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의 성경적 근거가 궁금합니다. - 죽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질문]
하나님께서 성경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을 기록하셨지만, 모든 비밀을 기록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을 미리 알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 - 그러나 함부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그 의문을 이제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과 지옥이 과연 있는지, 그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애매한 단어로 설명하는 '천국'과 '지옥'이 엄밀하게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합니다.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기로는 성도가 죽으면 몸은 땅에 묻혀 쉬게(잠자게..?) 되고, 영은 '천국'이라고 불리는 하나님 나라로 가 있다가 예수님 재림 때 이 땅에 몸이 거룩하게 변해서 다시 살아나고 영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 것 같은데, 그럼 불신자는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요? 몸은 땅에 묻혀 심판을 기다리면서 쉬고, 영은 지옥을 가서 사단에게 고통 받다가(눅 16:23처럼?) 예수님 재림 때 몸이 다시 살아나서 심판받고, 다시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인가요?
너무 막연한 질문 같아서 몇 가지 추려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1. 예수님 재림 전, 성도가 죽으면 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요?
(예수님께서는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완전한 영적인 세계겠죠?)
2. 예수님 재림 전, 불신자가 죽으면 어딜 가게 되나요?
보통 말하는 불지옥이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혹은 사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어떤 공간, 이라는 것도 정말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혹은 그냥 '영적 사망 상태' 로 있게 되는 것, 즉 영이 '소멸'하게 되나요?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예수님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까지 '쉬는 상태' 즉 자는 상태가 되나요?
3. 예수님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몸이 거룩하게 되어 다시 살아나고 그 안에 영이 다시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 후에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나요, 아니면 그 거룩한 '몸'이 다시 천국으로 들려올라가나요? 그리고 재림하신 이후의 삶과 재림하기 전에 죽은 성도들이 가는 천국의 삶이 같나요, 다른가요?
4. 예수님 재림하신 후 불신자들은 어디로 가게 되나요?
그냥 지옥에 가서 사단에게 괴롭힘을 받는다고 하기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사단을 완전히 멸하신다고 많이 들은 것 같은데, 그럼 재림이후 사단의 존재가 완전 사라진다면 불신자들의 영 또한 같이 사라지거나(소멸), 그 때에 다시 구원하시거나(?), 사단은 없지만 하나님이 주는 고통을 받게 되거나, 그 중 하나일 텐데..
5. 주께서 다니엘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 -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라는 것은 다니엘의 '육체'에게만 하신 말씀인가요? 아니면 영 또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쉰다는 의미인가요?
질문하게 된 동기는 사실 이렇습니다. 과연 지옥이 우리가 흔히 비유하는 불지옥으로 영원히 사단이 주는 고통을 받는 곳인지 잘 모르겠고, 그게 맞더라도 주께서 사단을 멸하신다면 그 때는 그 고통 받던 영혼들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다른 생각은 우리 영의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과 유리된,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죽으면 생명의 근원과 끊겨있기 때문에 영 또한 사망, 즉 그대로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어떤 생각도 저에게는 성경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제가 망령된 생각을 하거나 잘못된 생각으로 죄를 범할까 겁납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성경적인 지식을 얻고 싶습니다. 완전하게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진실'만을 알고 싶고, 만약 알 수 없는 내용이라면 그냥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그 날이 되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알 수 없을 테니까요.
[답변]
신학적으로도 가장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인 인간의 ‘중간상태’, 즉 죽음과 부활 사이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중간상태란 다른 말로 인간이 죽은 직후에 되는 모습인지라 모든 신자가 가장 궁금해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완전한 부활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되는 마지막 때에 대해선 기술(記述)이 비교적 많은 반면에 죽음 직후의 상태에 관해선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이 드뭅니다. 또 중간 상태와 마지막 때의 명확한 구분 없이 설명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질문자님이 걱정한대로 전체로 따져 들어가면 더 애매해질 수 있습니다.
