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5:1-5) 현실적인 축복은 사탄에게 간구하라.

구약성경강해(50) / 민수기강해 (40)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25:1-5)

 

너무나 무력한 인간의 상식과 이성

 

모압 왕 발락과 당대 최고 주술사 발람의 이스라엘을 저주해보려 시도했으나 도리어 축복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크신 권능을 확실히 체험한 두 사람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이 크게 타락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음행했고 또 그 여인들의 꾐으로 우상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크게 진노하신 하나님이 모세더러 먼저 주동자인 백성의 두령들을 목매어 죽여서 나무에 매달도록 했습니다.(4절) 그에 부화뇌동한 백성들도 이만사천 명이나 염병으로 죽는 심판을 내렸습니다.(9절)

 

성경은 이 사건의 배경에 발람의 흉계가 작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31:16은 이스라엘이 발람의 꾀에 넘어가 여호와께 범죄 하여 염병이 일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신약의 베드로서와 유다서도 동일한 증언을 합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벧후2:15)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1:11)

 

예수님도 계시록의 버가모 교회에 주신 편지에서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4) 바울 사도도 이 사건을 예로 들어 당시 성적으로 문란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음행하지 말라고 훈계했습니다.(고전10:8)

 

이처럼 신구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친 종교적 영적 영향은 심대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예수님이 종말에 관한 계시에서 언급했다는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심각하고 진지하게 경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추적하여서 우리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성경이 발람이 이스라엘을 꾀었다고 하는 경위와 이유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발람은 분명히 여호와의 권능과 긍휼에 감동을 받아서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달라진다는 한국의 속담처럼 고향에 돌아가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자 생각이 백팔십도로 뒤바뀐 것입니다. 다시 우상 신들을 섬기며 그 신들의 능력을 맛보게 되자 자기가 여호와께 완전히 붙잡혀 꼼짝 못했던 것이 너무나 분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히브리 신도 어쨌든 세상의 수많은 신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로선 최고 주술사로서의 명성에 금이 가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꼴입니다. 비유컨대 학교의 일진에게 힘이 달려 어쩔 수 없이 돈을 빼앗겼지만 집에 돌아오면 극도로 화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이나 신체 크기가 비슷한 동급생에게 꼼짝 못하고 당했으니 얼마나 증오심이 치밀어 오르겠습니까?

 

발람의 그 분노는 필연적으로 저주와 증오로 확대되어서 앙갚음할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에서 뒤지니 여호와에게 직접 대적할 수는 없고 다른 방식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 신의 백성을 무너뜨리면 그 신을 이긴 것과 같아집니다. 다시 비유하자면 자기는 뒤로 숨고 잘 아는 다른 학교 짱에게 부탁해 일진의 가장 힘이 약한 부하에게 복수하는 셈입니다.

 

물론 이는 상당히 위험천만한 모험입니다. 나중에 그 모의가 발각되면 더 크게 당합니다. 실제로 발람은 모세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31:8) 그가 여호와의 권능을 익히 알고도 이런 모의를 꾸몄다는 것은 인간 이성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완전한지 입증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탄식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상식과 이성에 따라서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거기다 한번 분노에 사로잡히면 큰 문제없이 작동되던 이성적 판단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바울도 그래서 에베소교인들에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고 경고했습니다. 발람은 마귀에게 틈을 준 것이 아니라 이미 사탄의 충성된 종이 되 자입니다. 그를 붙잡아 매고 있는 사탄의 굴레가 쉽게 끊어질 리 없습니다. 마귀가 그의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향한 적개심에 불을 붙여서 여호와의 권위에 다시 도전하는 음모를 꾸미게 만들었습니다.

 

발람의 기발한 꾀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모압과 미디안 여자(25:6, 31:1)들로 이스라엘을 유혹케 해서 성적타락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약한 점을 파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에겐 웃음거리 밖에 안 되지만 인간들에겐 너무나 쉽게 잘 먹히는 방안이었습니다. 발람 나름대로는 아주 끈질기고도 교묘한 흉계를 꾸며냈습니다.

