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만 설교할 수 있는가?

조회 수 3876 추천 수 131 2006.04.21 23: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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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희 사이트에 은혜로운 글을 자주 올려주시는 정순태 집사님으로부터 최근 이멜로 목사의 설교권, 안수권, 축복권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집사님의 이전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질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각각의 주제들에 관해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연구한 것을 나누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운영자로선 그 전체적인 논지에 동의하기에 별도의 해답 대신에 간단한 의견을 첨부하여 3차에 걸쳐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이며 실제 운영자는 담임 목사나 사역자들이 아니라 성령님이십니다. 목사와 교사와 집사 등은 직분만 다를 뿐 우열이나 서열을 나타내는 계급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 안에 영적인 질서와 권위는 세워져 있어야 하며 공동체를 대표하는 자는 분명히 목사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점차 초대 교회의 모습과는 달리 인간이 특별히 담임 목사가 독단적으로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들은 평신도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역자들에게 간혹 부분적으로 완전한 동의가 안 되는 점이 있더라도 반드시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많은 목사들에게 실망한 한 평신도의 입장에서 이런 문제들을 성경의 기록과 대비해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가를 알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정순태님의 의견]

▣ 들어가기

   ◉ 평신도들이 성경적일 것이라고 여기는 신앙 지식들 가운데 지극히 비성경적인 것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각자의 개인적인 이해차이를 고려한다면 일률적인 범주를 설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예배당을 성전으로 여기는 것, 주일성수/십일조 생활의 지나친 가치부여 등도 이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부정확한 성경지식은 거의 대부분 지도자들인 목사 및 신학자들의 잘못입니다. 성경을 바로 깨우쳐서 바로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예로 든 주제들에 관해서는 자주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관심만 가진다면 관련 자료들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교회의 주요 직분 중의 하나인 ‘목사’와 관련해서도 잘못된 지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에 관한 자료를 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사자인 목사들 스스로 자신들의 취약점을 들추어 낼 필요가 없고, 평신도들 또한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신앙생활이 성경에 맞고 유익이 된다면야 뭐가 문제되겠습니까만, 불행하게도 이런 오해에 기초한 신앙으로는 성경의 본 뜻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분란’으로 비춰질 수 있고 또 지극히 껄끄럽기도 한 ‘목사 관련 주제들’ 몇 가지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목사가 관여하지 않는 영역은 없습니다. 영적인 부분과 현실적인 부분 모두를 관장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목사의 권한에는 설교권, 안수권, 축복권, 성례(세례 및 성찬식) 집행권, 행정권(당회장 또는 교회대표권), 재정집행권, 인사권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모든 권한들은 목사직임을 위임받은 목사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고유권한이며 심지어 하늘의 상급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천주교적 생각입니다. 이 사고(思考)의 핵심은 왕권(王權)입니다. 목사에게 교회 왕권이 주어졌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당연히 비성경적인 아니 역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자각하고 있는 분들은 의외로 소수입니다. 극소수의 목사들과 역시 극소수의 � 向樗獵�평신도들만이 개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외침도 이미 기득권을 소유한 분들의 억누름 속에 국지적인 소요 정도로 인식되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 제게 능력이 있고 사정이 허락된다면 목사관련 제반 문제점들을 모두 파헤쳐보고 싶습니다만, ‘자신을 알고 있기에’ 과욕은 부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몇가지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혀 보고자 합니다.  

  ◉ 앞으로 3회에 걸쳐, 전통적으로 목사의 고유권한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설교권, 안수권, 축복권에 대하여, 과연 성경의 지지를 받는 신성불가침적인 권한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서 설교권입니다.