신자는 가장 먼저 눈에 안 보이는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는 영원토록 완전한 모습으로 실존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물질적 가시적 영역뿐 아니라 영적 비가시적 영역을 망라하여 전 우주를 태초부터 영원까지 거룩하게 통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구체적인 의문들도 바로 이 확신 위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즉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믿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또 그 영생의 핵심이 죽음 이후라면 반드시 천국과 지옥은 이 땅과 별도로 따로 존재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비록 신자가 천국과 지옥의 모습과 그곳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구체적으로 몰라도 그런 곳이 분명히 있고 또 그곳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도 완벽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과 지옥 자체를 전혀 몰라도 된다거나 알 필요 없으니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서 섣부른 추측을 해서 오류에 빠지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천국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장 핵심적으로 가르치는 바는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의 두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입니다. 한 죄인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이미 그는 영생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 안에서 사는 것이며 죽음은 그 영생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하나님 왕국은 사단의 왕국과 함께 일정 시점까지 병존하고 있어서 완전한 영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이미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으나 아직 최종적인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후로 천국은 역동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고 신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서부터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이 여전히 있고 신자 또한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완전한 천국은 현재와 같은 모습의 이 땅에선 구조적,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 쪽에선 영원토록 완전하게 실현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 땅의 인간에게 천국은 이미 왔지만 아직 완전히는 오지 않았다는 그 자체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완벽한 통치입니다. 단지 인간 쪽에선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은 인간 개인에게나 인류라는 전체 공동체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신자 개인으로 봐선 죽음으로 물질적 육신은 소멸되고 그 이후에 가는 곳에 육신이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아무도 모릅니다. 또 성경은 마지막 날에 새롭게 변화된 이 땅으로 부활한 성도가 (신령한) 육신의 모습을 입고 다시 온다고 가르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도 아무도 모릅니다. 신자 개인에게도 ‘이미’와 ‘아직’의 두 가지 영생이 있는데 그 중간상태와 ‘아직’ 이후의 영생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 공동체적 측면, 즉 이 땅 전체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과 그 변화가 새로운 창조(사65:17)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분명히 있지만 그 창조의 과정과 그 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떨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땅에 대해서도 ‘이미’의 천국만 알뿐 ‘아직’의 천국과 그 중간상태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요컨대 성경은 이 네 가지 측면을 딱 부러지게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지금껏 신학적인 수많은 쟁론이 있어 왔지만 어느 누구도 딱 부러지게 이것이 맞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신자로 일부러 혼동하게 해서 천국에 대한 신비감만 더 고조시키려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었다면 죽음 이후부터 중간 상태와 나아가 완전한 부활까지는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는 모든 영역에서 항상 완전하기에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온전한 믿음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도 바로 그 진리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옥에 떨어진 부자 나사로가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다시 세상에 내보내어 자기 형제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려주어 생전에 회개토록 하여 죽고 난 후에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천국에 갔다가 온(잠시 죽었다 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천국에 오래 가 있다가 땅으로 되돌아 온) 나사로라면 얼마나 설명을 정확하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전에 성경에 계시된 천국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메시야에 대해 믿지 않으면 아무리 설명을 잘해주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비유대로 당신께서 죽었다가 살아나도 믿지 않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삼층천(천국을 의미하는 히브리 식 표현)까지 갔다 왔습니다. 바울이 거짓 실토를 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이는 가히 사람이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 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후12:2,4,6)
우선 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은 인간의 말로는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잘 설명해도 표현이 정확하게 안 될뿐더러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 즉 잘못된 기대를 할 수 있음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또 그가 죽은 후에 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채로 에스겔과 같이 순간적으로 시공간을 이동하여 천국을 갔다 왔습니다. 