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부모가 자식에게 끼칠 영향력은?

조회 수 1457 추천 수 81 2009.10.05 20: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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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부모가 자식에게 끼칠 영향력은?


[질문]


자녀에 대한 부모님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나라에 따라 성인으로 인정해 주는 나이가 다르고, 또 개인에 따라 부모로부터 이성적 감성적으로 독립하는 연령도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 인성 형성에 미치는 부모의 역할이 어느 때까지 중요한지 알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20살 되면 법적으로 성인으로 인정해주는데 겪어 보니까 그 때에도, 지금도 그렇지만, 애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악영향을 받아 장성한 뒤 사회에 악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다면, 예를 들어 싸이코 패스 같은 경우에 성경적 시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요?

공교육이 사회적 능력을 쌓게 하기에 중요하긴 하지만 한 영혼을 키우는 가정에서의 엄마, 아빠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생각입니다. 중, 고등학생일 때에 친구들끼리 미래에 대해 수다를 떨면서 현모양처 되는 게 꿈이라고 했었거든요. 좋은 엄마가 된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진짜 어렵고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이 많이 추상적인 것 같지만 오랫동안 궁금했던 문제입니다.  

[답변]

아닌 게 아니라 질문이 상당히 추상적입니다. 따라서 답변도 원론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궁금하신 내용의 요체는 신자 부모로서 자식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것인지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부모라는 위치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떤 것인 지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주 독특한 부모의 위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 중에 다섯째 계명입니다. 문자적 내용만으로는 단순히 효도하면 장수의 복을 받는다는 상식적인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라는 언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효도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신자니까 일반인보다 더욱 큰 효도를 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상급으로 장수의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의미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네게 준 땅에서 장수한다고 했으므로 역으로 말하면 아무리 효도를 잘해도 하나님이 네게 준 땅에서 벗어나면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게 준 ‘땅’이 가나안이라는 지리적 경계만 뜻하지 않습니다. 또 그 땅에 속해 있다는 의미도 기독교라는 종교 활동을 성실히 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땅이란 신자라는 존재, 삶, 인간관계, 거주 여건, 하는 일 등 인생사 모두를 망라합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효도하여 길어지는 생명도 그분이 부여하시는 참 생명 즉, 영적 생명도 포함하지 육신적 수명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모를 공경하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니까 효도를 더 잘해야 한다거나, 부모가 자신을 낳아주고 양육해 준 은혜를 갚는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뜻입니다. 부모도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부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과의 관계(1-4계명)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5-10계명)에 대한 두 가지 내용으로 대별됩니다. 그 구성에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즉 수직적 관계가 먼저 올바르게 세워져야 그 바탕 위에서 인간끼리의 수평적 관계도 바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도 한 죄인이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목 된 이후라야 그 인생에 참 생명이 생기고 또 풍성해지지(요10:10) 않습니까?  

부모 공경은 인간관계의 첫 계명입니다. 하나님 외에 가장 중요하게 섬길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또 주지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 경외와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계명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다른 모든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식에게는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두 돌 판을 받을 때도 틀림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첫째 판에 함께 쓰여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모는 자식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자적 존재가 되는 셈입니다.

