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달란트의 비유에서 달란트가 진정 무엇인가요? 목사님들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또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내어 쫓겨 슬피 운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구원의 잃음과 관련이 있습니까?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요?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쌔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5:14-30)
[답변]
열 처녀 비유에서 말씀 드린 바 있는 예수님 비유의 해석 기준에 따라 먼저 생각해 본 후에 특별히 지적하신 세 가지 질문에 답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문화적 배경
고대 사회에선 주인은 맡긴 일에 대해 종에게 상당한 권한과 책임을 주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돈을 맡기면 종은 자기 재량으로 장사를 하여 주인에게 이윤을 보게 합니다만 여전히 그 재산의 원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또 간혹 종에게 재산을 나눠 주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똑똑하지 않을 때는 종에게 자신의 기업을 상속시키기도 했습니다.
달란트는 원래 무게를 재는 단위였지만 금과 은을 저울로 달아 화폐처럼 통용하다 보니 나중에는 무게와 화폐 단위 두 가지로 다 사용되었습니다. 본 비유에선 화폐 단위를 의미하는데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으로 따지면 6천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현재 미국의 최저임금을 간단하게 시간당 5불로만 잡아도(실제는 이보다 높지만) 5불/8시간으로 하루 40불이 한 데나리온인 셈이고 그 6천배는 24만불에 해당할 정도의 고액이 되듯이 예수님 당시에도 한 달란트만 해도 엄청난 돈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도 주인이 아마 전 재산일지도 모르는 엄청난 돈을 집사 세 사람에게 나눠 맡기고 각자 자기 지혜와 노력으로 돈을 관리하라고 한 후에 안심하고 타국으로 떠나 버립니다. 오랜 후에 돌아 올 동안 주인은 전혀 간섭이나 확인을 하지 않았고 대신에 집사들도 자기 책임 하에 그 돈을 불려 놓아야만 했던 것이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반면에 게으른 종이 땅에 한 달란트를 파 묻은 것은 당시에 돈 같은 귀중품은 땅에 파 묻어서 보관했던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에 관한 다른 비유에서도 ‘밭에 감추인 보배’(마13:44)라는 표현이 나오듯이 땅 속에 보관하는 것은 당시로선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2. 문맥에서 살펴 볼 문제
예수님은 불시에 오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신자들이 어떻게 대비하고 있어야 할지 다섯 가지 비유(마24:42-25:46)로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는 네 번째 교훈에 해당합니다. 그 주제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게 받은 각각의 재능들을 성실히 활용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에서 살펴 본 대로 열 처녀 모두가 구원 받은 신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진정한 관계를 갖지 못한 불신자를 뜻했던 것이지 신자가 신앙 생활하면서 특별히 심판을 앞두고 게으름 부린 것을 비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세 종들이 다 이미 구원 받은 신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섯 비유로 가르침을 받을 대상은 신자이고 그 주제도 모두 신자에게 재림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비유의 주제가 그러하듯이 이 비유 또한 천국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와 불신자를 예를 들어 대비 시켰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마지막 때를 잘 대비했기에 천국을 갔고 잘 대비하지 못한 신자는 지옥 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마지막 때를 잘 대비해야 하고 불신자 또한 마지막 때에 관한 믿음이 없어 당연히 잘 대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마지막 때와 심판에 관한 인식과 믿음을 갖고 항상 자기 가진 재능을 다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비유의 구체적인 뜻과 질문에 관한 답변
질문자께서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의문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기에 그 세 질문만 따져 보아도 이 비유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1. 달란트의 뜻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만의 강점, 특기, 재능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약점이 많고 무능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나름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달란트가 물질적 소유 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비유의 성격상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화폐 단위를 예로 든 것에 불과합니다. 각 개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성격, 지성, 감성, 의지, 체격, 환경 등 모든 장점을 말합니다. 그런 장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것이며 인간이라면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최선을 다해 잘 가꾸고 열매를 맺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섯, 둘, 한 달란트 식으로 다르게 주었다는 것이 특정인을 편애하거나 차별해서 질과 양을 다르게 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고유의 능력과 재능이 다 다르다는 것을 달란트라는 단위로 표현하다 보니 수치적으로 차이가 진 것 뿐입니다. 모든 인간이 인격과 역할이 서로 다른 독특한 존재로 이 땅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비유의 달란트가 신자가 믿고 난 후에 받는 고전 13장에 나오는 방언이나 신유 같은 성령의 카리스마적인 은사와는 다릅니다. 그런 외적 은사는 하나님이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더 활발하게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는 은사입니다. 방언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매번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가 갖는 특성상 자진해서 열심을 내어 일을 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엡3: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은사)이 발휘되어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이 쓰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달란트가 신자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섬기는 은사, 화해시키는 은사, 찬양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들 같이 남이 갖지 못하거나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신자가 되었으므로 사역에 쓰라고 따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 후 주신 것은 앞에서 말한 성령의 외적 은사뿐으로 특정한 일군으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평신도가 말하는 그런 일반적인 은사들은 신자가 되기 전부터 각자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자기만의 재능, 특기, 장점으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되기 전에는 그것들을 잘 모르고 있었거나 알아도 세상의 형통을 향해 발휘되다가 신자가 된 후에 하나님 뜻 안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발견하고 주님을 위해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들이 각자 누구나 갖고 있는 장점이며 바로 본 비유에서 말하는 달란트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말하는 대로 따르면 신자가 된 후에 자기에게 찬양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같은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도 제대로 교회와 성도를 위해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쳐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만큼 절대 옹졸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가 자기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고도 고의로 게으름을 부리거나 그 은사가 필요한 사람이나 일을 외면했을 때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거나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면할 수는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갖고 있는 재능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제대로 쓰지 않고 묵혀 두었다고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본 비유가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각 종에게 달란트를 나눠주고 떠나 버립니다. 자신의 권위와 지혜로써 분배한 후에는 각 종들의 자유의지에 맡긴 것입니다. 인간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merchandise)이 아니라 단 한 사람도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똑 같지 않은 걸작품(masterpiece)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신 분의 뜻과 계획에 맞게 살아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강요하거나 간섭하지 않습니다. 비유대로 타국에 가서 오랫동안 있다 심판 때에 만 다시 오실 것입니다.
