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화
황우석 교수의 인간 줄기세포 란 개념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수 여성들이 기증한 난자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수정되기 전의 난자는 생명으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먼저 있을 것이며, 그 난자를 갖고 어떻게 어떤 식으로 줄기세포를 만들었다고 하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복제양 돌리의 기사에 가보면, 당시 실험과정이 소상하게 나오지만, 이번 황교수의 인간줄기세포의 건은 상세하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 짐작컨대 - 알려지면 논란이 심해질 우력 있으므로 일부러 언론에서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복제양 돌리가 복제된 과정은 이렇습니다. 암양의 난자, 수정되기 전의 난자에다가 다른 양의 체세포의 핵을 수정시키는 방법입니다. 그리하여 수정된 그 난자를 다른 어미양의 자궁에 착상시켜 복제양이 탄생된 것입니다.
불길하게도, 황교수의 인간 줄기세포가 바로 이 복제양 돌리의 과정과 같은 것으로 - 제가 잘못 아는 지 모르지만, - 보입니다. 여성들이 난자를 기증하였으며, 환자들의 특정 신체 부위의 체세포의 핵을 거기에 수정시켰고 그것을 배양했습니다. 어디서 배양했는가 의 문제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보입니다.
복제양 돌리가 탄생한 어미양의 자궁이 다른 의미로 수정된 세포의 배양기 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월경 중의 여성은 불결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비슷한 성경내용들을 갖고 기독교 신앙이 극히 불합리 한 것으로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허나, 이 문제에 대해 유태인이자 저명칼럼니스트인 데니스 프라거 씨는 골수와 골수 사이를 가르는 설명을 내립니다. 죽음의 문화
기독교는 철저히 삶의 문화, 생명의 문화 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극도로 불합리해 보이는 제사격식, 제사장의 자격, 시체 멀리하기, 정결과 불결의 구분, 정결의식, 속죄의 문제, 나아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에 대한 완전한 죽임 의 명령 들이 바로 그들이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이며 죽음의 문화에 속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월경 상태의 여성이 구약성경에서 불결한 상태인 것으로 구분되었다는 것은 월경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데니스 프라거 씨는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의학이 발달한 후로, 월경은 수정이 되지 않아 저절로 죽어버린 난자 와 그 부산물임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황우석 교수는 그런 죽어버린 난자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난자를 그의 실험에 사용하였습니다. 아울러, 핵의 수정을 위해 죽은 체세포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세포를 사용하였습니다. 살아있는 난자와 살아있는 체세포가 결합. 수정하여 태어난 것의 첫 시작이 얼마 못 살고 이른 노화현상으로 죽어버린 복제양 돌리였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제 여러분은 여성들이 기증한 살아있는 난자 ( 불임부부에게 인공수정의 가능성을 줄 수 있는 ) 가 아무리 환자의 체세포라 할 지라도 아뭏든 살아있는 체세포의 핵과 결합, 수정상태가 된 것이 그것을 그대로 다른 여성의 자궁에 이식하면 복제양 돌리 처럼 복제인간까지도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보도에서 말하는 황교수가 만들었다는 줄기세포(embryo) 는 수정되고 8주 내의 상태의 세포, 즉 어떤 장기로든 - 그러나 더 정확히 설명하면 그 성장을 계속 유지시키면 완전한 생명체가 복제양 처럼 충분히 될 수 있는 , 즉, 전체적 개체로 발전이 되는 - 발전할 수 있는 수정란의 세포를 말한다고 보입니다.
