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하긴 대통령이 된 후 직접 운전할 필요가 없으니 운전면허를 갱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알기 쉽게 말해 주민세, 재산세, 등록세 등을 아끼려고 노무현 대통령이 주민등록을 김해(실제 자택이 있는 곳은 다르겠지만 비유하자면)에 그대로 두고 서울의 효자동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놀라웠던 사실은 전국적인 메스컴에서 이런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했는데도 어느 누구도 부시 대통령을 비난하는 자를 보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의 녹을 받아 먹는 공무원이 그것도 국가 원수가 세금을 자진해서 더 많이 내어도 시원찮을 판에 치사하게 세금 조금 아끼려고 비겁한 술수를 쓴다고 욕하는 자 한 명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절세(Tax Saving)한 것이지 탈세(Tax Evasion)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률이 정해진 범위 안에서 지혜를 짜내(틀림없이 본인은 잘 모르고 담당회계사가 알아서 처리했겠지만) 세금을 적게 낸 것이지 내어야 할 세금을 안 낸 것이 아니었다.
그를 비난하지 않은 데는 미국은 소득세를 비롯한 각종 세율이 상상외로 높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일반인들도 세금이라면 치를 떨기 때문에 일종의 동정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 백악관은 임기 동안만 주거하는 임시 거처이고 부시의 영구주소(Permanent Address: 한국의 호적과는 달리 생업을 영위하며 실제로 주거하는 곳)는 당연히 텍사스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매우 객관적이며 합리적이다. 대통령도 인간인지라 세금을 줄이고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법에 정해진 세금을 꼬박꼬박 낸다면 비난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지금 개정된 국적법에 따라 자녀들의 국적을 포기한 사람들이 매국노로 도마에 올라 시비가 분분하다. 오해는 절대 말아주기 바란다. 그분들이 오직 자녀들의 병역 면제 혜택만을 위해 단기적으로 외국 생활을 한 후에 또 그 목적만을 위해 자녀의 국적을 포기케 한 행위 자체를 두둔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말이다. 도대체 이 법을 개정할 때에 필연적으로 이런 사태가 생기리라는 것을 전혀 예측도 못했다는 말인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그 법을 제정한 국회의원이 순식간에 영웅으로 떠오를 뿐 아니라 한술 더 떠 국적 포기한 자의 명단을 발표하겠다고 공언해 주가는 더 올라갔다. 그런데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만큼 오히려 능력이 모자란 것 아닌가? 외국에서 출생하여 타국의 국적을 취득한 자녀 대신 부모가 국적 포기를 신고할 수 있다고 법을 개정했고 그래서 그 사유야 어찌 되었던 그러겠다고 신고했는데 왜 비난을 하고 왜 명단을 발표해야 하는가? 애당초 그런 법을 만들지 말든지 충분히 시간을 두고 검토해서 예상되는 모든 사태에 대비하는 보완 조항을 두든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어떤 법도 모든 발생 가능한 사태를 전부 명문 규정화 할 수는 없다. 또 법을 지키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보다 법을 제정한 법 정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이다. 그러나 국민의 중요 의무가 납세, 국방, 교육, 선거이므로 국적포기는 바로 병역의무 면제와 연결된다는 것쯤은 삼척동자가 눈 감고도 아는 것 아닌가? 이번 사태가 아주 고단수의 술수가 요구되어 국회의원도 도저히 추측도 못했다면 그렇게 빠져나간 사람이 당연히 욕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정반대로 국회의원이 법으로 구멍을 대문짝 만하게 파서 빠져 나가시오 해놓고는 빠져 나간 사람보고 잘못했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몇 년 전에 있었던 모 인기가수의 미국적 취득으로 인한 한국 입국금지 사태다. 그는 분명 한국 십대들 덕분에 많은 돈을 벌었고 또 미국 영주권자이지만 한국 국민으로서 병역의무를 다 하겠다고 큰 소리쳤던 터라 어쩌면 도덕적으로는 이번보다 더 비난 받을 만하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져서 그는 출입국 관리 규정을 명시적으로 위반한 것은 없다. 당시 사회적으로 큰 불안 내지 소요를 야기시킬 위험한 인물로 분류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하게 말해 큰 불안이 아니라 국민 감정을 크게 상하게 만든 것이었고 명백한 잘못은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한 도덕적 죄뿐이었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 전국민의 감정을 너무나 상하게 만들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며 심지어 온갖 치사한 방법으로 병역기피를 한 정치인들은 왜 뻔질나게 그것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VIP실을 통해 외국을 들락거릴 수 있는가? 정작 출입국을 금지시켜야 할 사람은 이들이 아닌가? 비싼 세금으로 사무(私務)나 관광으로 소일하고 외국에서 오히려 나라 망신살을 시키는 자는 얼마나 많은가?(그렇지 않은 분도 분명 많지만) 앞뒤가 바뀌어도 한창 바뀐 것이 아닌가?
