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님께
가시나무님,
답글을 주셔서 반가웠습니다. 제 글을 통해 제 뒤에 계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친밀한 보살피심을 보셨다니 너무나 기쁩니다. 전 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하셨는데, 그래서 제가 간절히 소망하시면 곧 만나게 되실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리도 빨리 님을 만나 주셨군요. 제게 주신 답글 곳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임재를 경험하고 계신 가시나무 님을 봅니다.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님께선 이미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셨을 겁니다만, 님께선 어떤 이유에서이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지, 부인하고 계셨다 생각됩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만다라"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승려생활을 하다 환속하여 소설가가 된 김성동 씨의 동명의 자전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는데, 득도를 위한 수도승들의 힘겨운 노력들이 스케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 일지 스님이란 분이 있는데, 이 스님은 자기 손가락 하나를 불사르는 고통을 겪고서도 득도에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제 마음 속에, 어쩌면 저 스님들은 저마다 깨우침의 경험이 있었음에도, 그 경험을 석가모니의 경험에 견주려했기에 자신의 깨우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가는 생각이 스쳤더랬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느끼고 그 분의 살아계심도 믿고 또 은혜에 대한 감사도 있는데, 아브라함이나 사도 바울과 같은, 아니면 간증시간에 들었던 그 드라매틱한 체험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겪은 것은 일시적인 감정상태일 뿐,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듯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그렇게 드라매틱한 방법으로 우리를 찾아 오시지 않으실 겁니다. 당신을 완벽하게 계시한 성경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나, 또는 너무 너무 완고하거나 아둔하거나 전혀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에겐, 즉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그 사람에게 맞는 독특한 방법을 동원하시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제 경우 아주 포근한 사랑의 느낌이나 온 존재가 터질 것같은 충만감, 감격과 경외심, 무한한 감사 등이 동반됩니다. 하나님과의 제 개인적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불량학생 시절이었는데--당연히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싸나이다운 학생이라 여겼었습니다--몇몇 친구들과 학교 변소에서 히히덕 대며 담배를 나누어 피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훈육주임 선생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알고 보니 하필이면 그 시각에 바로 옆 칸에서 볼 일을 보고 계셨던 겁니다. 아무리 막나가는 녀석들이라 해도 옆에 다른 선생도 아닌 훈육선생님이 계신 것을 알았다면, 감히 담배를 피웠겠습니까?
제 조카가 아주 어렸을 때에, 야단맞을 짓을 할 때면 돌아서서 하더군요. 야단칠 어른을 눈 밖으로 없애버리겠다는 건데, 그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걸 그 때는 모르나 봅니다.
우리도 때때로 그러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이 계셔도 내 곁에는 안계신다 여기니까 속으로 켕기면서도 야단맞을 짓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곁에, 아니 우리 속에 와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 눈 앞에서 양 손을 흔들고 우리 귀에다 헬로 하시면서 당신의 존재를 일깨우고자 하시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린 계속 딴청 부리고 있고요.
이번 글에서도 님께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하나님께 부끄러운 모습임을 자탄하고 부끄럽게 여긴다 고백하고 계시더군요. 정도의 차이일 뿐, 그런 고백없는 신자들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고백은 당연한 것이고 더 고백할 필요조차 없다고 저는 여깁니다. 지금 당장, 또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없이 당당하게 살겠다는 것은 교만일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내가 잘나 보이고 싶은 겁니다.
예전에 제가 그랬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시작했을 때인데,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두려웠습니다. 너무 흠집 투성이었고 제대로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받아 주실 것 같았습니다. 제 육신의 아버지께서 제게 아주 엄격하셔서 제가 아주 잘 하기 전에는 좀체 절 인정해 주시지 않았더랬습니다. 전 하나님도 그러려니 여기고 하나님께 잘 보이고자 무진 애를 썼는데도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로마서 5장 8절 말씀이 눈에 크게 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보고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계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열 가지 잘했더라도 한 가지 못하면 그 한 가지 잘못으로 열 가지 잘 한 것을 덮어 버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백 가지 잘못했다 하더라도 한 가지 잘 한 그것으로 우리의 백 가지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칭찬하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여전히 하나님 만나기 두렵고 또 하나님께서 날 만나 주시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만한 순종의 삶은 살지 못하면서 영혼이 잘 되게 해달라고 삶이 풍성하게 해달라고 제 문제가 해결되게 해달라고 하는 인간적인 간사함이" 싫다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떳떳하고자 내 힘으로 해결하려 아둥바둥하는 인간적인 자존심보다 차라리 그 편을 더 좋게 보실 겁니다. 내 힘으로 무어든 다 잘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잘못을 야단치시는 분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자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한편 우리를 죄책감에 빠트리고 무력감과 자괴감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우리를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속지 마세요, 님께선 이미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못하는 것 자신에게 없는 것, 자신의 잘못만을 보지 마시고, 자신이 잘 하는 것, 자신에게 있는 것, 자신이 잘 한 것을 보고 그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다 보면, 점점 스스로 보기에도 흡족한 인물로 바뀌어 가게 될 겁니다. 감사와 기쁨, 그리고 도전감으로 충만한 생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