최근 저는 끔찍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낳은 현대 비극을 알리는 9평공산당 이란 블로그에서 입니다. 중국인들이 일 자식 낳기가 법으로 강제된 이후 중국 전역에 낙태, 태반의 유출이 극심하다 못해, 낙태아를 먹는 식문화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중국에 찾아가 그런 음식을 찾아 다니는 미친 한국인들이 등장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알리고 싶지 않지만, 인간의 참혹함이 어디에 이르렀나 를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서 난자를 사용하고 체세포로 수정된 수정란을 사용한다는 것은 끔찍한 비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고통은 덜겠지만, 그것은 전체인간이 되어야 할 수정란을 인위적으로 네모난 상자에 넣어 원하는 부위만 촉진제로 키운 후 그 부위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살해하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또, 아직 안 자랐다고 하여, 그것(수정란)에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들 역시 아직 자라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들의 다 자란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는 상태이지만, 엄마와 아빠들은 그 보이지 않는 가능성 때문에 기뻐하고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황교수의 인간체세포 복제의 기술이란 다른 말로 하면, 인간복제 와 같은 것입니다. 어느 장기는 자라게 하고 나머지 장기와 두뇌는 자라지 못하고 도태되게 만든다 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노예들에게서 필요한 장기만 추출하고 죽이는 것이나 거시적으로 볼 때는 같은 차원이라 보입니다.
환자들은 여성의 난자를 구입하려 줄을 설 것이고, 여성들은 그들의 난자가 미래의 어떤 가능성이 있는 난자임에도, 때로는 동정심으로 때로는 돈 때문에 그 난자의 가능성을 중단시킬 것입니다. 누군가의 장기를 위해 그들의 -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전체 인간으로 자라야 하는 소명이 있는 난자임에도 - 난자를 제공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치료의 수단을 위해 인위적으로 이용.착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을 착취하는 산업이 의학이란 이름을 걸고 발전할 찰라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과 미국이 반대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반대할 수 뿐이 없습니다. 인간이란 존재의 그 무거움과 의미 깊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
심지어는 제공된 여성의 난자에 수정시킨 자기의 복제세포를 인위적으로 대리모의 자궁에 착상시키기만 한다면, 자신과 닮은 똑같은 복제인간이 나올 수가 충분히 - 복제양 돌리를 볼 때 - 있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며, 하나님이 예수가 되어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이유는 인간이 세상에 유일무이하게 다르며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복제짐승과 복제인간은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이며 그들의 자아실현의 의무가 주어진 세상에 다시 없는 존귀한 존재이고 여야 합니다.
개별의 존귀한 전체인간으로 될 가능성을 잠재한 살아있는 난자들이 자연적으로 주기적 월경상태가 되어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상태로 실험에 쓰이기 위해 추출되고 실험에 실패되면 거반 수정된 채로 많은 양이( 많은 개체들, 많은 인간생명체들이) 쓰레기로 폐기될 것입니다. 죽은 태아를 먹을 수도 있는 인간이, 무슨 더 상상 못할 일인들 못 저지르겠는가 ? 란 측면에서 인간복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본래 착하고 선하다 모두가 다 선하다 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인간을 믿고 아무 실험이든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로지 말하기를 인간은 악하고 모두가 악하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 惡이란 것은, 마음만 내키면, 생각만 닿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種이라는 것입니다.
황교수는 그의 실험의 의미를 알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그 줄기세포를 어미의 자궁에만 이식시키지 않으면 안심이다 라고 그가 여기는 것이라면 참으로 위험한 인물이고 섬짓하기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란 의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 어디까지 가서 멈출 것인가 ? 인간에게는 스스로 멈추는 법이란 거의 없으니, 황교수가 시작한 이 복제인간실험은 악한 살인마를 복제하는 데 까지도 갈 수 있고, 성관계 상대로의 미모의 여자를 대량 복제하여 상품화하는 데까지 발전할 수도 있고, 생체실험용으로만 쓰일 복제인간 (두뇌와 얼굴만 없어도 실험은 가능하니 )을 대량 제조하는 데까지 발전할 수도 있고, 다른 장기는 성장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오로지 간만 커지게 (요리용으로 과다하게 키우는 오리간처럼) 할 수도 있고, 나아가 난자만을 만들어 내는 자궁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극도로 증오하는 문화는 바로 [죽음의 문화], 즉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문화 입니다. 난자란 생명을 극히 가볍게 여기는 문화 역시 그런 죽음의 문화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대한민국의 윤리적 수준이 참으로 심각한 데까지 총체적으로 들어와 있음을 봅니다.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고찰로써 이 문제에 대해 저항해야 합니다.
2005. 5. 23. 한은경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