그러나 몸이 같이 갔는지 같이 가지 않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육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영만 갔다 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신령한 육신을 입었었는데 확실히 알지 못하고 본인마저 심지어 단지 그랬지 않나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직 죽기 전이라 인간 육신의 지정의로만 판단했기에 천국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의 설명으로 봐서는 천국에도 분명히 감각적으로 지각이 되는 어떤 시공간과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형체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천국이 이 지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또 지정의적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질료(Substance)로 구성되어, 어떤 구조(Structure)로 이루어진, 어떤 차원(Dimension)인지,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그런 요소들이 없던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에게는 완전한 부활이후 뿐 아니라 죽음 직후의 중간상태도 여전히 또 다른 미지의 ‘아직’의 천국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아직’ 천국에 대한 소망을 귀하게 가꾸되 그런 소망이 커질수록 오히려 이 땅에서 ‘이미’의 천국을 제대로 누리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을 준비는 하나님이 완벽하게 마련해 놓았으니 인간은 철저하게 제대로 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14:1-4) 꼭 재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이 영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국 보좌에 앉으셔서 구원과 심판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믿는다면 구태여 그 처소가 어떠할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런 천국 소망을 가진 자들이 아직도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들, ‘이미’의 천국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그 소망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 길은 두 가지뿐입니다. 천국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벧전3:15) 해야 합니다. 소망의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소망을 가진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분의 통치는 완전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 통치 아래로 초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마5:16)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다른 말로 천국)는 이 땅이든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영역이든 영원토록 완전합니다. 그 사실을 확신한다면 천국을 신학적으로 상세하게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알 필요까지 없고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범위 안에서 이 땅에서부터 ‘이미’의 천국을 누리고 죽음 이후의 ‘아직’의 천국을 소망만 하면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구체적인 답변을 드릴 수 없지만 질문하신 순서대로 간략하게 성경이 말하는 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삼 말하지만 성경이 중간상태와 완성된 이후의 천국에 관해서 또 개인과 공동체적인 천국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1. 예수님 재림 전, 성도가 죽으면 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요?
(예수님께서는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완전한 영적인 세계겠죠?)
서론에서 바울의 삼층천 체험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것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육신이 따라가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는 의미에선 영적인 세계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세계 안에서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나름대로의 질료와 형체들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인지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단순히 다른 차원의 세계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신학자 벌콥은 “죽음은 존재의 멸절(滅絶)이 아니라 육신적 생명의 종결이다. 존재의 중지가 아니라 생의 자연적 관계들의 분리이다. 생명과 죽음은 존재와 비존재로서 서로 반대되지 는 않으며 다만 존재의 상이한 양식(樣式)으로서만 반대된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어떤 것이며 죽음 이후의 그 개인과 가는 곳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이 땅과는 다른 존재 양식으로 그 양식이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천국 자체의 외형적 모습도 요한 사도가 묘사한 것을 넘어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계4:2-6)
그러나 요한이 실제로 천국을 갔다 온 것이라기보다는 환상으로 보았고 또 그로선 최선의 설명을 했겠지만 여전히 우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우선 그도 이 땅의 육신이 살아 있는 상태라 “~ 같다”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특정한 당신의 뜻을 계시하고자 인간 지정의의 이해 수준에 맞게끔 보여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1절) 보여주신다고 했습니다. 미래의 어떤 시점에 일어날 일이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말씀하지 않아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님) 그러나 마땅히 될 일이므로 반드시 일어나는 확실한 약속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외형적 차원에서 천국이 이 땅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를 따져봐야 확실하고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대신에 신자는 이 땅과 확실히 다른 것 하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죄가 없는 곳입니다. 신학적으로 구원을 칭의, 성화, 영화의 3단계로 나누는데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칭의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되는(free from the penalty of sin) 순간적 구원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생입니다. 성화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면서 죄의 능력에서 자유하게 되려고(free from the power of sin) 노력하는 진행 중인 구원입니다. 마지막 영화는 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옮기어져(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완성되는 구원입니다.
흔히들 천국이 눈물과 한숨과 슬픔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묘사되는 근본 이유도 단순히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 않는 유토피아 같은 곳이라는 뜻이 아니라 죄 자체가 없기에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신자가 가는 곳은 죄가 완전히 없으며 성삼위 하나님의 실체를 보고 알 수 있으며 그분과 완전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이 땅과는 다른 차원의 영역입니다.
2. 예수님 재림 전, 불신자가 죽으면 어딜 가게 되나요?
보통 말하는 불지옥이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혹은 사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어떤 공간, 이라는 것도 정말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혹은 그냥 '영적 사망 상태' 로 있게 되는 것, 즉 영이 '소멸'하게 되나요?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예수님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까지 '쉬는 상태' 즉 자는 상태가 되나요?