필자가 미국에 살고 그 가수도 같은 교포라서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이야기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미국도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에서 만삭이 된 여자들이 순전히 태어나는 아이에게 미국 국적을 취득시킬 목적으로 단기 방문한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다. 그러나 공항에서 특정한 범법 사항이 없는 한 입국거절은 시키지 않는다. 대신에 간혹 입국심사관이 법에 정해진 자기 재량으로 체류기간을 아주 짧게 주어 출산과 산후조리가 현실적으로 힘들도록 한다. 말하자면 그들도 원정출산이 도덕적,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행동인 줄 알고 심지어 미국으로선 하나 이익 될 것이 없어도 법을 위반한 적이 없으니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번 사태의 당사자도 병역 의무 면제를 목표로 그랬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고 추가 조치가 나와도 반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한 일을 두고 잘했다는 뜻이 아니라 법을 위반한 적은 없다는 말이다. 워낙 국민 감정이 민감한 병역 문제라 그렇지 만약 이번 일에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원칙으로 처리가 안 된다면 언제든지 다른 일로 다른 평범한 사람들도 법대로 따랐는데도 동일한 정신적 현실적 피해를 사후에 입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나아가 문제는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제 삼자로서의 우리 국민이 중립적으로 전후 사태를 좀더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법 규정에 명백하게 위반한 분명한 범죄만 처벌하되 그것도 오직 법에 의존해야 한다. 이번처럼 법대로 하라고 해서 했는데 금방 잘못되었으니 다른 법으로 벌을 주겠다고 덤비면 국민이 법을 준수할 필요와 의미가 없어진다. 정치인이 하는 말은 못 믿어도 최소한 그들이 만든 법은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며칠도 못 가는 법을 만든 자는 영웅이 되고 그 법대로 한자는 천하의 죄인이 되었다.
또 그 가수나 이번 사태 당사자가 아무리 법대로 했다고 해서 그 도덕적 죄마저 용서되고 사회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수의 경우는 음반을 안 사주고 컨서트에 안 가면 된다. 그래도 기어이 가서 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가만히 놓아두면 된다. 반면에 우리 모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거짓말하고 부정부패하는 정치인은 가만 두고 보다가 그 다음 선거에서 떨어트리는 일이다. 병역기피하고 감옥까지 갔다 온 범법자도 국회의원으로 계속 뽑아주고선 이번 사태에 구태여 전국민이 나서서 손가락질 하며 정죄할 성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절세와 탈세는 세금납부 금액에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의미와 적용에서 정반대다. 어쩐 면에선 절세는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장려해야 한다.(실제로 미국은 그렇다. 다음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국민들이 잘 알게 계몽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심한 말로 기분 내키는 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법을 만들고 잘 안되면 뜯어 고치는 것을 되풀이 하면서 그나마 그런 법에 따라 절세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마저 매도해선 안 된다.
사회적으로 도덕과 기강이 바로 서는데 특별히 고도의 정치적 기술이 따로 필요 없다. 철저하게 법과 상식대로 합리적으로만 하면 된다. 탈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단속하여 반드시 정죄하되 절세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대통령도 인간인지라 절세하겠다고 나서면 아무도 비난할 이유와 필요가 없다는 것에 사회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면, 한국에서 실정법 위에 정치인이 군림하고 기존의 법에 따랐는데도 소급 법안으로 처벌 받는 희극 같은 일이 앞으로도 계속 벌어지리라는 것은 삼척동자가 눈감고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5/17/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