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민족과 국가를 나누었는가?
(신자의 정체성과 애국심의 관계)
[질문]
성경에서는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으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간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천국 백성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궁금한 것은 신자로서 이 세상에서 내 나라 내 조국에 대한 국가관이나 민족의 정체성 등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성경과 배치되는 부분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부정하면 마찰을 빚게 되고.... 제 생각에는 현재 우리나라의 국사 교육이 명확한 사실에 근거해서 이루어 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현실적으로 제 자녀들이 직면한 문제입니다.
또 어차피 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미국사람, 중국사람 구분하고 한국, 중국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으면 성경적으로 어떻게 대답을 해 줘야 할지 난감합니다. 자칫 잘못 대답하면 청소년기에 국가관이나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질문 드립니다.
[답변]
이 질문에서 다루어져야 할 과제는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심오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선 질문에 표현은 안 되어 있지만 만약 자기 나라와 다른 나라 간에 전쟁이 났을 때에 민족과 국가를 떠나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꼭 전쟁이 아니라도 경제, 문화, 종교 등 현실의 모든 부분에서 나라별로 경쟁 내지 상충이 생길 때에 신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당혹하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런 상황에 신자를 처하게 하신 그 배경을 따져보면 단순히 나라 간의 문화, 관습, 도덕의 상이(相異) 내지 충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나타난 인류 구속사적 하나님의 경륜이 인간의 전 역사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기 전에 먼저 확실히 해둘 전제가 두 개 있습니다. 우선 창조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 당연히 모든 인류는 아담과 이브라는 한 부모 밑에서 났습니다. 다른 말로 창조 당시는 아무런 인종, 피부, 민족, 나라의 구분이 전혀 없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인류를 향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17:26)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혈통은 맞지만 각 사람이 살아야할 거주의 경계와 년대를 하나님이 제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민족과 국가를 나누어 각 지역으로 나누어 살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럼 한 혈통에서 다 출생하게 해놓고 왜 또 여러 나라로 나뉘게 해서 온갖 분쟁이 발생하게 했을까요?
인류 분화(分化)의 발단
죄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최초의 인류 아담과 이브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진정으로 사랑하여 아무런 다툼이 생길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겠다고 선악과를 범하자 말자 서로 간에 그 잘못을 떠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생겼고 부부 간에도 무화과 치마로 가려야 할 만큼 서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9-13, 이하 표시 없으면 창세기)
인간이 당신을 배반했음에도 하나님은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먹었느냐?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끝까지 자기 잘못을 통회하지 않고 숨고 핑계 대기에 급급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7-19)
하나님을 대신해서 땅을 거룩하게 다스려야 했던 아담이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피조세계도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죄에 물든 인간들이 이마에 땀을 흘리기 싫어 서로 가진 것을 빼앗게 되는 계기가 생긴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 범죄 한 후에 바로 두렵고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그 죄를 가려보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둘렀습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이 절대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로만 사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평생 동안 수고해야 하는 이 땅에서 무화과 잎 치마로는 그 보호 장치가 도저히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추방하고 피조세계가 왜곡된 벌을 내렸지만 사죄와 보호 장치로 아무 쓸모가 없는 무화과 치마를 벗기고, 대신에 당신께서 직접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3:21) 인간은 하나님이 지어준 가죽 옷을 입고 그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에 있어야만 참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최초 인류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고, 환난과 재앙도 없으며, 인간끼리 시기 질투도 없었던 낙원에서 완악하게도 그 모든 것을 다 마련해준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그 후 인간이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선 평생 동안 온갖 노고를 바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어려움 가운데도, 아니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까 더더욱 서로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단 당신의 품 안에 사는 한 가족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 다시 탐욕스런 죄로 인해 가족끼리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아벨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여 그분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드렸던 반면에 가인은 성의 없는 제물로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열납하지 않자 질투에 눈이 어두워 아우 아벨을 살인했습니다. 살인죄를 범한 가인에게마저 하나님은 아담의 경우처럼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인 또한 아담처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4:9)라고 오히려 핑계를 대며 하나님께 반발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아담과 동일한 벌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2) 이제 가인이 가는 곳 마다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아 아주 나쁜 토질이 형성되는 벌을 내렸습니다. 각 지역별로 소산물의 차이가 생겨 서로 분쟁할 소지 또한 생긴 것입니다.
