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올린 글에서
노 목사님이 언급하신
'어떤 신도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셔서 다른 신도보다 더 물질적 부를 준다고 해서
그것을 감사하다고 기도하는 것은
특별한 사랑이 아닌 일반적인 사랑을 받는 신도 입장에서는 상처와 아픔이 되는 일이다'
라는 발언이 기억이 나서요.
성경에 보면 적지 않은 인물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을 더 ' 많이 받은 것처럼 나옵니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 나면서부터 야곱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요셉의 경우도 그렇고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부터 하나님이 택하셔서 은총을 받아 민족의 시초가 된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영상에서 말한 언급처럼
마치 그런 '택함을 받아 특별한 은총'을 누린 사람들은 생각해보니 '재물이나 권력' 부분에는 구약 한정입니다.
반대로 사도 바울바울이나 스데반 같이 신약성경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은 반대로 순교를 하였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예수의 그 사랑하시는 제자' 라는 사도 요한인데 유일하게 사도 중에서 장수를 하면서 제가 알기로
약 100세 가까이 살면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작성하여서 신약성경의 끝을 마무리한것으로 압니다.
1. 하나님의 사랑에 '특별한 사랑' 과 '일반적인 사랑' 이 따로 있나요?
제가 성경을 읽을 때 특히 요셉의 경우에 그런 문장이 분명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또한 그 외에도 신약 구약에서도 따로 하나님께 특별히 더 사랑을 받는 (신약의 경우 은사를 더 받는거라고 할 수 있겠는데) 것같이 묘사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을 순전하게 경외하고 신실하였기에 그런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석하게 된다면
마치 '공과에 의한 하나님의 보상'의 측면으로 은총이 전락할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다.
너희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도 사랑하라"
라고 하신 말씀과도 조금은 안맞는거 같기도 합니다.
2년 전에 제가 드린 질문에서 '하나님은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더 사랑하시는가' 라고 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인간적 기준으로 보려고 하지마라. 그렇지 않다. 모두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라고 답변하신 성경문답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특히나 요셉의 경우 같이 서술상으로 그러한 특혜(?)를 받은 것같이 보이는 자도 분명 있어서요.
2. 하나님의 사랑을 특히 더 많이 받은 자는 좀 더 많은 사명을 짊어지는 건가요?
1번 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군가가 '어떠한 이유로든간에' 특별히 더 사랑을 받는 자가 있다는 하에서
하나 더 질문이 있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것처럼 은사는 성령님이 정하셔서 누군가는 많이 주시고 누군가는 적게 주시며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은사를 안주십니다.
그렇다면 은사를 많이 받은 자는 그 은사를 통해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일종의 사명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더 많이 받은 건가요?
'큰 힘에는 큰 책임에 따른다'
라는 스파이더맨에서의 대사처럼 많은 은사를 주신 것은 그만큼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하게끔 부여된
사명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이 특별한 사랑의 결과일지라도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당연히 그 양과 질을 따질 수 없기에 '특별한' 사랑과 '일반적인' 사랑을 구분할 수도 없고, 또 구분해서도 안됩니다.
믿음은 창조주와 창조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창조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의 완전무결한 작품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현재이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무엇이든 하시는 창조주를 참으로 알게 되면 우리가 품었던 대부분의 의문은 눈 녹듯 사라집니다.
피조물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이는 당연히 그 피조물을 만드신 분, 즉 창조주입니다.
오직 선하신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창조한 피조물의 모든 필요 또한 피조물 자신보다 더 잘 아시기에 언제나 그것을 채워주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조주 스스로 당신의 속성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문제는 피조물이 다른 것을 원한다는데 있습니다. 귀한 진주를 마다하고 진흙발로 짓이기며 오히려 그 진주를 건넨 손을 물어 뜯으려 드는 개나 돼지처럼, 창조주께 이미 가장 좋은 것을 받았다는 진리를 모르고 자신의 기준으로 풍요와 결핍, 필요와 불필요를 따지는 피조물의 태도가 그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만으로 만족하는 자입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신 분, 내 모든 형편과 처지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께서 언제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며 당신의 긍휼로 인도하신다는 진리 앞에 온전히 항복한 자입니다. 창조주의 완전한 경륜 앞에서 타락한 피조물이 해야할 것은 오직 자기를 부인하는 일 뿐입니다.
의문은 좋은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으면 참 믿음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탐자님의 모든 의문들이 성령님께서 진리로 인도하시는 통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에게 가장 합당하면서 필요 충분한 그래서 독특한(unique) 사랑을 주시지, 다른 사람에 비교해서 더 우월하거나 양이 많은 특별한(special) 사랑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선 아래 첫번째 글을 참조하십시오. 그러니까 야곱이 열두 아들들을 다 다르게 축복기도해 준 것입니다. 이 때 요셉에게 형제 중 뛰어난 자(창49:26)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구별된 자(나실인의 역할)가 되어서 온 가족을 살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생존 번성케 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의미입니다.
성경도 문학적 수사법이 아주 많이 사용된 글임을 전제로 이해해야 합니다.(성경해석법 책을 구해 공부해보라고 하셨는데 하고 계신지요? ^^). 성경에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고, 모세는 친구처럼 직접 대화했고, 요셉도 그런 뉴앙스로 표현했지만 그들이 맡은 일이 독특했다는 것이며 또 다윗 모세 요셉은 그 일에 충성하느라 엄청난 시련과 인고의 기간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에 대해선 아래의 두번째 글을 참조하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기만 원하지 그에 따르게 되는 순교까지 가는 연단은 감안하지 않습니다. 요한 사도도 섬에 유배된 감옥살이가 절대 평안 풍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특별히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작성하게 하려고(다른 사도가 순교한 것까지 다 보고서 이단들이 설치는 상황은 물론 본인도 온갖 핍박을 직접 다 체험하게 한 후에) 그만큼 수명을 허락하여서 자연사하게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시원한 사이다 (마6:9)
택함 받은 자에게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질문 2. 성령님이 베푸는 은사도 상기에 설명한 원칙과 동일합니다. 각 사람에게 고유한 은사입니다. 초자연적 은사는 신자가 되어야 받지만 일반적 은사는 수도 없이 많으며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은사에 속한 것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밝혀듯이 은사는 대체로 이미 각 사람에게 날때부터 주어지고 자라면서 체득한 그 사람만의 장점 특기 등을, 예수 믿은 후에 교회의 덕을 세우고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활용하게 해줌으로써 재능(달런트)이 은사(카리스마)로 바뀌는 법입니다. 이에 대해선 달란트 비유에 관한 글도 참조하십시오.
달란트 비유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가요?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신자 각자를 고유한 걸작품으로 만드시고 각자와 일대일 개인적으로 교제 동행하십니다. (성탐자님의 앞선 재물에 관한 글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른 목사님의 의견에 제가 토를 달 수는 없습니다. ) 부모가 자식이 열이라도 똑 같이 다 사랑하며 사랑하는 방식과 의미만 다르듯이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 그분의 근본적인 속성에 관한 절대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먼저 성경 본문을 해석(성경해석법에 따라서)한 후에는 반드시 성경 전체가 말하는 진리(조직신학적 교의)와 비추어 봐야 합니다. 제가 일반 신자도 성경해석법과 기본적인 조직신학(교리)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