우선 부모는 자식에게 육신적 생명을 이어주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한 자입니다. 부모를 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권능과 은혜를 부모를 통해 자식에게 전해지길 원하십니다. 현실의 삶에선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님 대신의 역할을 실제로 맡는 셈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일생을, 특별히 그 영혼을 하나님 안에서 올바르게 세우는 일의 관건을 쥐고 있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평생을 두고 가장 먼저, 또 가장 중점적으로 해야 할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자녀 또한 그런 부모를 자기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자기에게 전해지는 통로임을 깨달아서 그에 상응한 존경과 사랑을 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네게 준 부모님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끼칠 영향력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하나님이 자식에게 당신을 보이고 가르쳐서 당신의 권능과 은총을 전해줄 통로로 삼았다면 신자 부모가 자녀에게 끼칠 영향력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구약율법 중의 율법으로 여기는 ‘쉐마’(본문이 시작되는 “들으라”는 히브리어임)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를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심지어 본문을 문자적 의미대로도 준행했습니다. 실제로 쉐마를 종이에 써서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했습니다. 자나 깨나 가르치고 외우고 실행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주신 선악과 언약에서부터 시작하여 노아의 무지개 언약을 거쳐 아브라함으로 열방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는 언약이 유대인들에게 대대로 전수되어졌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스라엘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당신 소유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을 재다짐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언약 백성이 됨에 실패했습니다. 선민 백성이 되었다는 교만에 넘쳐 형식적 율법주의로 흐르고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열방을 참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함에도 오히려 이방 족속의 우상숭배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또 다른 중요 원인으로는 자녀 교육의 실패도 들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자녀 교육을 가장 잘하는 민족이 유대인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세계 어디에 흩어져 있든 그들의 종교, 민족, 도덕, 인성, 직업 교육은 가장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유대교 랍비문서로 그들의 규율. 도덕, 지혜의 총서인 탈무드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지 않습니까? 유대교와 관련 없는 자들도 종종 참고하며 예수님도 인용할 정도로 뛰어난 교육 자료입니다. 지능도 가장 높은 민족인데다 자기들 전통을 잘 보존하며, 특히 재물을 모으는 데는 귀재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유랑민으로 흩어져 사는 바람에 생존전략의 일환으로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육체노동으로 돈 벌 수 있는 기술도 하나씩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을 유대교 종교인으로는 잘 양육했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게 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쉐마를 문자적으로만 이해, 적용한 것입니다. 십계명도 잘 지키되 문자적으로만 지켰고 전체 구조와 깊은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바로 세우기보다는 안식일 준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예에서 보듯이 계명 하나씩 문자적으로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시킨 바탕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그분과 친밀한 영적 교제를 하게 하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모든 분야에선 그들 교육은 나무랄 데 없을 정도입니다. 비록 수전노 같은 이미지를 주었지만 전 세계로 흩어져 핍박 받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분만 빼면 오늘도 가장 재능 있고 올바르며 경건한 민족으로 손꼽히지 않습니까?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다른 모든 교육을, 심지어 종교교육을 포함해서,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올바르게 바로 세우지 않으면 절대 그 인생이 성공할 수 없다는 뜻 아닙니까? 믿는 자의 일생이 오직 그분의 인도 아래 있다면 가장 먼저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내용 주제별 지난 글의 #5 “기 안 죽이고 아이를 키우려면”을 참조 바람)

쉐마의 뜻도 사실은 그것입니다.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정성과 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자의 마음과 힘과 성품 자체도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일치하도록 자신의 마음과 힘(자신의 능력)과 성품을 올바르게 조율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행위나 제물을 그분께 바치고 형식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얼마든지 별개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려면?

그럼 자녀더러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도록 부모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도덕적으로 선하고 의로워지도록 해야 합니까? 주일 학교에 성실히 참여토록 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맡기면 되는 것입니까?

신자가 교제해야 할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계시며 인간만사를 거룩하게 주관하시는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자, 타락한 죄인을 십자가에서 구원한 구세주이자, 신자의 구원에서부터 구원 이후의 모든 삶을 간섭하시는 인도자로서의 하나님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에 절대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그분에게 도덕적으로만 접근하면 자칫 죄를 지으면 벌 받을까 염려하는 두려움의 하나님이 되며, 종교적 열성을 최고로 바치면 그분으로부터 돌아오는 보상을 기대하는 기복적인 신앙이 되며, 초자연적인 은사만 강조하면 신자가 기적을 바라며 스스로 신령해지려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성령의 외적 은사를 받아 치유 같은 능력을 나타내거나, 뜨겁게 찬양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거나, 방언으로 청산유수처럼 기도하거나, 성경말씀을 구구절절 외워서 입에 달고 다니거나, 교회 생활과 전도를 아주 성실하게 수행하거나, 세속적인 쾌락과 죄와는 완전 담을 쌓고 경건하게 사는 것 등이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충만히 유지하면 그런 현상들이 자연히 나타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적교제가 잘 이뤄지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영이시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신자의 영과 교제를 나눕니다.  그 교제의 근본목적은 한 불쌍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바꾸어서 아름답게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또 주위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정을 알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여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게 만듭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성도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로만 구원, 간섭, 보호, 변화,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항상 자신의 죄부터 씻어야 하며,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며, 그 결과 주님 안에서 성숙해진 모습으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십자가 복음을 직간접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란 예수 믿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럼 영적 교제를 깊이 하면 할수록 예수를 믿기 전과 비교해서 확연하고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이 땅이 전부라고 여겼기에 풍요롭게 먹고 마시는 자신의 안일만 도모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는 그 전부가 완전히 뒤엎어져야 합니다. 세상과 자신의 절대적 주인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를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하시어 참 생명을 주셨고, 성령님이 매사에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이끄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아니 실제 체험으로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요컨대 영적 교제란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언제 어디서나 받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오직 그분의 일에 쓰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온전히 설명한 후에 성도들에게 처음으로 권한 말씀이 바로 영적 교제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신자더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너무 어렵게 해석할 필요 없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교제란 세상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근거와 의미와 목적과 방향과 가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확인하고 또 그 진리에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적 실체가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해 당신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겸비하게 엎드린 죄인을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을 올려주십니다. 또 당신의 열심과 권능으로 당신을 닮게 당신께서 변화 성숙시키며 흑암의 세력 앞에서 당신의 빛을 드러내는 일에 각자 나름대로 쓰임 받도록 이끄십니다. 나아가 천국보좌에서 당신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너무나 엄청나고도 영원한 영광으로 덧입혀서 구원을 완성시켜 주십니다.