 

그의 지혜가 돋보이는 점은 이 계획을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먼저 이방 여자들에게 완전히 빠지게 만들었습니다.(1절) 그 후에 자기들의 성적노예가 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자기들 신에게 절하자고 꾀니까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2절) 거기다 두령들부터 유혹에 빠트려 백성들로 큰 죄의식 없이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혹시라도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그렇게 혼이 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고 의아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도덕적 양심과 종교적 경건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죄가 주는 쾌락에 한 번 빠지게 되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거기다 사백 년간 애굽에서 노예로 있으면서 우상숭배가 주는 쾌락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할 때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고 불평했습니다. 고대에서 고기는 시장에서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상 신전의 제사에 참여할 때에 양껏 먹고 음행도 즐길 수 있습니다. 애굽으로선 그렇게 한 번씩 스트레스를 풀어주어야 히브리 노예들의 통치가 수월해집니다.

 

물론 지금쯤은 애굽의 우상숭배를 맛본 구세대들은 광야 사십 년의 방황 동안에 거의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세대들의 육신에는 그 오랜 죄의 흔적이 DNA로 새겨졌을 것입니다. 죄 자체가 곧바로 유전된다는 뜻이 아니라 죄가 인간을 오염시킨 부작용과 폐해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죄악을 선행보다 훨씬 더 익숙하고 친밀하게 여기는 습성이 세대를 넘어서 대대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새로 배운 도적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한국 속담처럼 신세대들 또한 너무나 쉽게 어쩌면 더 깊이 그 쾌락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구세대들은 이미 겪어봤고 그 부정적인 영향도 아니까 오히려 경계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신세대가 더 위험합니다. 성경도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했다”(3,5절)고 말합니다. 브올 지방의 신 바알에게 완전히 빠져서 그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빠져나올 능력도 의사도 도무지 없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성경을 앞뒤로 비교해보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쉽게 모압 여자의 유혹에 빠져버린 이유를 개연성 있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사건을 22-24장까지 세 장에 걸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몇 번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모르는 사이에 발람과 발락 사이에만 진행되었고 그들에겐 치욕적인 체험이었습니다.

 

특별히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향해 세 번 축복하신 메시지는 발람 본인이 아니고는 아무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거기다 분명히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발설할 성격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발람이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말했거나 누군가를 시켜서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모압 여자들에게 그 모든 경과를 가르쳐 주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발람이 결과적으로는 어쨌든 발락의 세 번의 저주 시도를 축복으로 바꿨으니 이스라엘에게 지대한 공을 세운 것처럼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런 설명을 들은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압 여자들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오히려 호의까지 갖게 될 것입니다. 발람은 모압 여자들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접근하도록 시켰을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왕 발락이 너희를 치려고 발람을 불러서 세 번이나 저주의 신탁을 부탁했으나 오히려 그는 너희를 축복만 해주었다. 이번에 너희 신의 권능이 얼마나 엄청난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만약 전쟁을 쳤더라면 우리가 크게 패배했을 것이 틀림없다. 너희를 치려던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 그런 엄청난 신을 믿는 너희가 너무 부럽다. 우리로선 앞으로는 너희와 절대로 싸우지 말고 정말로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발람이 돈에 눈이 어두워서 어쨌든 발락의 요구를 충족시키려 노력했다는 진짜 속내는 당연히 감추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원수였던 자가 큰 공을 세운 자로 변신했습니다. 역시 당대 최고 주술사다운 음흉하고도 교묘한 흉계입니다.

