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인가 모범수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9-11)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그분이 사랑해주셨으니 그 보답으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것인가?
신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니까 사랑하라는 것인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란 사형이 확정되어 그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수가 그 사형을 대신 당함으로써 완전히 사면 된 자다.
교회 안의 동료 성도들도 자기와 똑 같은 방식으로 이미 사면 받은 자다.
불신자들은 아직 사면이 안 되어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다.
곧 닥칠 사형 집행만 기다리는 죄수들끼리 모인 감방을 한번 생각해보라.
그곳만큼 세상에서 동지애가 강한 곳은 없을 것이다.
그 중 한 명이 어느 날 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고 치자.
남아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질 것 아니겠는가?
또 그 중 한 동료가 나중에 사면되어 자기 앞에 나타난다면 얼마나 반갑겠는가?
사형 집행일만 기다린다면 인생으로서 갈 데까지 간 것이다.
더 이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곳이 없는 최악의 막장에 다다른 것이다.
그곳에선 무슨 일을 해도 더 나빠질 것이라곤 없다.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니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죽음만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당연히 죽음보다는 더 낫다는 뜻이다.
맨 밑바닥에 떨어진 자가 할 일이라곤 다시 올라오는 일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진짜로 사형을 사면 받았다면 이제 사랑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진정으로, 기꺼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된다.
사단의 방해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죄의 본성만 물리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미 완전히 죽음의 문턱까지 함께 걸어갔었던 자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는 일밖에 더 있는가?
세상 사람의 사랑은 사형수가 아닌 일반 죄수끼리의 사랑이다.
가장 형기가 적은 자가 많은 자를 측은히 여기는 정도다.
나은 자가 못한 자에게 하는 적선이자, 자기 자랑이요 인간적 의다.
신자마저 불신자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면
사형수에서 사면 받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수감생활을 잘해
형기를 감면 받은 모범수의 사랑일 뿐이다.
지금 당신은 사형수의 사랑을 하는가? 모범수의 사랑을 하는가?
하나님께 사형을 감면 받은 자인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형기를 감축 받은 자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가? 밖에서 혼자서 사랑하는가?
2009. 1. 17
사면 받은 사형수가 자기가 스스로 잘 해서 형기 감형 받았다
착각하는 것이겠지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 신자들의 무서운 병, 바로 착각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