이런 십자가 진리를 확신하며 실제로 체험 하고 있다면 어떻게 세상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염려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가신 골고다 언덕을 순종함으로 나아가 기쁨과 평강과 자유를 가득 안고 따라 올라갈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다 걸어가는 넓고 쉬운 길보다 좁고 협착한 길을 머리 둘 곳이 없어도 쉼 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신자의 영원한 처소는 하늘에 이미 마련되어 있으며 이 땅은 단지 나그네로 우거하는 곳임을 아니까 말입니다.  

너무나 잘못된 기독교의 자녀 교육

신자가 자녀에게 끼칠 영향력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서 그분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 다시 오해는 마십시오, 도덕적, 종교적, 초자연적인 형식이 나타나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알기 쉽게 말해 세계관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인생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환난 중에도 오히려 소망을 더 키우며 기뻐하고 같은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주님의 위로로 채워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들의 자녀 교육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성경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자기 인생과 주위를 해석 적용하는 통찰력을 심어주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 전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지금 논의 중인 신앙교육은 자녀가 믿은 후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수 있는, 단지 겉모습 만으로가 아닌, 성경적 근거를 확실히 깨우쳐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작금 신자의 자녀 교육은 그 방향을 너무나 잘못 잡고 있습니다. 교회에만 매여 있는 종교인, 선한 양심대로 살아가는 도덕군자로 만드는 것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부작용과 폐해가 비교적 적고 또 복음으로 들어갈 준비가 그런대도 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 열심히 하고 기도 뜨겁게 하면 일류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고, 현실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식은 전혀 아닙니다. 자녀를 성공시킨 간증은 넘쳐 나고, 복음 안에서 좁고 협착한 길을 가되 세상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했다는 간증은 눈을 닦고도 찾을 수 없습니다.

주일학교에서부터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의 전기를 읽고 Role Model로 삼아 그들의 인생  철학과 성공수칙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라는 가르침은 실종되었습니다. 대신에 돈과 권력과 명예가 신앙으로 달성할 목표가 되었습니다. 교회 나오는 목적이 하나님은커녕 신앙 자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든, 신앙이든 자기가 세상에서 세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이요, 심부름꾼으로 전락했습니다.

쉽게 말해 “공부 열심히 하고 돈 벌어서 남 주나?”라는 불신자의 철학이 신자에게도 금과옥조로서 힘을 발휘합니다. “남 주기 위해서 공부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정도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영역이 오히려 존재와 삶과 인생의  절대적 실체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로 고3이면 교회 나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이미 신자들 사이에도 불문율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엘리 제사장, 기드온, 솔로몬, 등등 자녀 교육에 실패한 자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물론 신자 부모도 자녀에게 학습, 교양, 건강, 감성, 인성, 도덕, 종교 등에 관해, 심지어 돈 관리마저 더욱 철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세상을 등진 구도자처럼 살게 하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세로대가 먼저이고, 십계명에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 먼저이듯이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부터 먼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 스스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 살기는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이기에 세상 모든 사람이 따르는 것과는 다른 생활 방식을 가르치고 실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바로 부모부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부모도 연약한 죄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부모도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이긴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인격이 훌륭하고 주위에 선을 많이 실행해도 그 내면에 죄의 본성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부모가 인성, 도덕, 종교적 측면에서 자녀에게 항상 완벽한 교사 역할을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바뀐 세계관에 따라 사는 방식이 다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성공하지는 못할지라도 인생의 궁극적 목적과 살아가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것만은 확실히 알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겸비해진 모습과 함께 말입니다. 부모에게 죄의 본성이 살아 있어도, 아니 그럴수록 더욱 겸비해져, 자신의 가난한 심령을 애통해 하는 모습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지 않습니까?