성경의 주제를 단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입니다. 구약은 왜 예수님이 꼭 수난의 종으로 인간의 모습을 띄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가를 밝힌 책이라면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과 그 결과를 밝혀놓은 책입니다. 신학적으로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의 인류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해석의 열쇠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 말은 성경 해석의 일관된 기준이 골고다 십자가를 지향할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신도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주제에 대해서 예수님이 과연 어떻게 해석했느냐를 먼저 따져보는 것이 성경 해석의 가장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지옥이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과제도 예수님이 어떻게 해석했느냐를 따져보면 쉽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지옥이라는 단어를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것도 아주 참혹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말입니다. 직간접으로 언급한 내용이 마태복음에만 무려 12군데 이상 나오며 평행복음서까지 따지면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마 5:22 / 5:29,30 / 7:19 / 7:23 / 8:12 / 10:28 / 13:49,50 / 18:6 / 22:13 / 23:15 / 25:30 / 25:41) 반면에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서에는 오직 야고보서 3:6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간단하게 몇 구절만 살펴봅시다. “형제를...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2) 그 앞 구절에 따르면 옛사람들(구약)은 살인은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도 무시무시하며 구체적인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5:29,30)고 했습니다. 눈이나 손 하나가 잘려나가는 것보다 지옥의 고통이 훨씬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휠체어 타며 핸디캡으로 사는 것도 아주 고통스러운데 그것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이 핸디캡이 되는 한이 있어도 지옥 가는 것만은 피해라는 것입니다. 비록 비유의 뜻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그만큼 지옥의 참혹하고 고통스런 실체에 대해 구체적 묘사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신자들 즉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8:12)고도 했습니다. 고통이 심한 곳에서 이를 갈고 있다면 불신자가 죽어서 단순히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지옥에서 멸하시는 자”(10:28)라고 했지만 불신자가 죽으면 당장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런 권능을 갖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불신자의 영혼이 지옥에 머물면서 언젠가는 완전히 멸하게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끝에 천사들이 와서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3:49,50)고 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말씀으로 인해 불신자의 영혼이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무덤에서 쉬고 있다가 부활 후에만 고통을 당한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불신자는 죽은 직후부터 바로 지옥으로 들어가 부활 때까지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 때를 별도로 강조하여 부활한 영과 육이 함께 불못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4번 질문의 답변 참조)
한 개인으로 봐선 육신의 죽음은 사실상의 세상 끝이 되고 악인은 당연히 바로 풀무 불에 들어가게 되지만 언제 부활을 거쳐 최후의 심판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류 공동체로 봐도 언제 세상 끝이 시작될지, 또 그 시작되는 시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고 사단을 결박하여 부활한 불신자와 함께 영원한 불 못에 던져 넣어 그 심판이 완성되는 시점 간에 간격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걸릴지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서론에서 '이미'와 '아직'의 천국을 그것도 개인과 공동체로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설명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고 길게 설명드렸던 것입니다.
성경이 왜 이렇게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는지 탓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자체가 벌써 한 개인에게 주는 말씀이자 인류 전체에게 주는 말씀이니까 그렇습니다. 또 학술 교과서나 과학 논문처럼 주제별로 정리해 놓은 책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구분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구분해 놓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벌써 영원토록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매뉴얼에 불과하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유지 보존 전승 번역된 책이라 읽는 자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읽으면 구원을 얻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이라면 성령의 감동과 인도가 필요 없습니다. 단순히 신자는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도 신자의 노력으로 얻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언급을 봅시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불신자의 영이 지옥으로 떨어져 영영한 불로 마귀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성경적 개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직접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그것도 아주 강조한 개념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예 신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불지옥에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는”(눅16:24) 모습들이 비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지배하는 지옥이라는 별도의 공간이 있으며 그곳에서 불신자의 영은 죽은 직후부터 고통을 당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신학자의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옥에 관해 하신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신약의 다른 서신서에 지옥이라는 직접 언급이 없다고 사도들이 그 실체를 부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 서신서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언급들만도 다음과 같습니다. (롬2:3-9 / 고후5:10 / 살전5:3 / 살후1:6-9)
3. 예수님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몸이 거룩하게 되어 다시 살아나고 그 안에 영이 다시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 후에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나요, 아니면 그 거룩한 '몸'이 다시 천국으로 들려올라가나요? 그리고 재림하신 이후의 삶과 재림하기 전에 죽은 성도들이 가는 천국의 삶이 같나요, 다른가요?
