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ㅡ> 유대인은 관례에 따라 금식을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시기도 했습니다.
결코 관례를 무시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제자나 혹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금식을 하지 않아서
의문을 제시한 것인지, 아님
특별 금식(세례 요한의 구금)에 대한
동참을 하지 않아서 의문을 제시한 것인지요?
금식의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그분과 가까워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지상에 계실동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체가 하나님의 본체시며 바로 그 자리에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뒤에는 물리적, 가시적 임재가 아닌, 내주하는 성령님을 통해 영적으로 주님과 접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참된 금식이 다시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본문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우선 요한의 구금에 대한 기사는 마태복음에선 11:2 (14:1-12)에 가서야 나오므로 본문 9장과 연결해 살펴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곧바로 15-17절에 당신과 제자들이 유대인이 정해 놓은 금식일에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기 이전에는 국가적인 비상 사태나 개인적으로 절망에 빠졌을 때 참회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소망하며 금식했습니다.(삼상31:13, 대하20:3) 그러다 포로기 이후에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 공동으로 금식하는 네 시기에 대한 규정을 제정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슥8:19)
질문하신 본문의 상황은 아마도 그 절기 중의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열려고 오셨기에 당신께서 계신 동안에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습니다.(마9:15-17), 주님은 이미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16)고 당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형식적인 금식의 잘못을 꾸짖었습니다. 스가랴서가 금식을 제정한 뜻대로 순종하지 않았던 즉,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과 동물희생제사 중심의 유대교를 종식시키고 십자가 은혜의 복음의 기독교로 새 시대를 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은 날에 굳이 금식을 하지 않았고 제자들도 굳이 강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여전히 유대교 관습을 그대로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개인의 경건을 위한 금식의 중요성까지 부인하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주님이 십자가 구원을 완성한 후에는) 참된 금식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산상수훈에서도 제자들에게 금식할 때는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되 하나님과만 일대일의 친밀한 교제와 경건의 시간을 가지라고 가르쳤습니다.(마6: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