3.2.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구원을 잃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히 나옵니다. 만약 달란트가 신자에게만 준 특별한 은사라고 해석하면 필연적으로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신자가 된 후에 게을렀기 때문에 구원을 잃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특유의 장점이라고 해석하면 그 사람은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못 얻는다는 뜻이 됩니다. 어차피 구원을 못 얻으니 같은 뜻이라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신자가 믿은 후에 저지른 잘못이나 게으름 때문에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과 처음부터 불신자였으니까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그 의미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합니다.
제가 하는 해석이 맞으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불신자였다는 증거를 찾아 내어야만 합니다. 역으로 또 그것이 증명되면 달란트가 신자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장점이라는 3.1.의 해석도 자동으로 한 번 더 확인됩니다.
흔히 이 종을 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달란트를 땅에 파 묻었다는 행위만 자꾸 문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더러 교회 일과 전도에 열심을 내라고 독촉하는 구실로 삼습니다. 이 종이 그렇게 한 이유가 특별히 돈을 벌기 싫어한 것인지 불명하지만 돈을 허랑방탕 써버리거나 그 돈으로 손해 보거나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로선 가장 안전하게 돈을 보관하는 방법인 땅에 파 묻었습니다. 나름대로 자기 할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그대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행동을 한 배경의 생각입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에서 나오지 행위가 생각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주인을 오해 한 것입니다.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24절)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여기서 ‘굳은 사람’은 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칠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는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만 집착하며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로소득을 탐하는 파렴치한 인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의 뜻은 심지어 남의 것을 빼앗아 치부하는 자로 몬 것입니다. ‘헤치지’는 당시 타작 마당에 곡식을 늘어 놓고 말린 후에 키를 헤쳐서 곡식을 모으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타작을 안 하고도 모으는 것은 남이 타작한 것을 뺏는 수 뿐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당연히 예수님과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럼 그 종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인간의 제물과 치성을 받아 먹기만 하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진노의 벌을 내리며 인간이 처해 있는 형편이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을 하지 않는 포악한 독재자로 본 것입니다. 불신자나 이방인들이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모든 정성과 열심을 바쳐 어떡하든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여 세상에서의 액운을 피하기 위해 불안하게 모시는 그런 신입니다. 이는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 종은 주인을 무섭게 본 정도를 넘어서 주인 앞에다 대고 은근히 비난하며 대적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종이 주인을 포악한 파렴치 강도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비난을 한 까닭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다른 사람에게 비해 훨씬 작다고 생각해 불만에 가득 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재능은 그 특성과 역할이 다 다름에도 단순히 양적 기준으로만 비교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남보다 차별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종은 25절에서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관습이 주인이 종에게 재산 증식에 대한 전적인 재량권을 주었으므로 비록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지만 종은 그 돈을 자기 돈이나 다름 없이 아끼고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종은 그 돈을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자기가 아무 일을 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 하고 나아가 주인에게 당신 것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빈정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인간의 자세가 아니기에 신자일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가 단순히 하나님의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얼마나 많이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교회 행사나 전도에 조금 등한시 하거나 불참한 것을 따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각 개인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며 나아가 그 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 하는 근본적인 신앙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 것입니다.