앞의 두 질문은 한 가지 주제만을 언급하신 것에 반해 이번 질문은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질문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에 대하여 따로 답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3.1. 부활 후에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서는가? 성도들이 다시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인 인간을 구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실현을 기록해놓은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신약은 오셔서 하신 일이라는 주제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의 천국은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그 천국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신천신지(新天新地)가 이 땅에 도래하는 것으로 종결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그분과 죄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는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여 창조의 구속사적 완성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본문에서 새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네오스’ 대신에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카이노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전 하늘과 땅의 변형이나 갱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고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또 이사야는 창조라는 단어를 창1:1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뜻의 ‘바라’를 사용했습니다. 신약에서 요한이 신천신지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한 계시의 확실성을 구약에서 이사야가 이미 보증한 셈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대할 때에 성경은 항상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이 땅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전히 문제는 그 외적 모습과 과정은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부활한 신자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진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표현대로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아마도 이미 먼저 죽어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그 신천신지로 옮겨져서 아니면 옮기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셈입니다. 반면에 땅에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성도들은 그 곳으로 옮기워지니까 우리 식 표현으로는 들리어 올려가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르고 내린다는 것은 공간 이동상의 방향만, 그것도 수직 방향으로만 따진 것에 불과합니다. 단순히 어법상의 표현 즉 말로 설명하려니까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그 도래가 새로운 창조라면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 땅의 영역 즉 지상에 천국이 내려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다른 말로 천국의 지상 도래나 성도의 들림이 어떤 방향 아니 어떤 모습이 되던 관심을 가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로선 이미 죽은 성도나 그날까지 남아서 이기는 자에게는 신천신지가 유업으로 주어진다는 것만 믿고 그 소망을 간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자꾸 공중 들림에 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아래 성경 구절의 해석이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게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3-18)
이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몇 가지 사전 지식이 필요합니다. 바울 당시의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자기들 당대에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걱정했습니다. 아직은 신약 성경이 완전히 정경화 되어 천국에 대한 신앙적 지식이 정립되기 전이라 일반 교인들로선 이미 죽은 사람들은 음부에서 자는 것으로만 이해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으리라 염려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을 기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 염려를 불식시키려는 것이지 공중 들림의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휴거(Rapture)를 설명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바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아무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그리스도 안에, 살아도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부활 때에 죽은 자가 살아 남은 자보다 차별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입니다. 나아가 살아남은 자가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지는 것보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에 따라도 주신 질문의 답변은 부활한 성도가 다시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오는(정확히는 옮기워지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가 공중 들림을 한다는 것도 재림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다시 천국에 가거나 공중에서 이 땅을 함께 통치한다는 식의 해석(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은 성경적 근거나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공중 들림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 곁에 있는 천사들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고 했습니다. 또 구약의 에녹, 엘리야의 승천 기록이 있고 또 신약에도 빌립이나 사도 바울의 공중 들림과 비슷한 체험도 있으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승천이 부활 시에 성도의 공중 들림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그러나 휴거의 구체적인 모습과 시기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따지면 지구는 둥근데 모든 인간이 다 그분의 공중 재림을 알고 또 성도들이 동시에 공중 들림을 하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일이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또 동양과 서양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없고 그렇다고 순차적으로 일어난다면 이미 전 세계에 TV로 중계될 텐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질 것 아닙니까?
