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하나님은 아무 신자나 순교를 당하게 하지 않습니다. 순교를 감당할 만한 믿음이 굳건한 신자에게만, 반드시 순교라는 방법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 높아지게 하실 수 있는 특별한 경우에만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신자에게 이미 내주하고 계신 성령이 믿음을 끝까지 붙들도록 인도해주시고 순교의 고통을 이겨내고 오히려 평안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해주십니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경우를 보십시오.
"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5-60)
순교 당한 스데반은 천국에 계신 예수님이 자기를 영접하는 모습을 보고 큰 기쁨과 평강 가운데 있었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더 큰 불안에 떨었습니다. 스데반은 나아가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까지 하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꼭 순교를 당해야만 하는 굳건한 믿음의 용사에겐 이와 동일한 은혜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고통의 본질은 영적인 고통입니다. 육신적 고통도 크지만 그것은 그림자일뿐, 진정한 본체는 모든 인류의 죄를 실제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죄를 한톨도 허락하지 않는 거룩의 본체이신 하나님이 모든 죄를 자신 위에 덮어써야 했습니다. 삼위일체로서 아버지와 본질상 한분인 분이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뿐 아니라 무한한 진노와 저주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요컨대 그 절망과 고통의 여섯시간은 온 인류가 영원토록 받을 지옥 형벌을 모두 제곱해 한 순간으로 압축해놓은 것과 같은 형벌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분의 속죄의 값은 무한대이며 이론상 무한한 수의 인간이 최악의 죄악을 억만겁만큼 쌓더라도 그 죄의 형벌을 모두 흡수하고도 남을 양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 불못에서 받을 형량조차 그 영적 형벌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값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기에 통과할수 있었던 시련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질문을 주셨네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둘로 구분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첫째로, 육체적 고통은 순교자들이 더 크게 겪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 채로 화형을 당하거나 맹수에게 잡아 먹혔고, 베드로만 해도 전승에 따르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더 큰 고통을 겪음) 죽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경우는 더합니다. 고후11:23-27을 꼭 다시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대표적으로 예수님이 한 번만 맞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경우는, 절대로 그 육체적 고통이 약한 것은 아님, 매를 한 번만 맞았으며 십자가에 달린지 몇 시간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이미 밤새도록 시달려서 너무 피곤하고 연약해진 탓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보통의 경우, 알기 쉽게 표현하면 오징어가 덕장에서 말라 비틀어지듯이 인간의 육신도 며칠 동안 그렇게 죽어 가는데 그 고통이 도무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숨이 붙어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에도 벌레들이 피부를 파먹으며 속으로 들어가고, 새들이 눈 코 귀들을 쪼아서 먹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빨리 운명한 것은 독생하신 그리스도를 그렇게까지 비참한 모습으로 죽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정신적 고통은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짊어져야 할 뿐 아니라, 여전히 죄 중에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할 인간의 상태를 너무나 안타깝고도 불쌍하게 여겼기에 우리는 상상으로도 도무지 가늠하지 못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통분하며 우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로 변하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성부 하나님과 완전한 단절을 겪을 일도 힘들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했습니다.
순교한 신자들도 주변 사람들이 여전히 사탄에 미혹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괴로워 했을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육체적 고통보다는(고후11:23-27) 바로 이어서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이 더 크게 염려된다고 고백했습니다.(28,29절) 아무리 그래도 인류 전체의 죄의 짐을 지고 안타가워하신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