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작금 세계 공황 이후로 최고로 어려운 시기다.
쉽게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경기가 살아나도 구조적 실업 증가를 해결할 묘책이 별로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인류 역사 이래 지금 같이 문명이 발달하고 물자가 풍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생존을 걱정해야 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토끼 굴에 들어간 주인공 소녀는 계속해서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자꾸만 주변 상황과 대비되어서
자신이 대체 누구인지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결정적으로 쐐기벌레가 던진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완전히 울상이 되어서 실토한다.
“죄송하지만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요. 알다시피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걸요.”
지금의 불경기에 근심이 생기는 이유도, 또 그것을 이겨낼 비책도
사실은 엘리스가 겪은 체험에서 찾을 수 있다.
금융전문가의 조언이나, 정부의 경제 부양 정책이나, G20 선진국의 공동대처 등에선
아무리 해도 찾지 못한다.
엘리스는 주변보다 자신이 커지면 자신감이 넘쳤고
주변보다 자신이 작아지면 공포에 질렸다.
주위 상황과 대비한 상대적 정체성만 갖고 있었다.
상대적 정체성이란 항상 변하니까
스스로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까닭 모를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는...
이제 이 불경기를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방도가 나왔다.
자신의 정체성을 주변상황과 비교하지 않고
영원토록 변함없는 절대적 기준 안에서 되찾으면 되지 않겠는가?
겁에 질린 소녀가 자기보다 덩치가 엄청 커서
충분히 보호막이 되어줄 것 같은 돼지 뒤에 숨어 봤지만
돼지 또한 겁에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 대책을 천신만고 끝에 붙들어 봐야
그 앞에는 그보다 더 큰 환난이 쉴 새 없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2)
갈수록 옭매어 들어오는 주변 상황과 비교해서 자신이 너무 무능하다고 여겨지는가?
그 안에선 아무리 더 나은 주변 상황을 찾거나 만들려 해도 밑이 터진 웅덩이일 뿐이다.
주변이 차츰 이상한 나라처럼 변해간다고 느껴질수록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한 분 외에 우리가 기댈 곳은 없다.
신자마저 신자로서 주체성을 상실하는 순간 여느 사람처럼
곧바로 이상한 나라의 토끼 굴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0:10)
4/5/2009
그래서 이 곳 이 홈피교회가 저희들은 너무 좋습니다.
그 훈련 받기에 합당한 안내지침서가 마련되어있으니
이런 행운이 어디있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