 

죄악은 반드시 확장 발전된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먼저 음행에 빠지자(1절),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했다고 말합니다.(2절) 이스라엘은 죄악에 조금씩 틈새를 보여주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렁에 완전히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모압 여자들은 발람의 큰 공로를 전하면서 친밀하게 교제하자고 접근해왔습니다. 모압은 친척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정복할 대상이 아니었기에 거절할 명분도 없습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선한 모습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처음부터 기괴하고 흉측한 모습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아예 상대를 않고 도망부터 갈 것입니다. 다른 모든 수단이 고갈되었을 때에 최후에 공포심을 조장합니다. 대신에 사탄은 항상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서 나타납니다.(고후11:14) 정말로 깨어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있지 않으면 누구나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일단 그 광명한 천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조금씩 단계별로 유혹합니다. 한꺼번에 급하게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정말로 별 것 아닌 사소한 잘못에, 모든 사람이 예사로 행하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 첫 번째 죄에서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묶였을 때에 그보다 아주 조금만 더 센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너무 크고 심각한 잘못이라는 인식이 들 정도로 갑자기 아주 큰 죄로 유혹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서서히 물을 데우는 바람에 개구리는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안심하고 따뜻한 안락함에 취해 잠들어가는 식입니다. 지금껏 이런 잘못을 아무리 범해도 어떤 벌도 없었으니까 약간 센 것 하나 정도 더 범한들 별일이 없으리라는 안심을 심어줍니다. 점차 죄에 타성이 붙고 나중에는 죄가 가진 관성에 따라 자신이 흘러가도록 방치하게 만듭니다. 잘못을 한 번 범하나 두 번 범하나 어차피 마찬가지라는 핑계까지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죄란 항상 뒤늦게 후회하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가선 그동안 걸어왔던 발자취가 너무 추하고 악해서 회개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런 죄를 절대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영적으로 아주 경건해 보이는 깨우침마저 사탄이 심어줍니다.

 

나아가 사탄은 인간 스스로는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완전한 성화를 목표로 삼게 만듭니다. 자기가 모든 죄를 하나씩 전부 다 고친 후에 하나님 앞에 나가겠다는 결단을 하게 합니다. 그럼 지난 죄는 물론이고 그런 중에 새로 짓는 죄까지 쌓여서 한 걸음도 앞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완전한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끝없는 죄책감에 묶여서 아무 일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않게끔 천천히 밀어붙이는 것이 사탄이 노리는 바입니다.

 

사탄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목표는 인간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고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과 등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아주 경건하고 신령한 종교적 영적 방안들은 물론 초자연적인 체험도 포함됩니다. 아니 인간의 눈에 선해 보이는 방법을 더 많이 더 자주 동원합니다.

 

사탄보다 이스라엘의 책임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탄의 모략이 교묘하고 음흉하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의 잘못이 훨씬 크고, 아니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 자리에 이르도록 최고로 강조하며 가르친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통치를 벗어나선 죽음뿐이라는 절대적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당신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려 들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당신의 백성들이 훼손하는 것은 절대로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모압 여자들이 발람의 세 번의 축복을 핑계로 접근해왔을 때에 그들과 아예 상대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비록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었지만 발람은 엄연히 우상 신의 충성된 종이었고 돈에 눈이 어두워 여호와를 대적하며 저주하려 들었던 자입니다.

 