반대로 착하고 충성 된 종의 경우를 봅시다. “바로 가서”(16절) 또 “그 같이 하여”(17절)라고 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전적 신뢰가 바탕이 되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지금 자기가 받은 달란트가 누구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 분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서 받은 바 그것을 동원해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헌신한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여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었는가 따질 수는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 벌었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의 성과를 내었습니다. 받은 재능 그대로 다 동원하여 성실하게 사용했기에 받은 만큼의 결과가 나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 내었거나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세 달란트 벌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니까 당연히 다섯 달란트 버는 것이고 두 달란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한 달란트 받은 자도 주인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었다면 바로 가서 한 달란트 벌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착한 종에게 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칭찬했지 큰 일을 했다거나 차별을 두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관심이 돈을 얼마나 벌었나 하는 계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제대로 알고 무슨 일에도 성실하게 순종하는 가를 본 것입니다.
이럼에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신자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자가 교회 일이나 선행에 열심을 내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해석이 맞을까요?
3.3.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해결할 문제가 하나 남았습니다. 불신자를 구원하지 않으면 되지 왜 있는 것까지 빼앗으며 또 신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만 하면 되지 왜 신자에게 그 뺏은 것을 더 주어야 하는가? 그것도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해놓고 신자에게만 더 큰 특혜를 주어야 하고 불신자에게 불행이 겹쳐져야 한다면 그 말과 모순되지 않는가? 분명히 좀 난해한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어떤 성경구절로도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자는 하나님이 복을 시쳇말로 따블로 더 부어 주시고 게으른 자는 반대로 깐 이마를 또 까시는 분이라는 식의 해석은 배제하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교회에서 목사님이 그런 뜻의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디까지나 신자의 열심을 독촉하고 또 열심을 내는 것 자체가 신자의 축복이 되니까 권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넘어 가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항상 하나님의 품성,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인자가 무한하시며 화 내기를 더디 하시며 우리를 향한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십니다. 독생자와 맞바꾸어 우리 영혼을 구원해 주실만큼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길 원하시기에 신자에게 이미 성령을 부어 주셨으며 당신의 열심과 의지로 우리를 영광된 자리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는 일 하나하나로 비례해서 상벌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이전 불신자 시절에 생각했던 진노와 신경질의 하나님으로 되돌리는 결과가 됩니다. 무익하고 게으른 종이 그 주인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과 같아져 버립니다.
무익한 종에게 맡긴 한 달란트는 아무런 소득을 낳지 못해 주인이 그 종에게 가졌던 계획과 뜻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세월만 지체 시킨 결과를 나았습니다. 그 달란트를 빼았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계획이 불신자에 의해 조금 지연 되었다 치더라도 당신이 정하신 때와 방법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반드시 성실히 충성하는 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일의 시기와 그 수확량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단 한 사람이라도 신령한 자를 찾아 내어 그 영혼을 구원하는 데만 당신의 관심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는 말씀은 따라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신령한 자는 그 일을 하는 것 만으로도 넘치는 축복을 이미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면 할수록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가 단순 비례가 아니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나아가 나중에 천국 잔치에 참예할 때에도 당연히 주님의 큰 칭찬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비유에서 말하는 주제입니다. 게으른 종이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진 않았지만 대신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성도가 교회 일이나 봉사를 등한히 한 것으로 이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 스스로는 자기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알고 심지어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저들은 단지 자기들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위해 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마6:32,33) 하나님으로부터 각자 고유의 재능과 은사를 충분히 다 받았음에도 그것들을 사용해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롬1:21) 오직 자기에게 큰 일이 생기지 않기만 빌 뿐입니다. 무익한 종이란 바로 그런 자입니다.
대신에 충성된 두 종이 바로 가서 자기 할 바를 성실히 수행했듯이 신자는 주님의 재림이 언제 올지 모르고 또 더디 올지라도 그런 것과는 상관 없이 언제나 자기 받은 것이 충분하기에 감사히 생각해고 그것으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신자란 더 이상 심판이 두려워서나 혹은 심판 때에 상급을 더 받으려고 주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신자란 누구나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부름 받았고 세상으로 보내어진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충분하고도 완전한 달란트를 이미 다 주었습니다. 최고로 많이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 신자에게 갖고 계시는 주님의 계획과 뜻에 쓰임 받는데 각 자가 받은 재능이 절대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에게 현재 맡겨진 바로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셔야 합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성실히 수행 할 때에는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그 일을 감당케 해 주십니다. 상급을 얼마나 받을 것인가 혹시라도 잘못해 벌 받지 않나 염려하는 것은 참 신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신자가 가져야 할 태도이자 이 비유의 주제입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이 글의 주제와 관련없지만 글을 읽다가 은사의 종류에 궁금증이 생겨서요
3.1 달란트의 뜻은 무엇인가에서
은사의 종류를 3가지로 설명되는것 같은데
1. 달란트 - 신자가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음, 사역용 아님
2. 성령의 외적은사 - 신자가 되고난 후에 받을수 있음, 사역용
3. 일반은사 - 신자가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음. 사역용 아님
이렇게 구분될수 있는건가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이 비유만 볼때마다 애매하게 언급되는 교회 열심론, 게으름 구원탈락 경고 답답했는데
뻥뚫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