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믿음은 창조주의 완전하심과 그 분의 완벽한 창조를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창조에 어딘가 부족함이 있지는 않은가 의심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느끼는 결핍과 불안이 그 증거입니다. 물질적 부족이든 정의와 공평의 부재이든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무엇을 원하고 지금 이 순간 뿐 아니라 내일과 나아가 죽음을 걱정합니다.
우리의 이런 마음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육신에 매여 있는 동안 그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하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의 중심은 진심이나 전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가난과 애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위로받을 수 있는 애통한 마음,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가난한 마음이 곧 하나님이 보시고 찾으시는 중심인 것입니다.
그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언제나 죄의 포로가 되고 마는 곤고한 자신, 사망에 매인 스스로를 한탄하던 바울은, 그 어떤 조건이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까닭은 이미 완전하신 창조주께서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온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참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악한 생각과 행동을 하던 나쁜 사람이 개과천선하여 좋은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믿음이나 신앙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나쁜 사람이었을까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누구보다 자기자신을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 특히 율법을 근거로 최대한의 선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다만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거나, 더 착한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차이에 구원과 영생이 달려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의지와 달리 악을 행한다는 바울의 말은 자신이 비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럴 리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 즉 죽은 자로 살고 싶지만 육신의 생명은 언제나 그 반대로 살아있음을 주장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딜레마에서 나오는 절망과 좌절이 아니면 우리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결코 알 수 없고 따라서 절대로 애통하지도 않습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세리의 마음이 곧 신자의 마음이며, 하나님께서 보시는 중심은 바로 그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어떤 동기와 생각으로 행하는지 보시고, 평소의 인생관과 세계관과 가치관과 종교관 등이 어떠한지 보시며, 특별히 당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믿음을 갖고 있는지 보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