▣ 설교란?(설교의 언어적/사전적 설명과 개인적 이해)

  ◉ 각종 사전을 비롯한 모든 자료들이 규정하는 설교의 정의는 대략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설교(說敎 : preaching/sermon)란, 교리(敎理)와 종지(宗旨)를 사람들에게 전하거나 신도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경전 등을 풀어 이야기하는 행위로서

    ○ 천주교는 강론(講論), 불교는 설법/설계/설경(說法/說戒/說經)이라고 하지만

    ○ 개신교에서는 주로 ‘설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설교방법에 따라, 본문중심의 강해설교, 제목중심의 주제설교를 비롯하여 윤리적 설교, 변증적 설교, 교리적 설교, 간증 설교 등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분은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숙고해 보아야 할 이해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 “설교란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심도 있게 이해시키고 풀어주는 말과 능력과 사건이다. 마13:3-9절은 예수님의 전도 말씀이며 18-23절은 뜻풀이 설교이고,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쳐서 가른 것이 행동(행위) 설교이고, 예언된 말씀이 성취될 때 이루어지는 사건 자체가 성취 설교이다. 오늘날 대부분 목사들의 설교는 뜻풀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나는 그 말씀을 이렇게 알고 해석하고 있으며 또 어느 유명한 목사와 신학자는 이러저러하게 해석하고 있다.’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관 즉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아울러 ‘설교’라는 용어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하다, 말하다, 알리다, 선포하다, 설명하다, 선언하다, 외치다」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히브리어(하와, 나가드, 바아르, 다바르, 자악 등) 및 헬라어(앙겔리아, 아팡겔로, 디에르메뉴오 등)에 관해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단어들은 ‘설교’라는 용어의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신학과 어학을 전공한 전문가들의 일이지 평신도들의 소관은 아닙니다. 학자들의 ‘설교에 관한 설명’은 각 개인이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저는 ‘설교’ 용어에 대한 아래와 같은 개인적 이해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 한마디로, 설교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깨우친 성경 이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전의 정의와 흡사합니다만, 약간의 보충설명이 필요합니다.

    ○ 성경과 관련된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형성과정을 고려해야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성경은 1600여 년의 기간 동안 약 40여 명의 기자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성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만큼은 꼭 기억하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설교’ 용어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 약 1500여 년간 기록된 구약을 총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포되어진 명령과 이에 대한 인간의 이해 내지 반응’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정의에서 도출할 수 있는 구약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선포성’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는 것’은 곧바로 구약시대의 설교인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명령(말씀/율법)을 해설하는 형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근한 예가 에스라의 경우입니다. 포로 이후 에스라에 의해 실시되었던 율법교육은 전형적인 ‘해설’ 형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설교 관련 특색은 ‘선포성’에 있다 하겠습니다.

    ○ 약 100여 년간 기록된 신약은 거의 대부분 구약성경을 해설한 내용입니다. 주님도 그러셨고 사도들도 그러셨습니다. 구약을 좀더 자세히 풀어 가르쳐 주신 것에 다름 아니지요. 그러면서도 부분적으로 ‘선포’로 해석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이라든지 마태복음 28장의 대위임령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명령들도 사실은 구약의 완성과 발전의 다른 모습일 뿐임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튼, 신약은 구약과 조금 달리, ‘선포성’이라기보다 ‘설명성’이 강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 이제 약 1600여 년간 기록되던 성경은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더 이상의 계시가 없다는 뜻입니다. ‘선포’로 대변되는 구약과 ‘해설’로 대변되는 신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완성됨으로서 ‘선포기능’은 중지되었고, 그 이후의 ‘설명기능’만 남았다는 뜻이 됩니다.    

    ○ 그렇다면 이제 오늘날의 ‘설교’의 개념은 저절로 정리됩니다. 즉, 오늘날의 설교란 구약적 ‘선포’ 기능이 아니라 신약적 ‘설명’ 기능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저의 개인적인 설교의 정의(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깨우친 성경 이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에 동의되시리라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러한 저의 개인적 이해를 알아보려는 것이 오늘 묵상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늘 묵상은, ‘설교’라는 용어의 정의를 내리는 것에 있지 않고 이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설교의 적용까지 포괄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를 ‘적용 지향적 설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적용 지향적 설교’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개념에서 도출되는 진리입니다. 증인에게는 언어와 행동이라는 2가지 방편이 있습니다. 즉, 증인이 된다는 것은, 언어(말)로써 설명하고 행위로써 확인시켜야만, 증거가 성립됩니다.

