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얼마나 거주했는가?

조회 수 6726 추천 수 193 2005.11.10 13: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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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김계환 형제님께 감사드리며, 목사님께 새로운 질문"

야곱의 하란 체류 40년설
☞ 본문 : 창31: 38 및 41(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 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 하였으며.....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 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으니)

▣ 들어가기
   ◉ 일전, 창38:1절에 나오는 “그 후에”라는 단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목사님께 질문을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직접적인 답변을 듣지는 못했으나 다른 형제님께서 처음 접하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를 제시해 주신 바가 있습니다.
   ◉ 그 자료의 요지는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야곱의 하란 체류기간 20년은 잘못된 것으로서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40년간 체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말 처음 접하는 주장이라 큰 기대를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신학지식이 부족한 평신도의 한계로 말미암아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는 없지만, 그 주장도 나름대로의 논리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제시된 자료의 상세한 내용은 원문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따라서 오늘은 제시된 자료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20년설과 40년설의 핵심 차이점
   ◉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창25장부터 창47장까지 폭 넓게 봐야 합니다.
   ◉ 20년설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으로서, 본문(창31:38 및 41)에 나오는 “이십 년”이라는 단어가 동일한 기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에 거한 기간은 총 20년이라는 것이지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잘 아는 내용입니다.
   ◉ 40년설은, 본문에 나오는 “이십 년”이 동일한 기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다른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하란에 거한 기간은 총 40년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 40년설의 추정과 저의 추정 비교 검토
   ◉ 지난번 나누었던 ‘야곱과 요셉의 나이 차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40년설이 추정하는 내용과 제가 추정한 내용(20년설 기준)은 논리상 일치되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 세부적으로는 제법 차이가 납니다. 상세 내용은 생략하고 주요 차이만 요약하겠습니다.
(앞의 수치는 40년설에 의한 야곱의 추정 나이이고 뒤의 것은 제가 추정한 나이입니다).
     ○ 하란 이주   :  60세 / 76세
     ○ 결혼        :  67세 / 83세(7일 간격으로 레아 및 라헬과 결혼)
     ○ 루으벤 출생 :  68세 / 84세(나머지 아들들 출생년도는 생략)
     ○ 일차 봉사   :  74세 / 미언급(7년씩 2회)
     ○ 20년 봉사   :  94세 / 미언급
     ○ 요셉 출생   :  91세 / 91세(40년설 : 새로운 20년의 제17년차에 출생)
     ○ 양 떼 봉사  : 100세 / 96세(40년설 : 34년 이후부터 6년간 봉사했다는 의미)
     ○ 가나안 귀환 : 100세 / 96세
     ✳ 양 견해는 모두 허용오차를 1-2년 정도로 간주하여 추정한 결과들입니다.
   ◉ 20년이라는 격차(추가하든지 제외하든지) 외에는 특별한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40년설은 20년설이 지니는 오류(?)로써 ‘84세에 맏아들을 낳은 사례가 성경에는 없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비록 맏아들이 아니더라도 야곱의 선후대 중에서 100세를 훨씬 넘은 나이에 자식을 낳은 사례는 많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147세(저의 추정입니다) 이후에 서자 6명을 낳은 것 같고, 데라도 130세(역시 제 추정입니다) 이후에 아브라함과 나홀을 낳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84세에 맏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 20년설의 난점(?)
   ◉ 정설로 인정되는 20년설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입니다만 이 이론에도 미비점은 있습니다. 저의 의문인 창38:1의 ‘그 후에’와 별도 묵상인 ‘야곱과 요셉의 나이’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20년설로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설명 곤란한 중요한 부분은 2가지입니다.
   ◉ 먼저, 20년설을 기준할 경우, 루으벤(맏아들)으로부터 요셉(열한번째 아들)까지 낳는 데 소요된 총 기간은 약 7-8년 정도로 계산됩니다. 4명의 부인들(레아, 라헬, 실바, 빌하)이 낳았으므로 가능은 하지만, 레아의 경우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레아는 처음 4명을 연년생으로 출산했고 일단 단산했다가 다시 3명(아들 둘 및 딸 하나)을 추가로 출산했습니다. 총 7명을 연년생으로 이어서 낳았다고 해도 빡빡한 기간인데, 중간에(어느 정도의 기간인지는 몰라도) 쉬었다가 낳았다면, 7-8년은 무척 부족한 기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묵상할 때 레아는 중간에 약 1년 내지 1년 반 정도 단산했다가 7명을 연년생으로 낳았다고 가정하고 논리를 전개시켰던 것입니다. 매우 궁색한 설명인 듯 합니다만 달리 말씀드릴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
   ◉ 다음으로, 창38:1의 ‘그 후에’ 질문에 나와 있듯이, 유다의 자손들의 애굽 이주시의 문제점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야곱이 70명(또는 75명)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주할 때, 그 숫자에 포함된 유다의 직계는 총 6명입니다. 유다 자신과 아들 3명(셀라와 베레스와 세라) 및 손자 2명(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과 하물)이 그들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팔려갔다가 재회한 기간은 22년이라는 것이 정설임에 비추어, 이 기간 동안 유다에게 있어서, [자신의 결혼→득남→아들들의 성장 및 결혼→아들 2명 사망→며느리 다말과의 관계로 인한 아들 2명 출생→늦게 낳은 베레스의 성장 및 결혼→손자 2명 출생→애굽 이주] 등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겠습니다. 특히 유다의 3남(죽은 2명 포함시) 셀라와 4남 베레스의 나이 ?! 汰甄? 무척 크다는 것(저는 약 2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봅니다)을 고려한다면, 창46:12이 성립되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 됩니다. 무언가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께 질문을 드렸던 것이지요.