신자 부모는 진짜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잘 믿으면 형통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자신을 끊어낼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음을 확신하기에 비록 겉모습은 후패해져 가도, 아니 그럴수록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강건해져야 합니다.    

이런 영향력을 끼치는 데는 정년(停年)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백발이 늘어날수록 자신은 더 겸비해지고 믿음은 정금같이 더 빛나는 모습을, 죽을 때까지 자식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최소한 자식이 부모에게서 가장 먼저 또 많이 영향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고백할 때까지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문제에서만은 지성적으로 천재나 둔재라든지,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이든, 인간 사회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외적 조건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자식이 부모에게서 그런 영적 유산을 물려받으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말입니다. 혹시라도 부모에게 참 신앙 대신에 세속적인 신앙 자세가 보이면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권능이 작용하여서 자식이 거꾸로 십자가 안에 죽는 본을 부모에게 보여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 교육이 가장 중요하고 제일 먼저 해야 한다고 해서 그것만 하고 나머지는 조금 등한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적 측면의 교육도 철저히 시켜야 하되 세계관 교육이 다른 모든 교육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세계관을 단순히 별개의 철학이나 사상으로 가르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육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인생을 보는 근본적 관점, 방향, 의미, 목표가 세워진 바탕 위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신자의 재정 교육은 남을 위해 살겠다는 인생목표가 이미 세워진 바탕에서 돈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부모부터 그렇게 살면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1-4)

바울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복음 안에서 설명한 말씀입니다. 첫 부분은 구약의 쉐마와 동일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독특한 위치와 신분에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또 자녀들의 그런 존경과 사랑을 받으려면 부모도 당연히 지금껏 설명 드린 대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영적 권위를 복음 안에서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놀라운 계명이지 않습니까? 고대에선 아이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이 더욱 사랑하며 천국에 더 가까운 자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대우했습니다. 말하자면 복음 밖에선 자녀만 부모를 노엽게 하지만, 복음 안에선 부모도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바꿔 말해 아이들의 감성 교육도 세상과 인간을 보는 부모의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 복음 안에서만 올바르고도 아름답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단순히 아이들의 기만 안 죽이려는 데 신경을 쏟지 않습니까? 아이도 창조주 하나님이 완전하게 만드신 하나의  걸작이지만, 원죄로 타락한 연약한 존재이긴 마찬가지인지라 감성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그들의 죄를 씻어 하나님과 화목 시켜 주어야 하고, 성령의 씻으심과 자라게 하심의 권능과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토록 해야 합니다. 요컨대 단순히 아이들의 감성까지 존중해 주라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의 원리 즉, 바뀐 세계관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될 청년들의 염려

염려하신 대로 부모에게 잘못 영향 받으면 싸이코 패스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나쁜 부모를 반면교사로 삼아 오히려 훌륭한 위인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와 의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며 하나님의 상벌도 그렇게 따른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가 시리다고 자식이 같이 시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부모 자식의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의 동등한 피조물로서 다 같이 죄인입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흔적이 도덕적 양심의 형태로 남아 있기에 부모가 전혀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해도 혼자 판단하여 성숙해질 기본 소지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모만큼 자식에게 평생을 두고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는 없습니다. 악한 부모가 아니었다면 평범하게 자랐을 역설적인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 사회의 질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계명에 둘만큼 부모의 위치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으로서 부모의 그 중요한 역할을 감안하면 두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부모도 하나님 안에선 연약한 죄인입니다. 또 실수나 나쁜 일을 해도 인간 본연의 도덕심과 효성 때문에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로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나아가 자식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예정에 들어 있다면 그분이 자라게 해주실 것입니다.  