설령 그 배후에 발람의 흉계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쳐도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의 일곱째 계명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레20:10) 동족 여자와 간음해도 사형인데 이방족속의 여자와는 더더욱 그럴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진노가 단순히 음행만으로 촉발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1절)고 말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진노가 심판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여자들의 꾐에 넘어가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2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정적 원인은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해서 그 우상에게 절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방신의 제사는 음주가무와 신전에서의 음행이 따릅니다. 이스라엘로선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때려주었기에 옳다구나 하고 신나게 그 제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우상신들의 제사에 참여했을 때는 아무 문제 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국에서 노예로 고생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직은 당신에 대해서 그들에게 온전히 계시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브라함과 언약한 시기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출애굽 후에 불평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어도 본문처럼 즉각 심판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금으로 애굽의 황소 신상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며 춤을 출 때도 모세에게 먼저 심판 예고를 해주었습니다. 모세가 자기 생명을 걸고서 간절히 중보 기도할 틈을 주었고 그 기도를 받아서 심판을 거두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경우가 다릅니다. 바로 얼마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발락과 발람의 저주를 당신께서 다 막아주었습니다. 그 당시는 몰라도 발람이 직접 혹은 모압 여자를 통해 간접으로 그 큰 은혜를 뒤늦게라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더더욱 여호와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그분만 섬겨야 합니다. 발람이 자기 잘못은 감추고 도리어 공을 내세우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영적으로 제대로 분별하고 그를 처단하거나 아예 상종도 말았어야 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자기들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복하러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도 그곳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기대 열정 기쁨에 충만해 있습니다. 더더욱 기도하고 율법에 따라 정결케 해야 할 기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꾸로 바알에게 절하면 발람이 처음에 소원한 것처럼 바알이 여호와에게 이긴 결과가 되며, 나아가 여호와더러 바알에게 절하게 만든 꼴입니다. 이 얼마나 사악한 죄입니까? 과연 주모자 두령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 백성 이만 사천 명을 염병으로 즉사시킨 심판을 냉혹하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의 죄악이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도무지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죄는 용서해주어도 당신을 직접 거역하는 죄 즉, 당신 대신에 우상을 섬기는 죄에 대해서만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당신의 진노를 쏟아 붙습니다. 그 죄는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명하면서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인간을 다 죽여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경우처럼 가나안 여자들의 꾐에 넘어가 음행하고 그들의 제사에 동참하여 그들 신의 종이 되는 일만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죄로 유혹하거나 시험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다 제거하라는 것이며, 전쟁 후에 그들 거민과 함께 거주하게 되더라도 절대로 우상숭배 죄에만은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성경 전체에 일관된 뜻입니다. 아니 인류를 창조한 이래로 하나님이 인간을 죽음으로 심판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입니다. 선악과 명령에서 밝혔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도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천하 만민에게 보여준 당신의 절대적 계명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 금식하며 공사역을 준비할 때에 사탄이 시험을 걸어왔습니다. 그 목적도 하나님 대신에 자기에게 경배토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경배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물리쳤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따라야만 하는 신앙의 본을 보인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가나안을 진멸하기 전에 우상숭배에 가담한 당신의 백성부터 먼저 진멸했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우상 신에게 가담한 자는 자기 백성이라도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하나님이 진멸하는 심판들 반드시 받게 된다는 진리를 온 천하에 선포했습니다. 또 자기 백성부터 심판함으로써 가나안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이 인종 종교 문화 등을 근거로 차별한 것이 아님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자기가 택한 백성들마저 한순간에 몇 만 명씩이나 죽이시는 잔인한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세대와 민족의 구분 없이 사탄에게 속한 종들은 그분의 냉혹한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에 진멸해 마땅한 이 땅을 심판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까닭도 당신만의 긍휼어린 무한하신 인내 때문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탄에 미혹되어서 죄악이 주는 쾌락에 도끼 자룰 썩는 줄도 모르고 그분 앞에서 정말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담처럼 언제 닥칠지 모르는 그분의 심판을 조롱하고 있는 꼴입니다. 바울이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이천년 전에 이미 엄격히 선언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간구할 현실의 축복

 

문제는 본문의 이스라엘의 잘못이 오늘날의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닌 것 같으니 큰일입니다. 작금 기독교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며 스스로 그분의 진노를 자기 머리 위에 쌓는 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을 통해 신자가 받을 현실적 축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했는데 그 순종의 보상으로는 다른 이로 당신을 알게 만드는 자로 세우겠다는 약속뿐이었습니다. 불신 세상 앞에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인생의 본을 보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최초의 해외선교사로써 이 땅에선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아서 하늘나라를 실현해 보여야 하므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신자는 주변 이웃들 앞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고 만족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불신자들이 여호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그분의 신자 인생을 향한 뜻이자 계획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그런 계획을 넘어뜨리려면 어떻게 전략을 세우겠습니까? 아주 간단한 방안 하나뿐입니다. 신자더러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지 않게 하고 또 이 땅에서 나그네 같이 살지 말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에 집착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항상 광명한 천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작금 많은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간구하는 첫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만 빌려서 자신과 자기 주변의 현실적인 형통과 출세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을 나그네 같이 살려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교회에서 신자들이 비는 것이 현실 축복뿐이라면, 나아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도 된다는 헌신과 실현 없이는, 아무리 고난에서 탈출되어도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연의 일치 내지 본인이 노력한 결과일 뿐입니다. 어쩌면 그 기도를 사탄이 듣고 사탄이 응답해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사탄이 너무나 좋아서 박수칠 일이며 또 그런 교회들이 더욱 양적으로 부흥할 수 있도록 사탄이 온갖 선해 보이는 수단들을 제시할 것입니다.