▣ 40년설의 장점(?)
   ◉ 20년설의 난점이 곧바로 40년설의 장점이 됩니다.
   ◉ 먼저, 야곱의 11명의 아들들의 출생시기가 무척 원만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추정이 가능할 것입니다. 【①레아는 우선 4명을 연년생 또는 불연속적으로 낳음. ②라헬의 질투에 의해 촉발된 빌하로부터 2명 낳음. ③빌하의 성공을 반발한 레아의 방책에 의해 실바로부터 2명 낳음. ④상당기간(10년 내지 20년까지도 가능) 단산되었던 레아가 다시 아들 2명과 딸 1명을 추가로 낳음. ⑤라헬이 비로소 요셉을 낳음】. 여기서 레아의 단산기간을 적어도 10년 이상으로 보아야 성경의 분위기에 적합하게 됩니다(창29:35 및 창30:19). 만약 이 추정이 타당하다면 야곱의 11명 아들들의 총 출산기간은 27년 내지 28년이 됩니다. 연수(年數)에 관한 약간의 오차는 고려치 않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아무튼 20년설의 무리한 계산에 비해 훨씬 논리적인 추?! 隙막? 보여집니다.
   ◉ 다음, 애굽 이주 숫자에 포함된 유다의 직계가족에 대한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됩니다. 즉, 유다와 요셉의 나이 차이를 약 23-24세 정도로 본다면, 유다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손자까지 볼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이 경우라 하더라도 창38:1의 ‘그 후에’가 의미하는 사건은 ‘요셉이 팔려간 후에’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조건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 후에’라는 단어가 다른 어떤 사건을 지칭한다고 한다면, 40년설의 설명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할 것입니다.

▣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 사실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다룬 문제도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편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20년설을 수용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으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가장 합리적인 이해에 도달하려 애써 보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입니다.
   ◉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40년설은 그런대로 가치 있는 제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제시된 40년설 자료에도 부족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84세의 나이에 맏아들을 낳기 곤란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반론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고, 그 외에도 지엽적인 계산 착오나 오타(?) 등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 40년설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고는 있으나(?), 자료에 기술된 내용만으로는 전적인 동의를 표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평신도들의 한계를 되뇌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의 추정은 평신도에게는 너무나 벅찹니다. 그러니 이제는 말씀의 전문가들인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분들에게 부탁드리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됩니다.
   ※ 어떤 분은 애굽 이주 숫자(70명 및 75명) 문제를 다루면서,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유다의 자손들은 물론이요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자손들(행7:14의 5명이라고 추정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수용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를 수용한다면 20년설의 두 번째 난점인 유다의 자손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된다 하겠습니다.
   ◉ 따라서 저는 목사님께 다시 질문 드리는 것으로써 이 묵상의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목사님, 40년설이 신학적으로 제기된 적이 있었는지의 여부와, 만약 있었다면 어떤 내용들이었는지, 또 만약 없었다면 목사님 개인의 견해는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답변]