  ◉ 적용 지향적 설교란 한마디로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언어적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설교는 주님의 증인이 지녀야 할 행위적 자질(삶으로 보이는 모범)과 병행되는 언어적 수단이라는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 자, 이제 이쯤에서 이 묵상의 핵심(목적)을 정리하겠습니다. 누가 설교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과연 성경은 누가 설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까요? 대부분의 성도들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듯이 설교권은 안수받은 목사들의 침해받아서는 아니 되는 신성불가침적인 배타적 고유 권한입니까? 만약 이렇게 알고 있다면 이는 완벽하게 틀린 이해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설교란 주님의 증인에게 필요한 언어적 수단’이라고 했던 정의와 대립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만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은 목사만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도든 목사든 평신도든 모두가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일을 언어(입)로 전해야 합니다. 이게 설교입니다. 따라서 설교는 모든 성도들의 임무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목사만 설교할 수 있다.’는 구절을 찾으려 하겠지만 헛수고입니다. 그런 말씀은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설교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신성한 권한이자 임무입니다!]

    ○ 좀 더 설명 드리겠습니다. 초점을 ‘주님의 증인’에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어떤 면을 구비해야 할까요? 우선 말을 해야 합니다. 듣지 못하면 구원도 못 받습니다. 전해지지 않은 메시지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 말로써 이야기 하는 것이 곧 ‘설교’인 것입니다.

    ○ 우리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 오해 중의 하나는, 설교를 무슨 기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서론/본론/결론, 기/승/전/결, 삼단논법/연역법/귀납법, 육하원칙, 논리성/설득력 등등의 세상 이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설교를 왜곡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요건이 잘 갖추어진 것을 ‘좋은 설교’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설교 근처에도 못가는 것입니다. 성경적 설교는 매끄러울 필요가 없습니다. 지식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주님이 증거 되기만 하면 됩니다. 결국 성경이 말씀하시는 설교란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 말로써 다른 이에게 전하는 것임을 아시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위에서 인용했던 어느 분의 이해처럼 ‘뜻풀이’ 수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 이러한 생각은 순수한 개인적 이해로써 성경을 곡해하는 것은 아닐까요? 검증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이제부터 성경을 통해 검증받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방법은 성경에 나오는 설교는 목사들에 의해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라 목사가 아닌 성도들에 의해서도 수행되었다는 점을 증명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계속하겠습니다.

▣ 신약성경에서 확인되는 평신도들에 의한 설교의 사례들

  ◉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평신도들의 설교 사례는 대부분 집사들과 관련된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초대교회 당시의 집사들은, 오늘날의 목사보다도 더욱 영성이 깊은 분들이므로, 성경의 집사는 오늘날의 목사로 보아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오늘은 묵상 목적상 그냥 문자적으로 오늘날의 집사 즉 평신도라고 간주하도록 하겠습니다.  

  ◉ ‘집사’ 하면 떠오르는 분은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이분에 대한 성경의 칭찬은 사도들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듣는 자였습니다(행6:3). 뿐만 아니라 기사와 표적도 행했습니다(8절). 변론에도 뛰어납니다(9절). 지극히 담대하여 얼굴이 천사와 같습니다(15절). 이런 칭찬 받은 분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행7:1-53절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구약역사를 꿰고 있습니다. 그것도 주님께 초점을 맞춘, 구속사적으로 완벽한 지식이며 지혜입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는 목사님이 계시다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스데반 집사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자, 이 설교를 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목사입니까? 아닙니다. 집사입니다. 설교란 집사도 얼마든지 �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한 것은 설교가 아니라 변론이었을 뿐이라고 억지 부려서는 안 됩니다.

  ◉ 두 번째 사례는 빌립 집사님입니다(행8:4-40). 사마리아와 아소도에서도 전도를 하셨지만 간다게의 내시에게 설교하는 모습은 정말로 압권입니다. 스데반 집사님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구속사적인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분도 목사가 아니라 집사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야만 할 것입니다.