성경을 싱상으로만 풀자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너무 문자적 자구에 묶여서 잘못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성도들도 너무 구체적인 모습에 관심과 호기심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영광중에 가시적, 인격적으로 하늘로 통해 강림하시되 성도들은 그에 버금가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그분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권위 있는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는 공중 들림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지상에 따로 구별되어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즉 신약시대에서 예수님의 재림까지가 바로 천년왕국으로 해석하는 분도 많습니다. 휴거도 대 환난과 연결하여 환난 전, 환난 중, 환난 후 휴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로도 나뉩니다. 구체적인 시기와 모습은 평생을 성경만 연구한 종말론 전문가들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3.2. 이미 죽은 성도들이 재림 전과 후의 삶이 같은가 다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예수님 재림 때에 구원이 궁극적으로 완성된다고 하니까 성도가 죽은 직후의 상태는 혹시라도 불완전한 구원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성도 개인으로선 완전한 구원은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 될 때에 그리스도의 면전에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고후5:8)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빌1:23) 특별히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온전한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에 이른다”(12:23)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성도가 죽을 때에 “거룩함으로 완전해진 의인의 영혼들은 최고의 하늘에로 받아들여지며 그 곳에서 그들은 빛과 영광 중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육신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죽음 이후의 성도는 완전한 구원을 이루었지만 단 하나 재림을 맞이하지 못한 것만 다릅니다.
그럼 재림 이후는 재림 전과 어떻게 달라집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가장 중요한 차이는 천국에 있던 영혼이 부활 후에는 육신의 구속마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부활에 관한 당위성과 그 의미 및 구체적 모습은 고린도전서 15:12-58까지 자세하게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기에 적합한 신령한 육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 육신의 구체적 모습이 어떠할지는 복음서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에선 “육신의 부활이 당신에게 어떤 위안을 주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들고 있습니다. “금생 이후에 내 영혼이 즉각적으로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취하여 올려질 뿐만 아니라 나의 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킨 바 되고 나의 영혼과 또 다시 연합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육신과 같이 될 것이다.”
재림 전과 재림 후의 죽은 성도의 삶은 죄가 아예 없는 곳에서 완전한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맞대면 하여서 그분과 교제하며 세세토록 찬양한다는 면에선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재림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기워지고 또 그곳에 적합한 신령한 육신을 덧입게 된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4. 예수님 재림하신 후 불신자들은 어디로 가게 되나요?
그냥 지옥에 가서 사단에게 괴롭힘을 받는다고 하기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사단을 완전히 멸하신다고 많이 들은 것 같은데, 그럼 재림이후 사단의 존재가 완전 사라진다면 불신자들의 영 또한 같이 사라지거나(소멸), 그 때에 다시 구원하시거나(?), 사단은 없지만 하나님이 주는 고통을 받게 되거나, 그 중 하나일 텐데..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믿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또 그 영생의 핵심이 죽음 이후라면 반드시 천국과 지옥은 이 땅과 별도로 따로 존재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서론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요컨대 예수를 믿는 신자와 믿지 않는 불신자와는 그 영원한 운명이 완전히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것은 죽음 직후에서 중간상태와 부활 이후까지의 모든 과정을 망라해서 그래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히9:27)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롬2:6-8) 하십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구하는 즉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와 세상의 썩을 것을 구하는 자를 구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죽음 이후에 불신자가 다시 회개할 기회는 전혀 없으므로 영원한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인간의 영혼이 가는 이 땅과는 다른 두 영역에서 상호 옮겨질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연옥이나 선조(先祖) 혹은 유아 림보(limbo) 같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사후 영혼의 중간정거장은 성경의 뒷받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서는 사후의 악인의 영혼들은 “지옥에로 내던져지며 거기서 그들은 큰 날에 심판 받기로 예비된 고통과 완전한 흑암에 머물러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육신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이 두 곳(천국과 지옥) 이외에 성경은 아무 곳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불신자의 영혼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가라는 2번 질문의 답변에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부활 때까지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은 모르지만 분명히 고통 가운데 지냅니다. 그 후 예수님의 재림 시에 육신의 부활을 입습니다. 구약에서 다니엘 선지자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12:2)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그 사실을 확증했습니다.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부활을 예언한 다니엘서가 말하는 바로 그 인자(메시야, 단7:13)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재림 때에 모든 신자와 불신자를 부활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부활은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 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1-15)
부활한 불신자는 불못에 던지워져 둘 째 사망을 당한다고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 공히 육신의 죽음이 있는 것과 또 신자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에 대비해서 불신자만 당하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뜻에서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신자는 두 번 태어나고(육신적 출생과 예수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남) 한 번만 죽지만(육신), 불신자는 한 번만 태어나고(육신) 두 번 죽는다(육신과 영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사망 후에는 하나님의 은총과는 완전히 결여된 채로 죄의 완전한 지배로 이뤄진 무궁한 혼란의 상태에서 육과 영혼의 극심한 고통을 당합니다.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질문자님이 생각한 대로 사단과 불신자의 영이 완전히 멸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한 불신자는 사단이 이미 던지워진 불못으로 함께 던지워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합니다. 흔히 사단이 완전히 멸해진다고 하는 말은 존재 자체가 완전히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불못에 영원토록 완전히 던지어졌기에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지상에서 신자를 훼방하던 사단과 죄와 사망이 이젠 더 이상 신자에게 아무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영원한 운명이 정반대가 된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품 안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반면에 불신자는 사단과 함께 불못에서 영원한 고통만 당하는 것입니다.