우선 논리 정연하게 깊이 묵상하신 내용들을 나눠주어 너무나 감사하옵고 또 다시 정말 해박한 성경 지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솔직한 제 답변은 이 문제(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족들의 숫자가 75명인가 70명인가? 또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창31장의 38절과 41절의 20년이 동일한 20년인지 각기 다른 20년으로 합이 40년인지?)에 관한한, 집사님이 저보다 훨씬 더 연구하셨고 그래서 더 정확하고도 많이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후손의 숫자에 관한 신학적 논란은 그 동안 광범위하게 있어 왔고 많은 학술 논문들도 발표되었습니다.(최근의 것만으로도 대표적으로 Le Boulluec and Sandavoir 1989, Childs 1987, Durham 1987, Schmidt 1988, Wevers 1990 & 1992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활발히 거론된 이유는 특별히 출1:1-5과 행7:14 사이에 합계 숫자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뿐 아니라, 출1:1-5의 기록만도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구약 사본 넷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맛소라 사본(the Masoretic Text)과 사마리아오경(Samaritan Pentateuch)은 70명을, 사해사본(4Qexobd)과 칠십인역(the Septuagint)은 75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차이가 있는 이유에 대해서조차 학자들간에 아직 일치된 의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Barthelemy는 맛소라 사본의 필사자들이 신10:22의 기록과 일치시키기 위해 수정했다고 1978년 주장했고 Le Boulleuc과 Sandavoir도 그 의견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는 맛소라 사본과 칠십인역 중에 어느 쪽이 더 성경 원전에 가까운가에 대한 논란도 결론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선 하나의 가설 이상의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 것입니다.

요컨대 학계에서 활발한 토론이 있었던 70명과 75명에 대한 명확한 결론도 나와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보다는 문제 제기가 적었던 20년 혹은 40년 설에 대한 명확한 의견을 저로선 제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과문(寡聞)한 탓인지 몰라도 40년을 주장하는 학설을 제 개인적으로 별로 듣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제기된 두 가지 질문의 중요도를 따지면 사실은 야곱이 하란에 얼마나 거주했느냐가 그 후손 몇 명이 애굽으로 이주했는가에 비해선 훨씬 더 클 것입니다. 그 이유는 70명과 75명의 경우는 지금까지 집사님이 살펴 본대로 계산 방법에 차이가 있으면 얼마든지 그 정도의 오차는 생길 수 있고 또 스데반이 헬라인 집사라서 칠십인역에 정통해 그 성경대로 따랐다고 하면 그런대로 논리적인 설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야곱의 하란 거주 40년설은 집사님이 지적한 대로 여타 그와 연관된 성경 기록상의 모순들을 해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힌트가 될 뿐 아니라, 야곱의 일대기를 근본적으로 다시 조명해 보아야 한다는 신학적 과제가 생깁니다. 그런데도 지금껏 학계에선 오히려 전자가 더 활발히 토론된 이유는 추측컨대 단지 신구약 기록 간에(그것도 정경으로 채택되어 편집된 한 성경 안에서) 분명한 문자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하란 거주 기간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직접적 인용이나 연관된 기록이 없어 그  내용의 신빙성에 대해 구태여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란 거주가 20년 밖에 안 된다면 집사님이 처음 제기했던 질문대로 비록 네 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그 많은 아들을 둘만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고 또 38:1의 “그 때에” 관해 추가적 의문이 꼬리를 물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학자들이 이 문제를 크게 논의 삼지 않은 더 중요한 이유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년대기와 숫자 상에 비슷한 문제점들(오류가 아님)이 노정(露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야곱은 하란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최소한 20년은 봉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네 명의 아내(2명의 첩을 포함)에게서 12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애굽으로 이주해간 그의 가족은 최하 70명이다. 그리고 20년과 70명을 넘어서서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20년과 70명이 반드시 틀렸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의견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학술적 접근을 비방하거나 배제하자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집사님 말씀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합리적인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오히려 아직 학술적으로 미결 상태이므로 계속해서 더 많은 연구와 분석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미묘한 문제들은, 성경 앞뒤로 명료하게 연결되어 해석이 되지는 않지만 기독교 핵심 진리에  모순된 해석을 불러 오지 않는 한, 학계에서 완전히 인정 받는 새 학설이 나올 때까지 당분간 신학자들에게 맡겨 놓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평신도들과 목사들은 성경의 이런 문제점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 것인가의 원칙을 먼저 정립해 놓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참고할만한 Article 두개를  아래에 첨부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대신 하고자 합니다.(둘 다 제가 번역한 것이라 혹시 번역상의 문제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의에 주목하셔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 왜 성경의 족보는 꼭 일치하지 않는가?(Why don’t Bible Genealogies always match up?)    