  ◉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안디옥 교회는 5명의 지도자(선지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집단으로 이끌어지고 있던 교회였습니다(행13:1). 이들 중 담임목사격인 바나바와 부목사격인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됩니다(2-3절). 이후 안디옥에서는 누가 설교를 하였을까요? 나머지 3명이 설교했을 것으로 짐작은 됩니다만, 자, 이들의 직분은 뭐였을까요? 일단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선지자 및 교사’라 하십니다. 이 시기는 언제쯤일까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는 아마도 AD 44년 경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초대교회의 초기시대인 것이지요. 이 당시는 사도들과 일곱 집사들과 그리고 야고보/바나바 같은 장로들이 교회를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의 나머지 지도자인 선지자와 교사 3명은 성경에 의해 분명한 ! 지도자급으로 분류된 분들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그분들은 오늘날 목사직분이라기보다 평신도 직분자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구절을 통해서도 목사만 설교할 수 있다는 주장은 뒷받침되지 않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딤전5:17절의 “잘 다스리는 장로들 즉,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라는 말씀은 교회의 집단지도체제를 증거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만, 이 구절은 또한 목사만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암시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일부 이해가 부족한 목사님들 가운데는, “신약의 장로와 감독은 다르며 감독은 설교할 수 있으나 장로는 설교할 수 없다.”라는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의하면, 분명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즉, 설교하는 장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만 설교할 수 있다는 주장과는 전혀 맞지 않는 구절인 것입니다.  

  ◉ 끝으로 한 곳만 더 말씀드리지요. 행18:24절에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이 밝히는 것은 아니지만, 추측컨대 아볼로는 바리새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로서 학문과 성경지식을 갖출 수 있는 부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뿐이었으니까요. 지식 측면으로 본다면, 오늘날의 목사 수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아주 평범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가르침을 받습니다. 목사가 평신도에게 신앙교육을 받는 격이지요.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라고 하셨는데, 이는 “더 적절하게”(more adequately)라는 뜻입니다. 목사가 아닌 평신도가 설교를 더 잘했다는 것입니다!

▣ 마음 가다듬기

  ◉ 우리는 강대상에서 목사님들이 예복을 입고, 원고 보지 않고, 달변으로 큰 소리 치고, 짜임새와 조리가 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일치되는 청산유수와 같은 말을 하기만  하면, 아주 좋은 설교라고 짐작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웅변은 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참다운 설교는 아닙니다. 설교는 단순한 말장난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전 인격이며 전 삶입니다. 설교자의 평소의 삶과 정확히 일치될 때에만 참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두렵건 데, 우리가 지금 자주 접하고 있는 설교는 세상이론인 웅변술의 변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웅변술이란 고대 헬라인들로부터 비롯된 궤변론자들(sophists)의 산물입니다. 웅변은 입술봉사(lip-service)일 뿐입니다.

  ◉ 성경이 말씀하시는 설교는 ‘주님의 증거’ 행위와 연계됩니다. 증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거부할 수 없는 임무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하며, 이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설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증인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설교할 수 있다는 이해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성경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 누가 목사만 설교할 수 있다고 합니까? 이를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기득권층입니다. 욕심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욕심이 내재된 주장은 아무리 성경 구절을 차용하여 위장하더라도 거짓입니다!

  ◉ 지금은 세력이 쇠퇴하였지만, 공산주의의 무서운 점은 용어의 혼란에 있습니다. 용어와 개념을 뒤섞어서 진실을 감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설교’라는 개념도 이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세상 사람을 향한 전도활동이나 학생들을 향한 신앙교육이나 구역식구들을 향한 구역예배 등은 설교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다는 오해를 유포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가서 하는 것만이 설교라고 인식케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전도시 하는 말이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말이나 구역식구들을 이해시키는 말이나 모두 모두 설교입니다. 강대상에서 하는 목사의 말과 전혀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성경적 행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설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임무입니다. 따라서 설교는 목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오히려 강대상까지 평신도에게 개방하는 것이 초대교회적인 참 신앙자세임을 하루빨리 깨우쳐야만 할 것입니다(고전14:26-33절의 초대교회의 예배 모습을 깊이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모든 성도가 교사’임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교회들의 실상에 비추어, 가당치도 않은 철딱서니 없는 주장이요 요구일 뿐이라고 일축할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성경적 설교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목사들이 ‘설교권은 안수 받은 목사들에게 주어진 배타적 권한’이라는 오해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 묵상에서 제기된 ‘평신도에게까지의 강대상 개방’을 이행하기 위한 방법론은 이 묵상의 범위를 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설교는 아무 준비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준비된 자라야 설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신도에게 강대상을 개방하기 위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별도로 연구해야할 것입니다. ♥    

[운영자의 의견]

설교에 대해 성경의 많은 예를 들어 주시고 운영자가 구태여 보태어 봐야 사족이 될 정도로 아주 세밀하게 분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접근해보겠습니다.