5. 주께서 다니엘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 -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라는 것은 다니엘의 '육체'에게만 하신 말씀인가요? 아니면 영 또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쉰다는 의미인가요?
이 질문의 답은 상기의 설명에 근거하여 이젠 질문자님도 충분히 추론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고난 가운데도 선지자로 충성을 다한 다니엘에게 주신 마지막 위로이자 약속의 말씀입니다. 신자는 죽으면 육체는 이 땅에서 썩고 영혼은 바로 천국으로 가서 완전한 구원을 누립니다. 그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신령한 새 육신을 덧입는 부활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하며 지냅니다. 그런 뜻으로 평안히 쉰다고 한 것이지 단순히 육신과 영혼이 무덤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누워 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무덤 속에 썩지 않고 남아 있는 뼈에 다시 생기가 들어붙어서 금생에 살던 동일한 육신의 형태로 이 땅에서 부활 될 것이라 믿거나 기대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 때 신자는 불교신자와 달리 죽어서 화장하면 안 된다는 말들이 돌았지만 완전히 잘못된 낭설입니다.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길게 설명했지만 사실 구체적인 어떤 모습이 잡히지 않아 실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사후에 가는 신자의 천국, 불신자의 지옥, 또 재림 이후의 신자의 신천신지 불신자의 불못의 구체적인 모습과 신자 불신자가 바뀔 양태 등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시기와 장소 또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토록 거룩하시고 완전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재림과 신천신지의 도래와 마지막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는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인내하고 되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회개치 않고 죽은 후에는 그 즉시로 그분의 은총에서 완전히 차단되어 영원한 고통만 있는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서론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신자는 진정으로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죽음 이후는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며 살고 또 자기 주위에서부터 그 천국을 확장하는 일에 전념하면 됩니다. 나아가 불신자가 겪을 지옥과 최후의 심판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울 것이 확실하기에 예수를 모르는 미혹된 영혼들을 정말로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한마디로 죽음에 대한 이해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불신자는 죽음 이후가 불안하거나 없다고 믿기에 이 땅에서도 허공을 치며 향방 없는 달음박질만 하며 초조하게 삽니다. 신자는 죽음 이후는 오히려 가장 큰 소망이 되기에 이 땅에선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으며 항상 기뻐하며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이 신자 모두와 특별히 질문자님의 살아 있는 개인적인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1-4,8,9)
11/17/2006
[상기 답변에 대한 어떤 전도사님의 추가 질문]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불신자의 영이 지옥으로 떨어져 영영한 불로 마귀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성경적 개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직접 나온 것입니다.
상기 글에서 지옥으로 간 불신자들이 "마귀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위 말씀을 근거로 풀어 설명했는데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불 못은 마귀도 불신자들과 같이(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로) 영원히 고통당하며 괴로워하는 장소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요?(계 20:10) 지옥 역시 마귀가 지배하는 곳이 아닌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관리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시 139:8) 만약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한 마귀에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비록 불신자이나)을 고문하고, 고통을 주는 즐거움(?)을 주셨다고 이해하기에는 하나님의 속성(공의)에 손상을 주는 듯합니다(지옥을 체험했다는 간증자들이 비슷한 내용을 애기합니다만 역시 의문이 들고요). 마태복음 25:41절을 근거로 마귀(형벌의 대상이)에게 불신자(형벌의 대상에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셨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 같아서 문의 드립니다. 혹시 다른 성경 구절이 있는지도 여쭤봅니다.