 

정말로 더 두려운 사실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이 발람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둔 것처럼 하나님은 사탄이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를 넘어뜨리려거나 이미 넘어뜨려도 그냥 그대로 둔다는 것입니다. 신자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본문 같은 구약 성도의 경우에는 출애굽과 홍해의 이적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도에게는 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절대성 영원성 완전성 유일성을 분명하게 계시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구원의 진리는 세상 모든 흑암의 세력을 이기고 남습니다. 만약 교회가 그 진리를 온전히 붙들지 않거나, 그로 인해 하나님이 본문처럼 사탄의 종을 통해 넘어지게 두더라도 교회와 교인의 잘못이자 책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신자가 처한 현실의 여건 특별히 물질과 상관없이 당신께서 이루십니다. 물질로 당신의 거룩한 역사가 방해되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삶에서 형통과 안락이 넘치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기보다는 광명한 천사가 다가오고 있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현실적으로 잘 풀려나갈 때에 더욱 기도하고 말씀에 전념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 욕심과 자존심을 세우려하지 않았는지부터 되돌아봐야 합니다. 모든 죄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사탄은 너무나 교묘하고 무엇보다도 아주 끈질깁니다. 조금이라도 틈새를 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예수를 열심히 잘 믿어도,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도, 아니 저 같은 목사라도 여전히 연약하고 무엇보다 죄와 쾌락에 치사하고도 쉽게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매일 붙잡고 실천해야할 말씀을 주님이 이미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입니다.

 

11/2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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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수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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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8
  • 조회 수 250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1]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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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5
  • 조회 수 216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3)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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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1
  • 조회 수 257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1]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4)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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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8
  • 조회 수 249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1]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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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5
  • 조회 수 251

(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기 강해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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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2
  • 조회 수 398

(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기 강해 (2)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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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9
  • 조회 수 421

(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기 강해 (3)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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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5
  • 조회 수 329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기 강해 (4)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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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2
  • 조회 수 224

(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2]

(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룻기 강해 (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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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9
  • 조회 수 473

(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1]

(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룻기 강해 (6)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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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6
  • 조회 수 297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4]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룻기 강해 (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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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3
  • 조회 수 554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1]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기 강해 (8)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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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0
  • 조회 수 248

(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강해 (9)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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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7
  • 조회 수 410

(룻3:14-18)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큰 장애가 나타나면?

(룻3:14-18)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큰 장애가 나타나면? 룻기 강해 (10)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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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4
  • 조회 수 291

(룻4:1-6)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아무개 신자들

(룻4:1-6)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아무개 신자들 룻기 강해 (1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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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31
  • 조회 수 277

(룻4:7-12) 하나님이 아는 신자와 모르는 신자

(룻4:7-12) 하나님이 아는 신자와 모르는 신자 룻기 강해 (12)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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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07
  • 조회 수 304

(룻4:13-22) 룻기의 주인공은 다윗이었다.

(룻4:13-22) 룻기의 주인공은 다윗이었다. 룻기 강해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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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4
  • 조회 수 396

(룻3:11, 잠31:10) 성경이 말하는 페미니즘

(룻3:11, 잠31:10) 성경이 말하는 페미니즘 룻기 강해 (14-완)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3:11)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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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1
  • 조회 수 218

(롬5:1-5) 믿은 후 반드시 행해야할 유일한 일 [1]

(롬5:1-5) 믿은 후 반드시 행해야할 유일한 일 2021년 추수감사주일 설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

  • master
  • 2021-11-28
  • 조회 수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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