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이라고 하면서 왜 자꾸 믿으라고 하는가?
구원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따른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목사님들이 설교나 전도할 때에 예수를 믿어야, 영접해야, 믿고 순종해야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럼 예정에 의한 구원의 진리를 기독교인들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되고 또 상호 모순되는 말처럼 보입니다. 기독교 구원의 전과정이 초자연적 간섭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인데 이를 인간의 말로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한 몇 가지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표현상의 제약
말이란 현실 세계 안에 있는 분명한 실체나 인간의 지정의로 누구나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에 대해서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물들도 비록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지정의를 확실히 갖고 있으며 자기들끼리는 아주 기본적인 의사 소통을 합니다. 그러나 표현이 우습지만 개나 소가 생각하는(?) 것을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말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선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중생으로 거듭나 구원을 얻는 과정을 말로 표현하는데 제약이 있다는 것이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하거나, 표현 기법이 미숙하다거나, 문학적 소질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제대로 나타낼 단어 자체가 없습니다. 구원이 가시적인 물질계나 인간 지정의가 경험하는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 성령이 인간의 영혼을 바꿔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원칙적으로 인간의 말로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신자가 일단 예수를 믿게 되면 이미 자신의 지정의 범위 안에서 인식한 후이기 때문에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종교적 용어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구원이 성령의 역사라고 해서 불신자에게 “성령의 초자연적인 간섭을 소원하고 기다리십시오” 혹은 “성령이 거듭나게 해 줄 것을 기도하시오” 또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선택이 있으니 거기에 빠지지 않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전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도 받는 불신자들은 예수님은 둘 째 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완전해지지 않은 단계에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령의 역사와 예정의 교리부터 직접적으로 바로 이해시킬 재간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빌리 그래함 선교사나 바울 사도가 오더라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고 하면서도 이어서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절)라고 했고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절)라고 했습니다. 비록 제약된 인간의 표현일지라도 그렇게 밖에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고 믿음을 가짐에 있어 성령의 역사가 전제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2.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름(롬1:17)
예수를 믿은 자들에게 어떻게 믿게 되었느냐고 질문하면 대체적으로 자기의 중생 체험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답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가 그저 좋아졌고 믿어졌다고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아무 이유없이 예수가 싫다가 믿고 나니까 아무 이유없이 좋아졌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정확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믿었다는 것이 맹목적, 미신적, 강요된 신앙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영혼에 역사했기 때문에 그 구체적 과정을 몰랐다는 실토입니다.
어그스틴도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에서 믿로 이른다고 했습니다.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간섭으로 인한 중생의 체험이 있고 난 후라야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와 선택에 의한 예정 교리가 이해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그 교리를 학술적으로 연구한다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간혹 교리가 이해되고 그것에 동의해서 믿으려고 결단하여 믿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이 구체적으로 인식하든 못하든 개인마다 어떤 형태로든 각기 특이한 거듭남의 체험을 통해 구원이 이뤄지는 것이 기독교만의 신비이자 특징입니다. 진정한 회심의 경우 십자가 복음이 자기 이성으로는 그 동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다가 별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따지지 않았는데도 모든 의심의 그림자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졌다는 고백이 반드시 따릅니다.
기독교 신앙은 먼저 믿어지고 난 다음에 자기 믿음의 내용을 정리하고 쌓아가는 것이 순서입니다.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 도 닦듯이 계속 연구 하여 궁극적인 득도(得道)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고 말한 것은 중생하는 체험으로서 믿음이 먼저 있어야만 자기가 구원 받게 된 그 진리와 복음의 풍성한 내용을 더 깊이 알아가는 믿음이 가능하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이라는 용어에는 1)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 믿어라고 하는 말과 2) 이미 믿은 신자에게 잘 믿어라고 하는 두 가지 뜻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서로 다른 신앙의 차원이자 내용을 뜻하지만 구별할 수 있는 더 좋은 표현이 없기 때문에 두 경우에 다 동일하게 믿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타종교와는 달리 기독교에선 행위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 쪽의 공로가 구원에 전혀 작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려다 보니 믿음이라는 단어가 더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이 두 가지 믿음을 잘 구별해서 판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 같은 경우 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오래된 신자부터 완전한 초신자까지 참석하므로 목사님들도 명확하게 구분해서 설교할 수 없으며 나아가 그렇게 하려 했다간 더 많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은 후에는 초신자 성경 공부 등을 통해 자기가 얻은 구원의 의미와 진리에 관해 반드시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과 구원의 문제를 너무 교리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접근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더 혼동이 올 수 있습니다. 분명한 중생의 체험이 있으면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믿음과 구원의 전후관계와 상호 작용에 관한 의심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신앙을 유지하고 성숙시키는 데에 특별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1:16) 하나님이 구원으로 가는 믿음을 심어 주시고 물을 주어 자라게 하십니다. 나아가 믿은 후에는 오직 그 믿음으로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한 하나님의 열매를 수확하며 당신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더 많이 쓰임 받기 위해 전념하므로 그런 문제에 신경 쓰고 혼동할 여지가 자동적으로 없어집니다.
