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껍데기 예수쟁이"라고 인식하며 또 그렇게 인정하시고 그 모습이 싫다는 가시나무님이 맘에 듭니다. 그런 예수쟁이들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알찬 예수쟁이라고 착각하고 있거나 그런 척하는 껍데기 예수쟁이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가시나무님께서 자신의 그 모습을 싫어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님은 더 이상 껍데기 예수쟁이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제대로 믿고 싶노라고 도와 달라고 절규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기 원하셨을 겁니다. 그 기도는 안들어 주실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혹시라도 싶어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본인의 모든 문제가 갑자기 술술 다 풀리고, 약하던 의지력이 강해지고, 갑자기 믿음이 강해지고 경건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를 돌아 보더라도, 하나님을 만났기에 제 삶이 변화되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시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에 앞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 말씀대로 살겠노라고 작정하고 나서부터 하나님께서 절 만나주셨던 듯합니다. 참된 예수쟁이로 바뀌어 가는 것,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의 의무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머리와 마음과 감정으로, 즉 지정의를 모두 동원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로 작정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므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주시고 격려하시고 도움주시고 또 때론 채찍질 하실 겁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선 이미 가시나무님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과 영원히 동행하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그리고 님께서도 그러한 작정을 해 줄 것을 여지껏 기다리고 계셨을 겁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 남은 생 주님과 함께 가겠노라는 그 결단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선교사 한 분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쩌면 그다지도 모든 것을, 하찮다 싶은 것까지도 그때그때 챙겨주셨는가를 들으며, 전 속상해서 울었습니다. 왜 저 선교사에겐 그리도 자상하게 챙겨주시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내겐 계신 듯 안계신 듯하시냐고, 내게도 그렇게 자상하고 친근한 아버지가 되어 주십사고 울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때 제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지나가더군요, "너는 저 선교사만큼 간절히 나를 찾지도 않았으며 내게 시간을 할애하지도 않았잖니?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저 선교사와 내가 더 친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니?"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귀절이 떠오르더군요. 하나님 향한 내 마음의 분량이, 내 사랑의 분량이, 그 정도뿐이었던 것을...
그날 크게 깨달았습니다. 날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진하며 불변하며 항존하므로 전혀 문제삼을 수 없고, 단지 문제되는 것은 그 사랑을 사모하는 내 마음의 크기라는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눈물로 매달려 보십시오. 우리 인간들끼리도 누군가가 간절히 만나달라고 하면 만나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가시나무님께서 그렇게도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곧 만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에 제 맘 속에 기쁨과 감사가 넘쳐 나옵니다.
하나님과 즐거운 동행을 앞둔 님의 앞날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