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환 형제님께
가상공간을 통해서이지만, 주님을 믿는 형제의 관계로 말미암아, 교제 나누게 됨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먼저, 복에 대한 매우 어설픈 제 견해에 대하여 전폭적인 공감을 표해 주신데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아마도 격려 차원에서 하신 말씀인 것으로 압니다만 아무튼 관심 가져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는 전문적인 성경 연구가가 아니며, 또 글 솜씨도 부족한 정말로 평범한 평신도 중의 한 명일뿐입니다. 다만 성경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시는 깨우침을 기록해 두었다가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묵상하곤 할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성된 글들은 주로 소그룹 모임에서 나누어지곤 합니다. 일전 게시판에 올렸던 복에 관한 묵상도 이런 종류의 글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 격려의 말씀을 주신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말미에 “방언에 대한 견해”를 물어 오셔서, 참으로 난감한 심정입니다. 방언에 대해서는 별도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은사주의 계열에 속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방언 관련 서적들을 제법 읽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설명 중에는 성경과 일치한다고 확신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었고, 저의 사고로써는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형제님께서 기왕 물어오셨으니 순수한 개인 생각으로써 “방언”에 대한 견해를 답변 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에서는 방언에 관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설명이나 견해에 대한 언급은 일체 하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지식에 관해서는 이미 형제님께서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체득하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한 사람의 평신도가 생각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며 읽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첫째로, 방언의 정의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학적/교리적 의미를 짚어보자는 것은 아니고 단지 성경이 방언을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방언이란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사 중의 하나’라고 선포하심을 믿습니다. 은사를 다룰 때,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격이 필요 없으며 이유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직권적 은혜로 말미암아 받을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간과하면 은사 받은 사실을 지나치게 자랑으로 여기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소위 목사성직론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목사 은사는 정말로 은사이며 이는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 스스로가 성경을 뛰어넘는 권위와 권력을 영위하려 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할 것입니다. 격렬하고도 끝나지 않는 논쟁의 주제이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자제하겠습니다). 방언 은사를 받았으면 감사함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랑해서는 안 되지만 원래 자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를 잘 모르는 일부 성도들이 ‘방언 받는 연습’을 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까지 벌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째로, 방언의 역할(용도)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되는 방언의 용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에 사용되는 사적인 용도로서 이것이 주된 역할인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방언 통역 은사와 연관되어 사용되는 공적인 용도로서 이는 부차적인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공동체 내에서의 방언사용을 제한하고 있으며 불가피하게 사용할 경우라 하더라도 반드시 통역을 하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사실 방언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에 사용하는 수단이 근본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오직 방언만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영어로 하든 국어로 하든 아프리카 언어로 하든, 성도의 마음이 담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의식 너머의 깊은 영적 기도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방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은 믿는 자는 모두 받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셋째로, 방언은 어느 시대에 국한된 은사인가의 문제입니다. 학자들에 따라, 방언이 초기교회에서만 필요했던 은사일 뿐 현 시대에는 중단된 것으로 보는 분들도 있고, 구원의 표식으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양 견해를 모두 반대합니다. 방언은 초대교회는 물론 현대교회에서도 필요한 것이며, 그렇다고 구원의 증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방언은 분명 믿는 이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즉, 방언이란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부인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 또한 부인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끝으로, 방언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방언 은사 유무를 성도들의 우열의 증거로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방언을 하면 우수 성도, 못 하면 열등 성도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방언을 하면 구원 받은 자, 못 하면 멸망 받을 자일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반복됩니다만, 은사란 값없는 선물입니다. 받는 자의 자격의 문제가 아니며 오직 주는 자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격이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방언 은사를 받을 만한 인간 역시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격과는 절대적으로 무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랑할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쯤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조금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칼빈주의를 신봉하든 아르미니언주의를 신봉하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 주권 속에는 줄 자에게 주시고 안 줄 자에게 안 주시는 것까지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방언도 줄 자에게 주셨고 안 줄 자에게 안 주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이것이 방언을 대하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라 할 것입니다.
가장 흔한 간증 가운데 하나가 방언 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매우 흔하게 듣는 것입니다. 가수 태진아 씨의 간증이 재미있습니다. 아내의 권유를 줄기차게 뿌리치다 일이 잘 안 풀리던 어느 날, 술이 곤드레 만드레 되어 교회에 처음 나간 날, 술김에 방언 은사를 받았답니다(물론 그 이후부터 신실한 성도가 되었다 합니다). 오랫동안 믿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상당수의 성도들(저도 포함됩니다)은 잘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술주정뱅이에게는 즉각 방언 은사를 주시고, 수십 년간 봉사한 집사에게는 왜 안 주시는지 설명이 안 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측면에서 접근하는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각도를 조금 달리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옛 기억을 되살려 살펴보면, 경제학에서는 자금과 토지와 종업원과 기술 등등을 초기 자본으로 설명합니다. 이 초기 자본의 모든 요소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지만, 기업가는 결코 그 어느 한 요소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기업가는 최종 제품에 의한 이윤 창출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습니다. 최종 가치는 생산물(최종 제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기업가가 소액의 자금과 부족한 기술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훌륭한 제품을 만들었다면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평가 받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방언도 이 경제학의 원리를 원용함으로써 보다 명쾌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도/목사/지식/방언 등등, 여러 가지의 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사의 종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데, 대략 약 25 내지 30여 가지로 구분하는 것 같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31가지로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만, 사실상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이 은사이므로 은사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몇 가지가 되었든, 모든 은사들은 최초 자본과 같은 것들입니다. 각 자본(은사) 하나하나가 중요하지만, 이것(은사)이 하나님과 성도들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잘 활용하여 뭔가를 산출하는 것에서 그 존재가치를 지닐 수 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어느 성도가 목사 은사도 받지 못했고 방언 은사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통하여 주님의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여 주었다면 그 또한 성공한 성도임이 분명합니다!
은사의 한가지 종류인 방언에 대하여 지나친 기대를 한다면(방언의 가치를 필요 이상 높이 평가한다면), 이는 마치 초기 자본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쓸데없이 초기 자본에 유혹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냐 방언을 하느냐 등등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자랑하는 모습은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목삽네’ ‘나는 방언합네’ 하면서 정신없이 자랑들 해 댑니다. 성경을 빙자하여 허탄한 것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진실한 성도에게 있어서 직분이나 은사는 결단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자랑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당연히 주님입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바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갈5:22-23).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만이 성도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열매들은 자기 스스로의 입으로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입으로 자랑하면 그 순간에 그 효능이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하지만 성령의 열매들은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아무 자랑하지 않아도,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囊中之錐), 주변의 성도들이 먼저 알게 되는, 바른 믿음의 최종 제품인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인정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린 목사나 신학 교수나 장로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평신도들의 애환이기도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방언이란 결코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신앙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단지 신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최고의 가치일 수도 없고 자랑거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방언 은사를 주셔서 받았으면 감사할 일이고 받지 못했더라도 불평할 일은 아닙니다. 신실한 성도라면, 방언 은사를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겸비하며 믿음생활을 지속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은사란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질 수도 있으나(일반은사) 특정한 이들에게만 주어질 수도 있듯이(특별은사), 방언은 은사이되 일반은사가 아니라 특별은사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방언에 대한 오해에 속박되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하면서 줄입니다. 더 깊은 깨우침을 체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7) 우리 말 개역성경에는 "모두에게"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원어의 뜻을 살려 모두에게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춘다면 비록 방언이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 은사이긴 하나 그 또한 모두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사용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불을 지피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통성 기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 더 좋은 내용이라든지 등등.
11.22.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