현재 구역예배, 소그룹 성경공부, 새벽 기도 등에선 평신도들이 설교하고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교회나 목사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나아가 담임 목사가 결원이 된 교회에서 후임 목사를 청빙하는 기간까지 주일 대예배도 장로나 집사가 돌아가며 설교하고 그 청빙기간이 길게는 몇 년이 가는 교회도 있습니다. 선교지에선 많은 평신도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여 설교를 비롯해 주일 예배 전체를 인도합니다.

즉 현실에선 평신도가 전도에서부터 대예배까지 실제로 설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목사가 결원이 되지 않았어도 주일 대예배 때에 평신도가 지속적으로 설교해도 되는가?”로 좁혀집니다. 또 현실에서 평신도도 설교하고 있다면 설교자의 자격 조건으로 목사나 집사 같은 교회 직분이 아니라 다른 기준으로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럼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설교의 성격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이 계시한 당신의 뜻을 그분을 대신해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실제로 받은 자였다는 뜻입니다.  

질문자님께선 구약 설교를 선포성, 신약 설교를 설명성이라고 구분했습니다만 저는 신구약 공히 선포성으로 해석합니다. 신약시대의 사도들이 구약을 인용하여 해설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입증하려는 목적이었지 그 설명 자체가 설교의 주제이자 전하고자 하는 근본 메시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그리스도”(케리그마)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왜 예수가 오셔야만 하는가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약은 그분이 오셔서 이루신 일과 인간에게 미친 결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밝혀 놓은 것입니다. 또 그런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를 실제로 받은 자가 그 계시를 대언(代言)한 것이 설교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선 구약의 선지자들뿐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우선 하나님 계시의 절정, 아니 바로 그분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성령을 통해 주님의 사역과 말씀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 선지자나 신약 사도들은 온갖 직업, 지위,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해답은 간단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을 직접 계시 받은 자는 전도이든 회중 대상의 대예배이든 직분과 상관없이 설교를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의 성격상 교회가 감안해야할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파생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경으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완결되었다.

그러나 오늘 날에도 모든 설교자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임합니다. 물론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 즉 인류 구속사에 관한 계시는 더 이상 없습니다. 반면에 신구약 성경의 진리에 대한 해석은 성령의 영감의 형태(광의의 하나님 계시)로 직접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설교가 단순히 성경을 풀어 설명하는 것에 그친다면 성경을 공부한 자는 본인의 믿음과 성령의 영감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라도 설교하면 된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설교가 아니라 성경 지식에 관한 교육입니다.

질문자님이 정확하게 지적한대로 신약 시대의 사도들은 구약에 관해선 설명성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구약을 풀어서 설명한 것에 그치지 않고 성령의 영감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당시로선 구약뿐인 성경에서 깨달았습니다. 또 구약에선 예표적으로만 언급되었던 메시야의 도래가 십자가 사건으로 구체적으로 실현된 복음의 의미에 관해서도 직접 계시를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구약과 예수님의 연결은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성경 지식이 갈릴리의 어부들보다 월등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복음의 해석에 실패한 이유는 오직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이런 원리는 오늘 날의 설교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구약에 완성된 그리스도의 진리를 해석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설교를 직접 해 본 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 체험을 반드시 하게 됩니다. 성령이 시키는 설교를 합니다. 자기가 이런 저런 요지로 설교해야지 마음먹고 초고를 작성하고 있으면 실제로 내면에서 떠올라 설교로 바뀌는 내용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다른 것이 되는 경우를 종종 겪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성경을 분석한 것을 회중을 대상으로 설득(persuasion)하려 들면 아무런 은혜나 능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설교는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가 그 뜻을 선포(proclaim)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시키는 설교라야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고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몸과 삶으로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설교자가 성령 안에서 완전히 중생한 체험이 있어 날마다 예수님만을 구주로 삼아 동행하며 그 은혜와 능력을 누리고 살고 있어야만 십자가 진리를 자기의 전부를 걸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란 설명이 필요 없고 선포해야 합니다. 설명은 진리의 내용과 그 진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만 동원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중생의 체험이 없으면서도 단지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 고시에 합격한 자는 자칫 그 설교가 성경을 풀이하는 것으로만 흐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신학적 지식은 일천하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격적 체험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평신도가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요!”만 전해도 더 훌륭한 설교가 됩니다. 한 마디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설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성령의 계시를 받은 자만이 이런 단순한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설교자의 자격 검증