창세기 5:3-32와 11:10-32의 족보에 나오는 숫자에 근거하여 아담이 언제 창조되었는지 계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 주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성경의 기자들이 비록 년대기적 추정이 가능한 기록을 다른 부분에서 하고 있지만, 족보의 수명을 결코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년대 추정이 가능한 기록의 예로는, 출12:40에는 이스라엘은 애굽에 430년간 있었고, 왕상6;1에는 출애굽에서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때까지가 480년이고, 삿11:26에는 가나안 입경 후로부터 기원전 1100년 경에 살았던 사사 입다의 시대까지가 300년이라는 것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상과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일자를 정하기 위해 창세기 5장의 노아 홍수 이전의 인물(antediluvians) 10명과 창세기 11장의 홍수 이후의 인물(postdiluvians) 10명의 수명을 합산하는 것은 성경이 독자더러 권장하는 일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구절에서 수명이 그렇게나 주의 깊게 기록된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합산해선 안 된다면 뭣 때문에 그런 수명이 포함되었는가? 첫째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사(不死)로 영원히 살 수 있게 의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그 20명의 수명을 한 눈에 그래프 그리듯 고찰하면 보편적이고도 확고한 인간 수명의 흐름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천년에서 겨우 몇 년 모자라게 살다간 사람에게서부터 이제는 수명을 겨우 70년 정도밖에 기대 못하는 현대인들의 비참한 결과까지 말이다. 둘째로 또 그 숫자는 죄로 인간 육체에 죽음이 왔고 그 결과 늙어서는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Lightfoot과 Usher 주교가 인류는 자오선(子午線) 기준 시간으로 기원전 4004년 10월 24일 오전 9시 30분에 창조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성경 기록상의 수치로 이런 결론을 내선 안 된다. 성경의 족보는 일반적으로 생략이 포함되어 있다. 한가지 예로 마태복음 1:8에선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 아하시야(왕하8:25), 요아스(왕하12:1), 아마샤(왕하14:1) 세 왕을 누락했다. 저자 마태의 목적은 족보를 기억하기 좋게 14명씩 3조로 나누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14는 다윗(David에서 D=4, V or Hebrew waw=6, D=4, 히브리어 자음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번호를 매기는 법에 따르면)의 숫자였기 때문이었다.

더 단적인 예는 마태복음1:1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the son of David)이자 아브라함의 아들(the son of Abraham)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히브리 원어는 문자적인 아들도 되고 후손이라는 뜻도 됨,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자손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역자 주) 다윗은 기원전 천년, 아브라함은 기원전 이천 년에 살았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도 이와 비슷한 상당한 생략이 세대들 사이에 개입되어 있다. 만약 마태복음1:1을 족장 이전(prepatriarchal) 시대 식(즉 창세기 5장과 11장식-역자 주)으로 읽는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100살에 다윗을 낳았고 다윗은 40살에 예수를 낳고.” [그러나 실제로는 아브라함은 백 살에 이삭을 낳았고 그 후손이 다윗까지 이어졌으며, 다윗이 40살이었을 때는 아마 솔로몬을 낳았을 것이고 또 그 후손이 예수까지 이어졌음]