[답변]
너무나 예리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다시 제 글을 보니 신학적 지식을 갖고 성경을 자세히 읽는 분들에겐 그런 오해의 소지가 생기게끔 표현되어 있네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불 못(지옥)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에 예비 된 곳”이라고만 했지 마귀가 불신자들의 영혼을 괴롭히게 될 것이라는 직접적인 뜻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 구절 외에 그렇게 해석될 만큼 명료하게 밝혀 놓은 성경구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당시 신속히 답변 드리느라 자세하게 설명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의 불찰임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대신에 상기에 인용한 부분을 아래와 같은 원론적 의미로 정정하겠습니다.
*****************
마귀와 그 졸개들에게 이 땅에서의 공중권세 잡도록 즉, 불신자들의 영혼을 미혹하게끔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땅을 주관 통치하시는 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시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든 이들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마귀의 지배 아래 있게 허락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선택에 따라 세상에서 불려나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십자가 구원 은혜 안에 들어오게 한 자가 신자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 안에 살지만 하나님께 속한 신분으로 세상 앞에 제사장 나라의 소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영생을 이미 소유했기에 천국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천국에서 특별추가보너스를 받는다기보다 주님과 함께 교제 동행하는 삶이 영원히 지속 유지 보장되는 곳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로 살다가 죽은 후 주님의 나라에 완전히 입성해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거하는 것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아예 버린 자가 아니라 자발적 의지적 주도적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한 자입니다. 이 땅의 일생동안 마귀의 지배 아래 놓여 죄의 노예로 삶을 마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인간 윤리로 의인이라 칭송 받아도 인간 윤리 자체가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며 무엇보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죽어서도 그분의 나라에 입성할 자격과 조건이 전무합니다. 하나님 그분과 단 하나의 연결고리도 없기에 그분의 사랑과 은총은 전혀 누리지 못하고 영원히 지내야 할 곳으로 보내집니다. 바로 성경이 불 못으로 묘사하는 지옥입니다. 말하자면 죽은 직후부터도 영원히 마귀의 통제 아래에 혹은 마귀가 속한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마귀에게서 직접적인 괴로움을 당하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고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 즉, 사탄과 함께 공존하는 추하고 고통스러운 곳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마귀와 공존하면서 그런 고난을 겪는다면, 이 땅에서 공중권세 잡은 마귀로 인해 미혹되어 영적으로 죽은 삶을 살게 되었듯이, 불신자들의 죽은 후 지옥에서의 고난에 대한 궁극적 책임도 마귀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마귀에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비록 불신자이나)을 고문하고, 고통을 주는 즐거움(?)을 주셨다고 이해하기에는 하나님의 속성(공의)에 손상을 주는 듯합니다.”라는 질문자의 진술에는 집고 넘어가야 할 측면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지옥은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엄청난 고통을 겪는 곳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그래야만 하며 만약 어떤 종류의 고난도 없다면, 하나님과 단절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지 모르지만, 그곳은 이미 지옥이 아닙니다. 심판의 의미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은 인간을 아무리 불신자라고 해도 지옥의 고통을 주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속성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 성경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상기 원 답변에서 지옥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일부 신학자들의 지옥은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많은 이들이 호응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직접 위배되는 스스로 고안한 이론 아니 가설일 뿐입니다.
“지옥에서 마귀더러 불신자들에게 괴로움을 주며 갖고 노는 즐거움을 공의의 하나님이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뜻 그럴 듯 해보이나 이 또한 인간적 정의에 치우친 신학적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지옥에서 심판 받은 자가 겪는 괴로움은 일차 본인의 책임이지만 궁극적 원흉은 마귀에게 있습니다. 원죄가 일차적 직접적으로 아담의 책임이지만 궁극적 원흉은 마귀이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물론 마귀더러 갖고 놀라는 식의 명령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질문자께서 하신 말씀대로 지옥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구역임은 옳습니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추론해 나가다보면 지옥 고통의 궁극적 책임이 하나님에게 귀착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공의를 바로 잡으려다가 오히려 더 욕되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지옥은 분명히 실존하며,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심판의 고통도 있고, 그 궁극적 책임은 마귀에게 있다는 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뜻입니다.
1/16/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