아담의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심판만 내린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하자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4:15) 해주었습니다. 아직도 인간이 당신의 품 안에서 당신의 은혜를 받아 살며 한 핏줄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생명만 부지하기에 급급했지 자식들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분께 순종하는 자로 전혀 양육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의 안전과 만족을 구하는 문명을 태동시키는 선조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남의 것을 힘으로 빼앗는 라멕 같은 자도 나왔습니다.(4:23,24)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담의 가문에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인 셋을 주었고 또 그 후손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4:25,26) 성경이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눠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류를 민족과 나라로 나누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자들로 모르는 자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게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인종의 발생
그러나 사람들은 또 다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6:2) 경건한 셋 계열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완악한 가인 계열의 불신자와 결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순전히 외적인 아름다움만 보고 반해서 하나님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 판단해 결정했습니다.
신자가 불신자를 전도해야 함에도 오히려 그 반대로 신자가 세상의 쾌락을 쫓아서 불신자가 된 것입니다. 힘을 동원해 남의 처들을 마음대로 빼앗은 라멕처럼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음으로” 일부다처의 죄악에까지 빠졌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6:5)해 하나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실”(6:5) 정도까지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은 세상에 오직 노아 한 가문만 빼고는 모두가 타락한 것을 보고 홍수로 그 전부를 멸하기로 하셨습니다. 사실 노아도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고 성경이 말하듯이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을 계시하셔서 당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따로 예비해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의 심판 후에도 노아의 한 아들이 죄를, 사실은 노아가 그 죄를 지을 빌미를 제공했지만, 지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있는데 아들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두 형제에게 고했습니다.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얼굴을 돌이키고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고 덮어 주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 의로울지 몰라도 이처럼 술에 취하든 어떤 경위가 되었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범죄하게 됩니다. 경건한 노아마저 실수할 수 있고 신앙교육을 잘 받은 아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 힘으로 죄를 이기지 못하며 당연히 그 죄에서 스스로 깨끗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직접 지어 입혀주신 가죽 옷을 입고 있을 때만이 의로울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일 이후에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들이 각기 지역별로 나뉘어져 번성하게 됩니다. 셈은 아시아지역으로, 야벳은 유럽지역으로, 함은 아프리카 지역으로 퍼져 살게 됩니다. 인간의 피부색이 황인, 백인, 흑인으로 나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피부색에 따라 구별하거나 함의 죄로 벌을 준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벌을 받아 피조세계도 함께 저주를 받았고, 또 가인과 그 후예들이 범한 살인죄로 흘린 피로 그들이 가는 곳 마다 땅을 더럽혔고, 노아의 홍수 후에 지구 생태계의 자연조건마저 완전히 바뀌어서 지역별로 기후, 풍토, 지리 등이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의 체형이 이전에는 왜소했고 얼굴도 좀 못생긴 편이었는데 최근 영양이 좋아지면서 체형이 커지고 얼굴 형태도 서구인들처럼 잘 생기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한 핏줄이고 외모는 환경에 따라 달라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한 증거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피부색이 각기 다르고 인종이 나뉜 것도 인간의 죄악이 그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발생
인류의 결정적인 잘못이 세 번이 지나도록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비록 체형과 외모는 달라도 한 핏줄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실은 모든 자가 당신께 죄를 범한 것으로 따지면 세 번은 아무 의미가 없고 도저히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네 번째 결정적인 잘못을 또 저질렀습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1:1-4) 문명이 발달하자 교만할 대로 교만해진 인간들이 하나님과 직접 대적하려고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인간을 민족과 국가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11:6-8) 인간의 언어가 각기 다르게 되고 각 지면에 흩어져 살게 됨으로서 민족과 나라가 생겼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거주의 경계를” 하나님이 각기 제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민족과 나라가 다르게 된 것은 하나님에게 대적하지 말라는 것이지 서로 경쟁하여 싸우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말이 하나요, 종족이 하나면 서로 잘 사랑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맨 먼저 지은 죄는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요, 두 번째 죄는 형제를 살인한 죄였습니다. 언어와 족속의 차이를 따질 계제라고는 전혀 안 되는 한 가족 안에서 일어난 범죄, 그것도 가장 큰 범죄였지 않습니까?