따라서 성경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나이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장남을 가졌을 때가 언제인지와  그리고 오신다고 약속된 후손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해당되는 후손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풀어 설명하자면 이와 같다. 내 아버지가 성경에 기록될 만한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각각 100, 120, 140, 160살에 두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나는 그 가문의 장남이자 나를 통한 계보에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한다면 비록 나의 아버지는 나를 100살에 낳았고 또 메시야가 오려면 아직도 천년이 더 있어야 하지만, 성경이 내 아버지가 백 살에 메시야를 낳았다고 기록해도 하자가 없는 정확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성경 족보에 나오는 숫자를 단순 합산하면 자칫 오류 내지 견강부회(牽强附會)식 해석을 낳게 된다고 성경 자체가 경고하고 있다. 노아 후기의 마지막 인물인 데라의 경우가 그 예다. 그는 70살에 세 쌍둥이를 낳았고(창11:26), 205살을 살았다.(창11:32) 그런데 단순 계산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된다. 아브람이 그 아버지 데라가 죽고 하란을 떠났을 때 나이는 135살이어야 하는데 75살이었지 않는가? 즉 성경상의 수치를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사용하는 방식으로만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이 예에서만 60살의 오차가 발생한다. 따라서 창세기 11:26은 데라가 나이 70에 세 쌍둥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나이 70에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로 해석해야만 한다. 그래서 실제로 아브람은 데라의 나이가 70이 아니라 130이었을 때에 출생했고, 장남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장남처럼 가장 먼저 언급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성경상의 문제점들에 관해선 고 William Henry Green이 “Biblical Sacra” 잡지의 1890년 4월 호에 게재한 기사 “原始 年代記(Primeval Chronology)”만큼 잘 설파한 것이 없다. Green은 역대하 6:3-14와 에스라 7:1-15에 나오는 아론 대제사장의 계보를 예로 들었다. 전자는 22세대인 반면에 후자는 오직 16세대만 언급했다. 그러나 이 두 계보를 병렬해서 비교해 보면 에스라가 의도적으로 8대에서 15대까지를 생략한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생략이 어떤 면에선 성경 기록상 당연한 것인 양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족보에도 이런 관습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 에스라 8:1-2에는 그 생략이 더 심해지는데 아론의 손자와 증손자를 다윗의 자손과 함께 포로 귀환자의 명단에 포함시켜 놓고 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생략이다! 물론 에스라는 계보를 짧게 기록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인물만 언급하려 했던 것이다.    

성경의 다른 족보와 계보에도 동일한 문제점들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략은 일반적 현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래서 해석자들은 본문 자체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선 그런 점들은 무시해야 한다.

By Walter C. Kaiser Jr./  “Classical Evangelical Essays in Old Testament Interpretation” (1972) pp13-28



2. 구약 성경의 많은 숫자들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닌가?(Aren’t many Old Testament numbers wrong?)  

성경의 두드러진 난제(難題)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역사 초기의 인구 조사나, 후기 역사의 전쟁 기록에 나타나는 엄청나게 큰 숫자들에 관한 해석이다.

고대 문서에서 숫자들은 동일한 국가와 문화권에서조차 여러 시대와 관습을 거치는 바람에 표준화와는 거리가 먼 다양한 체계에서 전승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의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구약 성경에는 숫자들이 소리 나는 대로만(phonetically)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더 명시적인 숫자 체계나 기수법(記數法)이 그 수치들이 기록될 당시에 적용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별도의 기수법으로 기록된 성경은 여태 발견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이스라엘을 발굴하는 석수(石手)들의 수고에 기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가 될 수 있는 금석학(金石學)적 재료에 기록된 숫자라고는 모아비 석판(the Moabite Stone), 게제르의 달력(the Gezer Calendar),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패각(貝刻 the Ostraca)과 실로암의 히스기야 비문(the Siloam Inscription of Hezekiah) 등에 나타나는 것들 뿐이다. 그것도 크기가 너무 적고, 1에서 3만 사용했던지, 여전히 소리 나는 대로 적힌 것들이다.
  