3. 예정과 믿음
불신자들에게 “예수를 믿으시오, 주님을 영접하시오,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시오, 하나님에게 항복하시오”라고 전하는 것이 피전도자에 대한 권유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시오”라는 말을 인간이 자유의지를 동원해 이해하고 수긍하여 믿고자 결단하도록 노력해 보라는 뜻으로만 해석하면 질문자님께서 염려한 대로 선택과 예정에 의한 구원 논리와 상호 모순되는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불신자에게 믿으시오 라는 말은 전도자가 전한 그 말을 믿으라는 것보다 당신이 복음이 믿어지게 된 것을 인정하시오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전도자가 말로 전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신자에게 일어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반응과 변화를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끈다고 할 때의 그 첫번 째 믿음이 자기에게 생겼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요구입니다. 이 때의 믿음은 구원을 얻는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단지 통로일 뿐입니다.
이 문제를 제임스 M. 보이스라는 신학자가 알기 쉽게 이런 예로 설명했습니다. 백불 짜리 지폐는 그 가치를 인정한 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돈의 개념과 용도를 모르는 어린아이나 정신병자는 아무리 백 불을 지어주어도 휴지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 불의 가치를 인정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든 재벌 회장이든 그 쓸 수 있는 가치의 한계는 동일합니다. 백 불로서 물건을 구매할 때에 재벌회장이라고 더 많이 주고 홈리스 피플이 쓴다고 해서 적게 주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 백 불짜리 지폐의 가치는 그것을 인정한 사람의 노력과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그 돈 자체에 이미 완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불 지폐가 갖는 구매력을 쓰는 자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 불에 대한 믿음은 백 불이 백 불다워지게 하는 수단과 조건이 아니라 단지 통로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영접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한다, 하나님 앞에 항복한다... 등등 그 모든 표현들이 바로 이 예의 경우와 같습니다. 내가 구원의 가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구원을 얻는 과정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보다 오히려 ‘예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체험’이 더 요구되고 또 반드시 그런 과정을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는 것같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의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납득하고 수긍해서 믿기로 했다는 것으로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의 교리를 믿어라는 것이라기보다 우주의 궁극적 절대적 실재(實在)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 사랑 앞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고 또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임임을 처절하게 자각하여 영적인 파산 상태, 심령이 완전히 낮아지고 가난한 상태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 받고 싶고 완전히 텅 비고 갈급해진 영혼에 주님의 영으로 채워주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나의 정신 세계 밖에 실재(實在)하시는 긍극적인 절대자 그 분이 나를 아시고 찾아와 주셨다는 것을 성령의 임재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에 아주 중요한 아니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을 믿으시오,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시오” 등등으로 표현하는 내용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중생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인간의 지정의적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결단은 그 자체로 이미 인간의 공적에 해당됩니다. 예수를 믿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불신자에서 신자의 위치와 신분과 소속으로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난 후에는 반드시 자기 지정의가 동원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하는 결단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통로로서 믿음의 단계입니다. 말하자면 믿음이 들어 온 것을 시인하는 믿음입니다. 또 그런 단계를 거치는 것조차 주님의 은혜임을 시인하셔야 합니다. 아니 구태여 시인하라고 권유하거나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교리를 배우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오직 은혜에 의한 구원임을 인정합니다. 바울 사도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다”(고전15:10)는 고백이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한 마디로 믿어져서 믿는 것이지 믿으려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만 믿음을 외적인 행동과 대비하여 단순한 정신활동으로만 국한해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 안에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진술하고 있는 내용 전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십자가 복음을 그 이상 다른 말로 표현할 더 좋은 길이 없습니다.
술 주정꾼 이발사였던 멜 트로터라는 분이 구원 받고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했고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의 ‘도시 구제 선교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회심한지 35년 이후에 그 선교회 모임에서 그는 간증시간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는지 간증하도록 요청했습니다. 14살 난 한 소년이 일어나더니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셔서 나는 정말 기뻐요. 아멘”이라고 짧게 말했습니다. 토르터는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훌륭한 간증이었습니다”라고 그 소년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도 멜 존슨도 후에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
이 예에서 보듯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근본적인 뜻은 바로 예수님이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에게 먼저 찾아 오시고 그 분이 우리를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트로터의 말대로 예수님이 나를 믿게 해주셨다는 것 이상 구원을 잘 설명하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시오라는 말은 바로 그런 구원을 간절히 소원하라는 말입니다. 또 그것이 실제 사실로 자신의 영혼에 일어난 것을 확신한다면 진실된 자신의 말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시인하라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전적 은혜였다는 신앙을 고백하라는 것이지 단순히 무조건 믿으라는 요구가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