설교란 앞에서 언급한대로 성령의 영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과 연결시켜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가장 근본적인 자격 요건은 성경에 능통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근대에 들어와서 목사가 전임으로 설교하는 이유는 목사라는 직분 때문이 아니라 그래도 성경을 가장 많이 공부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환언하면 평신도라도 성경에 능통하면 설교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된 것은 회중을 상대로 하는 대예배 때의 설교입니다. 그렇다면 회중이 평신도 설교자가 성경에 능통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질문자님이 이 부분에 현실적인 어려움 있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고 분석한 그대로입니다.

미국 남침례교회(한인 이민교회가 아닌 미국인 교회)의 경우에는 교회 내에 성인 상대 성경 공부가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거의 신학교에 버금갈만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그런 코스를 전부 마친 평신도를 평소 각종 모임에 설교를 하게하고 또 그 설교가 정말 성경적이고 은혜가 깊으면 대예배 때에도 세웁니다. 나아가 그런 분을 신학교 졸업장과 상관없이 목사 안수를 주고 담임 목사로 청빙합니다. 그야말로 신약 성경의 초대 교회 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지해야 할 사항은 아무리 신학교 학위는 없어도 오랜 기간 그 사람의 인품과 믿음과 성경 지식을 다 검증한 후에야 대예배의 설교자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근본적 문제는 설교자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진리를 직접 계시 받았는지 여부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 사람의 인품, 믿음, 성경지식만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설교를 들어 본 회중의 객관적 검증이 필요한데 단지 말씀에 은혜가 있었는가 만으로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어도 청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청중은 감동과 은혜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설교자는 자기가 설교한 그대로 살아야 하며 선포한 말씀에 증험이 따라야 합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신18:22) 또 예수님조차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고 했습니다. 설교한대로 증험과 행함이 따라야 함은 평신도 설교자뿐만 아니라 신학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에게 해당됩니다.
    
3. 계속적인 양육의 문제

모든 설교는 어떤 특정 공동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집니다. 또 공동체란 반드시 나름대로의 영적 특징과 수준을 갖고 있습니다. 그 말은 주일 설교가 처음 교회에 나오는 자들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주요 기능 외에 그 공동체의 변화를 위한 양육의 기능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양육에 맞추어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인 설교 내용의 변화도 수반되어야 합니다. 즉 특정 공동체에는 그 공동체의 성격에 맞는 전임 설교자가 있는 것이 매주 설교자가 바뀌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목사만 설교하라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명시적 계명이 없어도 모든 기록을 종합할 때에 성경의 진리에 능통하고 그 진리에 대해 성령을 통해 계시를 받은 신령하고 거룩한 자가 어떤 특정 공통체의 지체들을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해 설교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격 요건에 현실적으로 가장 근접한 자가 목사이므로 아무리 목사가 공석일 때에 장로나 집사들이 돌아가며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다 해도 결국은 목사를 청빙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설교가 목사의 전유물이 아닌 이상 목사가 강대상을 독점하고 평신도에겐 절대 개방할 수 없다고 고집해선 안 됩니다. 반면에 평신도가 설교할 수 있다고 해서 아무나 무턱대고 설교 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에 생명을 걸 수 있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구하는 목사의 경우는 반드시 평신도보다 더 큰 능력과 은혜의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목사가 성경적 지식이 뛰어나서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사는 하루 24시간 365일을 교회와 성도들만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며 또 그래서 그들의 영적 상태를 목사만큼 잘 아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목사를 설교 전임자로 세우고 특권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그런 기도를 기쁘게 받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공동체에 반드시 영적 지도자를 세워서 그 지도자를 통해 일관되게 당신의 뜻을 보이기 원하십니다. 물론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 즉 어떤 형태로든 설교하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체 회중 예배의 설교는 특별히 그런 소명과 말씀의 은사를 받았고 또 그 훈련을 받은 자여야 합니다. 반드시 목사가 설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임 설교자로 부름 받은 자가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기성 교회에서 목사 대신에 주일날 대예배 때에도 한두 번 평신도가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존 목사의 설교가 시원찮으니 차라리 평신도가 나서서 계속해서 대신 설교하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빨리 자격을 갖춘 새로운 목사를 물색하든지 정 안되면 자기에게 맞는 목사를 찾아 교회를 옮기셔야 합니다.