또 어떤 숫자들은 초기 사본에는 없던 것이 후대에 와서 추가된 것이라 학술적 논의에서 아예 제외된 것도 있다. 그런데도 혹자는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창조에서 홍수까지는 1656년이, 헬라어 칠십인 역에는 2,242년이, 사마리아 오경에는 1,307년이 걸린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은 사마리아 사본이 야렛에서 므두셀라 사이에 100년, 라멕이 첫 아들을 낳을 때의 나이에서 120년을 빼버렸는데 필사로 복사할 때의 잘못이 계속 이어졌던 것 같다. 반면에 칠십인역은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과 에녹이 첫 아들을 낳을 때의 나이에 백년씩 보태졌고, 라멕은 6년만 보태졌다. 이 노아 이전 6명의 선조들의 첫 아이를 낳을 때의 나이를 백년을 보태다 보니 남은 생애가 각각 백년이 감해진 채 홍수 연대에 반영된 것이다. 히브리 사본과 칠십인역에선 4년의 편차가 있는 라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들 6명 각각의 총 수명은 일치한다. 그러나 히브리 사본이 므두셀라의 수명을 969년이라고 한 반면에 사마리아 사본은 단지 72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사본들의 오차는 너무나 일정해서 필사자들이 소리 나는 대로 기록하지 않고 숫자를 기록하는 어떤 문자나 기호를 사용해서 작업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쉽게 추정되어진다.    
  
비슷한 문제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많은 사본들이 바울이 파선했을 때의 총 승선 인원을 276명이라고 기록한 반면에 76명이라고 기록된 사본들도 몇 있다. 마찬가지로 그 유명한 요한계시록13:18의 666명을 616명으로 기록한 사본도 있다. 사무엘상 6:19에선 벧세메스에서 언약궤를 잘못 취급해 죽임을 당한 남자의 수가 50,070명이라고 다수의 사본들이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 이 소읍에 그만한 인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희박해 70명이라고 적힌 소수의 사본들의 기록을 더 정확한 것으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숫자들이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쉽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한 이스라엘의 인구는 전쟁에 출전할 수 있는 20세 이상 남자들의 숫자에서 추정하면 2백만이 넘는다. 그래서 이 숫자를 줄여서 해석한 기법을 논쟁을 부르는 다른 구절에도 적용해 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일반적으로 1,000을 뜻하는 히브리어 ‘elep’이 ‘가족’ ‘가문’ 혹은 ‘장막 집단(tent group)’의 뜻으로 해석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민수기 1장과 26장의 전사들의 숫자는 603,550에서 5-6천 명으로 줄어든다.      

물론 그 단어가 사사기 6:15의 나의 ‘집’의 용례에서 보듯이 그런 뜻으로도 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의도된 그 삭감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8:25-26에서 20살 이상의 용사 603,550명에게 반세겔씩 받은 결과가 총 백 달란트와 1,775세겔이 되었다. 3천 세겔이 한 달란트이므로 3,000X100=300,000 세겔에 1,775를 보태면 총 301,775세겔이 된다. 그런데 일인당 반세겔씩 받았으므로 301,775의 두 배는 정확하게 민수기 1:46에 나타나는 603,550이 되고 또 민수기 26:51의 601,730에 근접한 수치가 된다. 따라서 그 단어를 가족 단위로 해석하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일지 몰라도 다른 곳에선 더 큰 문제만 만들 뿐이다. 이 경우는 성막에 소요된 재료를 기록한 것이라 정확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전체 국민의 숫자도 약 2백만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성경의 숫자상 가장 눈에 띄는 난제는 포로귀환 후기의 자료, 특별히 역대기에서 발견된다. 비복음주의적 학자들 대부분은 역대기의 수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고 느낀다. 현대 주석가들의 눈에는 역대기 저자의 기록을 다른 어느 책보다 가장 의심스럽다고 간주한다. 역대기 상하에는 구체적인 숫자가 629회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숫자는 여호사밧의 군대 숫자다. 역대기하 17:14-18에는 구체적으로 30만, 28만, 20만, 20만과 18만의 다섯 그룹으로 구성된 도합 116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는 너무 과도한 숫자라고 여긴다. 이 숫자에 대해선 현대인들이 단지 과도하게 많다고 간주하는 것 말고는 그 신뢰성에 관해 비교해 볼만한 어떤 수치적 자료는 따로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서로 평행되는 구절에서 수치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몇 가지 주목할만한 예로는;
역대상 19:18은 병거가 7천인 반면에 사무엘하 10:18에는 7백이다. 열왕기상 4:26에는 외양간이 4만인데 반해 역대기하 9:25에는 4천이다. 열왕기하 24:8에는 여호아긴이 열 여덟 살에 즉위했는데 역대기하 36:9에는 여덟 살이었다. 이런 예들은 히브리 사본의 필사 복사 때에 사소한 실수가 있었음의 명료한 증거가 된다.