이처럼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배반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지 민족과 국가로 나뉘어져 경쟁했기에 분쟁이라는 죄악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 피부색, 종족, 나라가 다르다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에 찌들어 있기에 서로 경쟁하고 분쟁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나아가 바벨탑 사건이 단순히 인간의 문명을 뽐내어 하나님 앞에 교만하려는 죄만이 아닙니다. 탑을 지을 때에 인간이 한 말은 “자,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그 범죄를 본 하나님은 “자, 우리가 내려가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흩어지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노력으로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거나 최소한 자기 허물을 스스로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절대 인간이 당신의 권위를 대체할 수 없고 또 그 허물과 죄는 오직 당신만이 심판과 구원을 해 줄 권한이 있다고 엄격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라고 표현되어 있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합동사역으로 하시되 언젠가는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제 나라와 민족이 갈리게 된 원인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원인은 오직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목적은 오직 인간이 당신께 대적하는 대신 당신의 품 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와 허물은 더더욱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인간이 서로 다른 생활 여건에 살며 나라와 민족으로 나뉘어져 질투나 분쟁이 생기게 된 것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으로서도 안타까운 일로서 인간의 죄로 인한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창조 시부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사단의 활동을 묵인할 때부터 이미 사태의 진전이 그렇게 될 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다 알면서도 허용했던 유일한 이유는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힐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를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사해주고 또 혼잡케 된 언어를 다시 하나로 통일시켜줄 대책이 미라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바벨탑 사건 때에도 우리(성삼위 하나님)가 이 땅에 내려오셨듯이 인간은 하늘로 올라가 자신들의 문제와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베푸시는 은혜와 권능에 의지할 때만 인간은 죄 사함을 받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언어가 달라지고 나라와 민족이 나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더 편만하게 증거되고 온 인류가 성령 안에서 교통하여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은 창조 시의 아담과 이브에게나, 나라와 민족이 갈린 오늘 날에도 하등의 변화가 없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아버지가 되고 인간은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만드신 아버지도 못 알아보고 그분을 외면하기 바빴다는 것이 전 역사의 기록이지 않습니까?
인류가 만약 언어와 종족이 하나로 같으면 서로 더 사랑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이나 전 세계 어디 가도 거지는 있습니다. 그런 거지를 볼 때마다 불쌍한 마음이 먼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말을 못하나 움직일 수가 없나. 왜 저 고생을 하나?”라는 핀잔부터 나오지 않습니까? 특별히 미국 이민 와서 사는 저 같은 사람들이 미국 거지를 볼 때에 첫 마디가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입니다.
말이 같고 모든 여건이 같으면 오히려 경쟁은 더 격화됩니다. 반면에 여건과 말이 다르면 조건이 달라서 객관적인 비교를 할 수 없기에 열등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서구나 한국 같이 잘 살게 된 나라가 아프리카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제반 여건상 필연적으로 더 사랑해주어야 하고 또 해줄 수 있는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라마다,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자기 것만 챙기며 서로 간에 장벽 쌓기에만 급급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신자 개인적으로도 고난 가운데 주의 율례를 배우고 더욱 정금같이 성숙될 수 있듯이 인류 전체적으로도 힘든 나라가 있어야 서로 돕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을 점차 외면하고 오직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구를 공해로 뒤덮어 온난화시키며 핵 군비 경쟁으로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도록 맡겨주신 하나님의 책임을 완전히 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류가 필연적으로 겪을 종말론적인 운명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도
그럼 나라와 민족이 서로 분쟁하는 인류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는 것인가요? 또 하나님은 이대로 수수방관하고만 계신가요?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창조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가문, 당신을 아는 자로 하여금 모르는 자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인간은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알지 못하고는 서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비록 범죄 한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냈어도 하나님은 아벨과 셋과 노아와 에녹과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가계를 보존하셨고 또 그 가계를 통해 구세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2:5)
구약시대에는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후손인 한 민족을 택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증거 할 제사장 나라로 세웠습니다. 그 후 때가 차매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인류를 구원할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또 그 사역을 직접 감당할 성령님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한대로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신자들은 권능을 입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모든 족속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성령 안에서 믿음의 가계로 세워진 사람들로 하여금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그런데 그 구원의 소명을 담당할 자는 항상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인류 역사를 그분이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야 함으로 능력이 강한 자가 하나님을 증거하면 하나님의 권능은 가려지고 오히려 인간적 의가 돋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신7:7) 때문에 선택되었으며 또 신약시대의 교회에서도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합니다.”(고전1:26)
그런데 처음에 제사장 나라로 선택 받은 이스라엘은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고 나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상 모든 족속 가운데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구속 계획에 들어 온갖 은혜를 맛보았으며 율법을 먼저 받은 민족이 오히려 복음으로부터는 더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또 다른 비밀스런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롬11:25) 상태로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온 땅을 돌아 다시 이스라엘에 전해지도록 한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저희가 너희로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롬11:28)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세상의 언어가 혼잡하고 나라와 민족이 나뉜 것은 오직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라는 것으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 성령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함으로써 연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4:4-6) 사단과 죄악이 아직 남아 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인류는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궁극적으로 민족과 나라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혼잡케 되었던 언어도 하나로 통일 될 때가 옵니다. 예수님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는 그 날입니다. 다른 말로 그 때까지는 인간이 민족과 나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목적은 오히려 십자가 복음으로 인종, 민족, 언어,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것을 넘어서는 사랑이야 말로 참 사랑이며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예수 믿는 기독교 신자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 모든 장벽을 허무는 사랑을 자기 몸이 죽기까지 실천하셨던 예수님의 본을 신자도 따라야 합니다.
