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글을 반박하려면 그 본문도 실어야지요.
다음은 '예수는 없다'의 처음 '그런 예수는 없다'와 '과연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의 본문입니다.
그런 예수는 없다.
지난 4월 영국 BBC 방송국에서는 예루살렘 부근에서 발견된 1세기 팔레스타인사람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최근의 법의학적 지식과 컴퓨터 기술을 동원하여 역사적 예수에 가까운 얼굴 모습을 합성 발표한 일이 있다. 뭉뚝한 코에 까만 곱슬머리, 짙은 갈색의 피부를 한 전형적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그런 예수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기독교를 서양사람들만 신봉할 당시에는 예수를 파란 눈에 금발을 한 서양사람, 특히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사람으로 그리는 것이 결코 이상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도 그런 그림에 익숙해져서 ‘예수’ 하면 당연히 그런 남자 상을 머리에 그리게된다. 우리 스스로도 혹시 누가 예수는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었을 것이라 한다면 우선 무의식적으로라도 강한 거부감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신 예수는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스칸디나비아사람일 수가 없다. 파란 눈에 금발머리를 가진 예수, 그런 예수는 없다.
이제 새로운 지구촌 정보화 시대에 이렇게 어느 특수한 지역, 특수한 시대에 만들어진 일방적인 예수상(像)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지니고 있을 수는 없다. 바이블스토리 여기 저기에 스칸디나비아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오는 파란눈, 금발 머리의 예수를 참 예수와 동일시하던 그 순진성에 의문을 던져보는 것, 이것이 죄가 될 필요도 없고 이것이 교회 사랑이나 예수 사랑과 관계되는 일도 아니다. 특히 동양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를 구태여 서양사람으로 상상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 나름대로 새로운 예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림에 그려진 예수상만 그런가? 생각이나 이론에 그려진 예수상은 어떤가? 이것도 마찬가지임에 틀림이 없다. 현재 서구 신학계 자체에서도 종래까지 구미의(Euro-Amencan) ‘힘의 논리’에 입각해서 형성된 기독론이 너무나 일방적으로 권력 지향적이었음을 반성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새롭게 그려야 할 진정한 예수 상은 어떤 것일까? 그 예수가 가르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한 두 사람이 머리를 짜서 정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궁극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내 자신의 실존적 물음과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나오는 정직한 대답이 요청되는 문제라 할 것이다. 이런 심각한 실존적 물음을 거치지 않은 예수,
그런 예수는 없다.
과연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oclesiam nulla salus)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제2바티칸 공회의에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한 다음부터 정말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과연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하는 자성(自省)의 소리가 교회 안팍으로 의식 있는 사람 사이에서 크게 논의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과연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그대로 구원을 얻게 되는가 하는 물음이 심각한 현안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뜻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앙을, 제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여온 화엄사상, 선사상, 신유학, 노장철학과 함께 놓고 끊임없이 내면적 대화를 한 결과에서 얻어진 통찰의 편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러 부끄러울 정도로 천박한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자인합니다만 저로서는 저의 이런 특수한 입장에서 얻은 것을 정성을 다해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저는 목사도, 어느 특정 종교의 지도자도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을 에베레스트 산꼭대기로 직접 모셔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그 산꼭대기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일도 없고, 또 다른 분이 반드시 그 산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보증할 처지도 못됩니다. 다만 저는 한 평생 오로지 비교종교학만 전공한 사람으로서, 깨어있는 시간 거의 전부를 동서양의 종교사상에 대해 읽고 생각하고 쓰고 가르쳐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발표한 논문도 “화엄 사상에 미친 도가 사상의 영향”(영문)입니다. 이런 특수한 학문적 배경 때문에, 그간 역사적으로 산꼭대기에 오른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연구할 기회가 있었고, 이에 따라 산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이 이런 저런 코스로 오르더라, 그들이 준비한 장비는 이렇더라, 잠옷 바람에 슬리퍼나 끌고 나서는 사람은 없더라, 올라 갔다온 사람들은 이런 저런 경험담을 말하더라 하는 등의 말씀을 드릴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 할 수 있는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그가 죽기 전 자기에게 시간만 좀더 있으면 그의 조직신학을 세계 종교사의 시각에서 다시 써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역시 20세기 최대의 사상가 중 하나로 꼽히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도 예수 탄생 때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가져다 준 것처럼, 2,000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가 활기를 되찾으려면 새롭게 동방에서 선물이 와야 할 것이라 하고, 그 선물은 바로 동양의 종교적․정신적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도 이제 혼자서 활개치며 스스로 만족하던 시대가 지났습니다. 이른바 자기 것만 진리라고 주장하던 ‘종교적 제국주의’ 시대가 지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이런 입장, 이런 문맥에서 이야기해도 되느냐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신학자들 스스로 “이웃 종교와의 관계에서 고려되지 않은 신학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 뒷마당이나 파보고 지구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큰소리치는 지질학자는 그렇게 믿을 만한 지질학자가 못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기독교 신학은 이웃 종교와의 대화관계에서 나온 산물”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신학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모두 기독교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국지주의적 신학’(parochial theology)이나 ‘부족신관’(tribal god)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입니다.