J. Barton Payne은 “맛소라 사본의 역대기를 사무엘서와 열왕기와 비교해 보면 필사자의 실수로 인한 숫자 11 개에 불일치가 있다. 역대기 기록 중 다섯은 정확하고, 다른 다섯은 부정확하며, 한군데는 불확실하다”라고 결론지었다.

평행 구절에서 숫자가 일치하지 않는 대표적 예 하나를 더 들면, 느헤미야 7장과 에스라 2장이다. 각각 153개의 수치를 포함하는 33개 가문을 열거하는데, 그 중 29개의 수치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 문제 또한 필사 과정에서 수직으로 그어진 직선 부호는 한 단위(unit)를, 수평 직선 부호는 열명, 또 약어로 쓰여진 mem(100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meah의 첫 글자)은 백 명을 뜻하는 부호들을 사용했는데 필사자가 부호 하나를 잘못 센 실수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한다. 대부분의 불일치가  이 부호 하나 차이에 의한 것임이 판명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는 경우는 실제로 숫자를 셀 당시의 여건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에스라서의 계보는 바빌론에 집결했을 때에 기록된 것인 반면에, 느헤미야서의 그것은 예루살렘 성벽이 중건된 후 유대 땅에서 세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동안에 생각이 달라져 귀환하지 않았거나 죽은 사람이 많았을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Allrik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언뜻 보면 성경 기록상의 숫자의 오류는 매우 심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 숫자의 시대적 의미와 성격을 더 많이 알아갈수록 오히려 그런 자료들의 가치를 아주 높여준다.”    

출처 “Hard Sayings of the Bible”(by IVP)의 서론 중에서


[첨언]

성경은 인간이, 그것도 보통 사람이 2-3천년 전에 사용하던 일상적 언어로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일상적 대화 가운데 추구하는 것 이상의 엄밀성과 정확성 말하자면 현대 과학적 어휘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특정한 자료가 자기들 기록 목적에 별로 중요하지 않을 때에는 그런 자료를 구체적이고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록한 것의 진실성을 보증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와 거짓된 지식으로 말미암는 오류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어떤 것만을 따로 고르거나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인 줄 믿습니다.  

정순태

2005.11.11 13:56:10
*.152.78.29

목사님, 상세하고 진지한 답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목사님의 지적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저의 개인적 견해가 100점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이는 역으로 다른 이의 견해도 100점이기는 힘들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생각이지요). 우리 인간의 성경(나아가 하나님) 이해는 불가불 제한적이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목사님께 질문드리고 답변을 기다리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의 이해 부족을 목사님의 깊은 통찰력으로 한번 짚어 보자는 것일 뿐입니다.....덧붙여 주신 자료는 잘 활용하겠습니다. 평소 제 생각과 크게 다른 내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다만, 하란 장자설은 지난 일을 기억나게 하는군요. 일전에, 하란장자설로 어떤 목사님과 가벼운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데라의 나이 79세에 하란을, 130세에 아브라함을, 130세 이후에 나홀을 낳았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목사님은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두서너번 반론을 주고 받다가 뚜렷한 결론 없이 토론을 중단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저는 개인적으로 하란이 데라의 장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목사님의 첨언은 깊이 명심하여 치우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사실 이것도 평소 제 생각과 일치되는 것입니다)......암튼, 목사님의 귀한 답변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샬롬.

운영자

2005.11.11 14:24:38
*.108.170.228

딱 부러진 결론이 없는 답변이라도 잘 받아들여 주시고 서로의 의견이 같음을 확인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하란 장자설에 관해 저의 상식적 코멘트를 보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에서 나올 때에 이미 조카 롯(하란의 아들), 그것도 한창 성년인 그를 데리고 나왔다면 아무리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임의 상태로 오래 있었다지만(사실 데라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리 오랜 것은 아니지만) 하란이 장자일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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