자꾸 내가 부모가 되면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염려 되는 까닭은  부모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점은 인식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선 그럴 수 없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자녀더러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바로 세우도록 가르치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또 그렇게 하려면 부모부터 주님을 제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바꿔 말해 자신이 주님 앞에 바로 서있을 자신만 있다면 자녀 교육도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자녀에게 꼭 가르쳐야 할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자녀에게 일어날 나머지 일은 주님이 다 책임져 주십니다. 그 전에 십자가 안에서 바뀐 세계관은 다른 일에서도 영적 통찰력, 성경이 말하는 지혜가 생기게 해주십니다. 자녀들로 더더욱 창조, 타락, 구원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가지도록 해야하는 까닭입니다.  

흔히들 부부 관계도 하루 세 번씩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 역할을 분담하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라 등등, 기능적 내용 위주로 가르칩니다. 물론 그런 교육도 필요하고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부부가 무엇보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그 세계관부터 완전히 바뀌어 있다면 나머지 세부적인 문제는 서로 간에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7)

남편과 아내 간의 사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베드로 사도가 설명한 내용을 보십시오. 단순히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와 근거가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완전히 뒤바뀐 사고의 방향에 따라 삶의 방식도 그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아내는 남편으로 구원을 얻게 해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값진 일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신자 아내의 단장은 그 아름다운 심령으로 해야 하되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바로 단장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볼 때도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이기에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함께 천국까지 동행할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너희(부부가 함께 하는)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부부가 동일한 세계관을 갖고 기도해야 그 가정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앞으로 어떤 엄마 혹은 아빠가 될 것인지 여부도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부터 십자가 복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기에 모든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고 또 모든 일을 오직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면 됩니다. 사람을 대할 때나, 일을 처리할 때나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기본 목표대로만 살면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주님 나라를 확장하는 통로라는 기본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을 성공과 출세를 목적으로 교육시킬 것이 아니라 자녀 스스로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도록 하면 됩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직책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고백하는 내용이 부모라는 직책에도 똑 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자녀에게 끼칠 영향력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3-10)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고전4:16) 당당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위와 같은 자세로 사도의 직책을 감당했는데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끼칠 영향력도 예수님을 따라가며 삶을 사는 자세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얼마든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자녀 또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사람은 부모라고 주저 않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직업, 재정, 권력, 명예를 닮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성, 인격, 교양, 윤리, 종교 등을 닮기는 하되 그 이전에 바로 예수를 따르는 방향을 닮게 만들어야 합니다.
  
추상적 질문에 더 추상적으로 답변 드린 것 같아 죄송하지만 그 핵심을 찬찬히 잘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역할, 자녀 교육의 방향 등에서 근본적으로 지금과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역할을 세부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즉, 방법론적으로 접근해 가르쳐선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선 훌륭한 내용의 책이 넘쳐나니까 참조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진정한 영적 권위에 대한 가르침은 드문 것 같습니다. 그 권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신자 부모로서 자식에게 과연 무엇을 진정으로 물려주고 싶은지 곰곰 따져 보십시오. 외모, 건강, 재산, 가문, 학벌, 권력, 명예는 아닐 것 아닙니까? 만에 하나 그것이라면 세상에는 좋은 지침서들이 범람합니다. 또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믿음의 열성과 힘으로 그것들을 쟁취할(?) 수 있게 하는 기독교식(?) 지침서도 많습니다.    

정말 십자가 복음 안에 제대로 들어온 부모라면 자식에게 훌륭한 품성과 경건한 신앙을 물려주고 싶다는 동일한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그럼 그것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대개의 신자 부모들은 엄격한 도덕교육과 성실한 교회 생활로만 몰아갑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부터 솔직히 돌아보십시오. 부모부터 아직 죄의 본성이 생생히 살아 있고 믿음 또한 제대로 견고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자꾸 자식에게 그런 방식으로만 강요하십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가난한 심령을 꺼내놓고 엎드려서 주님의 거룩하고도 온전한 통치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기는 것뿐입니다. 이것 말고는 우리가 실제로 잘 할 수 있는 일도 없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성장해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와 똑 같이 연약한 모습에 머물 뿐입니다. 그들에게도 주님만 붙드는 것만이 자기 인생을 가장 풍성하고 윤택하게 하는 길일진대 이것부터 확실하게 영향력을 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꾸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모습을 보이라고 해서 자식들 앞에서 연약하고 손해 보는 삶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낮아지고 약해지는 곳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더욱 빛이 난다는 사실을 자식들로 확연히 목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인생을 가장 풍성하고도 아름답고도 진정으로 승리하는 길임을 분명히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10/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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