신자와 애국심
한 마디로 나라와 민족이 나눠지고 언어가 다 다른 까닭은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당신께서 직접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그분의 피를 나눈 형제들끼리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언어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도 한 특정한 민족과 국가에 속해 특정 언어를 사용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조치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을 당신의 뜻에 맞게 아름다고 거룩하게 가꾸고 그리스도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다른 말로 나라와 민족이 선의의 경쟁으로 인류 복지를 더 향상 시키고 이 자연을 잘 보존할 책임이 모든 인간에게 있지만 특별히 신자는 더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자기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성실하게 봉사해야 합니다.
단 모든 일을 오직 십자가 복음을 더 잘 전하여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확장한다는 절대적 원칙하에 해나가야 합니다. 만약 복음이 부인되면 아무리 자기 나라가 하는 일이라도 반대해야 합니다. 나아가 인간의 근본적 자유와 권리가 부인되거나 말살되는 일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크고 중요한 두 강령이 신자의 모든 행동의 절대적 규범이 되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도 복음과 인권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에는 나라와 민족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나라 간에 일상적인 경쟁이 되는 일이라도, 준수할 의무가 있으며 또 각 나라에 세워진 세속적인 권력에 순종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가 나치 독일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권을 말살하는 정책을 펴자 목숨을 걸고 자기 나라가 하는 일에도 반대한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베드로, 바울 같은 초대 교회 사도들도 복음을 핍박하는 유대 당국의 요구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바로 그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오직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원리로만 섭리하십니다. 신자도 그에 맞추어 오직 십자가 복음의 원리에 의거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죄는 철저히 증오하고 죄인은 끝까지 사랑했던 그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나누는 기준은 인종, 민족, 국가가 아니라 당신 앞에 교만한지 겸손하지의 여부뿐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일한 기준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종, 민족, 국가, 문화, 종교 등 세상의 체계 들을 넘어서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연약한 모습, 현실적 능력이 뒤지거나 일부러 손해를 자초하라는 뜻이 아니라, 즉 자신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으로만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인도하심에만 온전히 의존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기독교 신앙 양심과 애국심 내지 세상적 윤리 기준이 혼선되고 상이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간절히 기도하여 주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쉽지 않으니까 더더욱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상충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거룩하고 아름답게 바꾸어 나가는 것이 신자의 책임이자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모르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현실적으로는 나라를 움직이고 있기에 신자의 정체성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로마의 박해를 받게 해서 사마리아를 건너서 땅 끝까지 흩으셨습니다. 이미 구약시대에도 비록 하나님을 배교한 죄로 받은 징계였지만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백성을 이방 족속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곳곳에 흩으셔서 이방에도 여호와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세계 도처에 유대인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들은 구약시대부터 제사장 나라의 소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아주 바뀌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세계에 약 90개국, 중국은 약 120개국에 나가 살면서 그 분야에서 세계 3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위가 어느 민족인지 아십니까? 바로 한국으로 근 200여 개국에 나가 살고 있습니다. 정말 유대민족처럼 가장 약했고 도덕적으로 그리 나을 것이 없는 한국 민족을 하나님은 지금 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민족이 세계 도처로 나가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돈과 자녀교육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 민족은 가는 곳마다 교회부터 세우고 열심히 선교 활동을 펼칩니다. 비록 소위 잔 머리 굴리는 데는 세계 최고이며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돈이 되면 들어간다고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렇게 된 배경에는 사실 하나님의 주권이 간섭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들 대부분이 아직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믿고 있는 성서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그런 기질적 특성을 이용해 순수한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마지막 때에 한국 민족이 너무나도 막중한 하나님의 사역을 책임지고 있는 셈입니다.
민족과 국가가 나뉜 것은 비록 인간의 죄 때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저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고 계시고 당신의 인류 구속에 관한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바벨탑의 그 교만했던 죄에 부과했던 형벌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축복의 통로로 바꾸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복의 근원을 삼아 열방을 당신께로 인도하시듯이 오늘 날에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 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명해 본 세계 역사와 현 시대의 흐름에 입각하여 자기 민족과 국가에 주신 하나님의 특정한 소명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거주의 한계를 정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때로는 다른 민족과 국가와 선의의 경쟁도 불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절대적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인종, 민족, 국가를 초월해야 합니다.
1/23/2007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