1997년 말 이곳 캐나다 최대의 개신교 교단인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 총회장으로 새로 선출된 빌 핍스(Bill Phipps)라는 분이 기자 회견을 가졌는데, 거기에서 자기는 예수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캐나다 극보수파 기독교인과 특히 한국 교포 기독교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충격은 현재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새로운 바람이나 물결에 어떻게 대처하며 어느 정도로 변모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신앙적으로 계속 성장하기를 멈춘 사람에게는 어찌면 당연한 것이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개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의 일'이란 ’유치한 것들‘이란 뜻입니다. 믿음이라고 하여 모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유치하고 치졸한 믿음, 쓸데없이 우리를 속박하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성숙하고 건전한 믿음, 우리를 신나게 하고 자유스럽게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유치하고 치졸한 것을 뒤로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공자님도 “내가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삼십에 일어서고, 사십에 흔들림이 없어지고,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육십에하늘의 뜻을 쉽게 따를 수 있게 되고, 칠십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올바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論語2:4)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장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이제 기독교 신앙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형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구조조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패러다임 천이(遷移), 혹은 구조조정이 이미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매년 미국에서 종교를 전공하는 학자가 8천여 명씩 모이는 미국 종교학회(AAR/SBI)라 같은 데 가보면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 같은 것은 그들이 받아들이든 않든 하나의 상식에 속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형편인데도 종래까지의 신념체계(belief system)를 마치 금판에 아로새겨진 만고불변의 진리 그 자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한, 안타깝게도 그것은 새로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거의 무의미한 구시대의 유물로 퇴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 내용이나 전통이 이렇게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더욱 깊이 이해되고 더욱 뜻있게 해석될 때 그것은 우리를 살리는 믿음, 우리를 신나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러한 종교적 주제와 학자들 사이에서의 논의를 보통 사람의 말로 -최대한 비근한 예와 비유, 토속적인 용어로 옮겨 소개함으로써 일반인도 최근의 신학적 논점에 쉽게, 그러나 깊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500년 전 마틴 루터가 나와서 모든 사람이 하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만민 제사장직’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저는 지금 같은 시대에 우리 일반인도 다 신학에 어느 정도 조예를 가져야 하고 또 가질 수 있다는 ‘만민 신학자직’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중세 시대 어려운 신학적 문제는 오로지 신부들 사이에서 라틴말로만 논의되고, 거의 모두가 문맹이었던 일반인에게는 그저 그림책 정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는 ‘그림책 신학’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오늘 일반인의 지식이나 의식 수준이 그 때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반인도 스스로 더욱 깊이 생각하고 더욱 철저하게 성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책은 이런 일을 위한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에게 있어 어느 학술지에 발표하는 글보다 더욱 큰 뜻을 가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마음은 기독교 배경 속에서 자란 제가 기독교에 대해 지니고 있는 깊은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님의 손을 잡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저는 기독교의 깊은 뜻이 무엇일까 하는 제 개인의 실존적 관심에서 한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처음 종교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 같습니다만 한국에서는 기독교 사상에 전념하고 서양에 와서는 동양종교 사상에 몰두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에서 바울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교수님 밑에서 희랍어를 배워 성서를 원어로 읽는 일, 로마에서 가톨릭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교수 밑에서 라틴어를 배워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를 원어로 읽는 일, 그 외 여러 교수님들 밑에서 영어나 독일어로 칸트, 하이데거, 틸리히 등의 서양 신학사상이나 서양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주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곳 캐나다에 와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산스크리트어를 다시 배우고 한문 읽기를 다시 다듬어 바가바드기타, 베단타 철학, 불교의 중관론, 화엄과 선사상, 노장사상에 대한 강의를 듣고 또 제 스스로 천착하면서 때때로 일종의 지적 황홀감에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에 제가 살아오고 공부한 기독교의 의미도 완전히 새롭게 부각되어 옴을 발견했습니다. “아, 종교라는 것은 결국 ‘체험’의 문제로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불교의 화엄사상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도, 그 후 선이나 노장 사상에 심취되면서도, 종교학 교수로서 북미 강단에 서기만도 이미 25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도 개인적으로 제 속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기독교와 여러 종교 사상간의 내면적 대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각성도 없고 검토도 없는 믿음은 헛된 믿음일 수도 있고, 많은 경우 우리의 짧은 인생을 낭비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여러 가지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진리 자체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앙 생활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버려도 되는 것이나 버려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21세기를 시작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고민하는 신앙인으로서,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하나씩 점검하고 함께 두들겨 보았으면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드리는 말씀 중 혹시 얼른 보셔서 너무 비판적이거나 공격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느 특정 개인이나 교파를 비판하거나 공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에의 탐구가 좀 더 튼튼한 기반 위에 세워짐으로써 우리가 더욱 훌륭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하는 한 가지 염원이 그 밑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최종적인 판단은 언제나 여러분 각자의 몫이란 점도 분명히 밝힙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2001년 5월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에서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