반면에 미국의 남침례교회처럼 어떤 평신도가 교회 전체 회중의 찬성과 추대로 설교자가 되어 계속 주일마다 설교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목사가 된 것입니다. 또 교회(전체 회중)로선 그에게 신학교의 학위 여부와 무관하게 바로 목사 직분을 주고 안수를 해야 합니다. 실제로 남침례교에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도 이런 모습이 나오길 기대합니다만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모든 신자가 어떤 형태로든 설교를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가정 예배 때에 설교를 해야 합니다. 아버지만 전임으로 할 것이 아니라 어머니 심지어 자녀들도 돌아가며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더 잘 배운다고 합니다. 설교를 하는 자가 더 은혜를 받습니다. 모든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족 예배지만 그 공동체가 한 소망 아래 함께 양육되어져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때때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예배와 설교를 이끌어갈 수 있지만 결국은 아버지가 전임으로 설교를 해나가는 것이 유익하며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바입니다. 영적 권위란 권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중구난방으로 교통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을 무질서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가정이지만 그 가정 전체의 소명을 주시고 그 소명을 이끌어나가는 지도자로 한 사람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가정이 그러할진대 교회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만 설교를 해야 하는 법은 없지만 정말 바로 선 목사라면 그분에게 설교를 맡기는 것이 교회로선 훨씬 유익합니다.  
  
4/21/2006

정순태

2006.04.22 02:35:11
*.152.78.29

목사님
가뜩이나 불편하신데 제가 부채질하는 것은 아닌지요?

목사님 설명을 거의 대부분 수용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김문수

2006.04.23 06:59:31
*.74.130.29

정순태님께서 목사님수준에맞는 난위도높은 질문을 활발하게
진행시킴으로인해서 전체흐름이 합력하여 선을이루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것같습니다. 주님안에서 모두에게 평강이 넘치시기를................

운영자

2006.04.23 16:21:04
*.108.173.250

아래는 허경조님의 의견입니다.

"제가 출셕하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집사도 준비가 되어지면 오후예배의 설교를 맡기겠다고 하시는데
이 글을 읽고 많은 도움이 됬읍니다.두분께 감사드립니다."

운영자

2006.04.23 16:22:46
*.108.173.250

댓글을 달고 싶으신 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올려진 글에 대해 댓글을 달고 싶으면 로그인 하셔서 의견달기에 글을 적어 오른 편의 글쓰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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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의견달기란에 Copy한 것을 부쳐서 고친 후에 글쓰기를 누르면 됩니다.
답글은 글을 올리신 분이 간단하게 질문을 해 왔을 때에 주로 사용하는 기능입니다.
참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경조님 그런 뜻에서 답글로 두번 올린 것을 제가 삭제한 후에 님의 의견만 위와 같이 옮겼습니다.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댓글을 한꺼번에 함께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산마루

2006.04.25 19:57:38
*.199.134.245

참으로 은혜롭게 하늘지식을 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사라의 웃음

2012.11.02 22:51:17
*.109.85.156

하나님을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이용하려고 하는 수많은 목회자들로 인한 성도들의 아픔이 너무 슬픈일인 것 같습니다.
복음은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고 선포되어야하는 것인데, 많은 교회에서 사람의 생각들이며 그저 성경풀이로만 설명되어지고 있음도 참 슬픈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질서의 하나님께서 참으로 성도를 아비의 맘으로 사랑하는 지도자, 그리고 그 사랑의 맘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를 목숨을 다하길 아까와하지 않는 그런 지도자를 세우시어 복음이 선포되어지고, 진리가 오롯이 드러내어지도록 성령님께선 거듭난 목사를 통하여 지금도 부지런히 역사하시고 계심을 믿기에,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시는 목사님들이 점점 더 많아지길 기도할 수 밖엔 없습니다.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복음을 복음되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결국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에, 성도로서 또한 맘의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그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 자가 되길,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이 연약함, 무지함들을 아울러 고백하며 지속 도와주시길 엎드려 기도할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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