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1:21-26) 함부로 천국을 소망하지 말라. 

구원 완성 담화 (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1:21-26)

 

 

세상 모든 종교는 죽은 후에 이 땅에서의 공적을 심사하는 행위 구원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구원을 스스로 쟁취하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해야 합니다. 유일하게 정통 개신교만 신자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해서 구원이 이뤄집니다. 당신께서 택한 자에게 성령이 간섭하여 예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사랑을 순전히 믿게 하여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어도 현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현세대는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하고 기술적으로 최고로 편리해졌기에 가장 행복해야 함에도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절대자와 영원한 진리가 부인됨으로써 인생의 지표가 사라졌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절대적 선이 없어졌기에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죄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문명 발달의 속도와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면 경쟁에 낙오되니까 빈부 간의 격차는 더 커졌습니다. 최근에는 펜데믹과 핵전쟁과 기후 온난화로 인류가 공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와 온 세계인이 불안과 우울에 빠져 있습니다. 

 

종말을 향해 타락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기에 신자라면 주님이 어서 다시 오시길 소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리 세상에 기대할 것이 없어도 신자가 자살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피할 수 없는 현실 문제들에 코가 뀌어서 영적 충만은 뒷전이고 마치 마지못해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것 같습니다. 신앙이 삶에서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까 또다시 천국을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자신은 철저히 무력한데다 하나님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본문은 너무나 척박한 현실 상황과 자신의 믿음을 특별히 천국에 대한 소망을 어떻게 조화시켜나가야 하는지에 관해 정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관

 

바울은 먼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의 선언입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이 땅에 계시지 않는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도라서 믿음을 과시하려는 종교적 공치사가 결코 아닙니다. 현재형과 능동태 형식이라 주님이 지금 분명히 자신 안에서 자기와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실제로 바울과 함께하고 있는 분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또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자기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 실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회심 이후로 그의 인생의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것 하나로 바뀐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눈멀게 만들었던 그 찬란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은혜로웠기에 여전히 흑암의 세력에 미혹되어 영적인 장님 아니 시체가 되어 있는 불신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고백한 그대로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정상적 인간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치명적 병에 걸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극심할 때뿐입니다. “죽는 것도”라고 했으니 자신의 소원이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결정하실 여러 방안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어도 좋다고 평소 생각했으므로 하나님이 순교로 이끌더라도 담담히 아니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죽음이라면 신자에겐 반드시 유익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저작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매임이 온 시위대 안에 나타났다고 말했듯이(빌1:13) 로마의 옥중에 갇혀서 이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정확한 때는 모르지만 사도행전 28장에 기록된 로마의 자택에 연금된 상태가 말기에 이른 AD62-63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라고 말한 것입니다. 전제는 구약 제사에 짐승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것을 말하는데 자기 자신을 전제로 바친다고 했기에 실제로 처형당할 수 있다는 것까지 각오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 일을 기뻐했고 빌립보 교인더러도 함께 기뻐하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그런 와중에도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1:14)고 말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시위대 군인들과 로마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로마의 신자들도 그런 바울의 모습을 보고 더 힘을 얻어서 복음을 담대히 전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는 오직 예수로 인해 살고 예수로 인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해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담대히 그리스도가 내게 살고 있으며 그분을 위해 죽는다면 큰 영광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기에 자신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했는데 자신이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남아서 사역을 계속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것을 택할지 잘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즉, 계속해서 살아서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맺혀주는 열매로 그분의 뜻이라면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의 영적인 딜레마

 

바울은 지금 자신의 영적 상황이 빨리 천국 가고 싶은 것과 남아서 사역을 계속하는 것 사이에 끼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순교 될 가능성이 컸기에 옥 중에서도 줄곧 고민하고 있던 자기 생각을 그대로 토로한 것입니다. 아무 장애나 핍박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오늘날의 한국이나 미국의 신자가 단순히 세상 풍조와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막연히 천국을 소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바울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이 땅을 떠나 어서 빨리 그리스도를 만나러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라고 합니다. 이는 원어 상 비교급이 아니라 최상급 best라는 의미입니다. 어서 빨리 절실하게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그동안 바친 수고와 겪은 엄청난 고난이 그 첫째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의 입으로 스스로 밝힌 내용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우리가 그처럼 여러 번 죽을 뻔했다면 진작에 선교 사역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는데 유대인들에게 맞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매는 한 번이라도 잘못되면 자칫 목숨도 잃을 수 있습니다. 사역 말기에 네로 황제로부터 박해받기 전까지는 주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받았고 심지어 그를 암살하려고 40명이나 결사대로 자원했습니다. 한때는 자기 친구요 동료였던 자들로부터 원수 같은 취급을 받았으니까 정신적 상처 또한 엄청나게 컸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 달리 언제든 천국 가고 싶다는 말을 할만한 충분한 자격이 되며 하나님도 어서 빨리 그렇게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로선 이 땅의 고난과 죄악에서 풀려나고 특별히 그가 괴로워했던 불치병의 고통도 없어지고 마음의 상처도 깨끗이 씻어집니다. 나아가 수시로 죄에 넘어져 자신을 곤혹하게 만드는 가난한 심령에서도 벗어나서 천국에 가면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이 최고 좋다는 것이 단순히 현실 고난을 피하려는 때문이 아니라 바울은 정말로 더 좋은 것을 얻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계속 짓누르는 큰 짐이 있었습니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23절)라고 부정적 의미를 지닌 조건절로 표현했습니다. 천국 가는 일이 훨씬 좋은 것이고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진짜 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모든 신자에게 최고로 좋은 곳이지만 자기에겐 천국 가는 것이 자기에게 최고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따르지 않아야 할 충분한 근거가, 정확하게는 천국 가는 것보다 더 강렬한 소원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진짜 고민

 

바울이 자기가 겪은 수많은 고난을 열거한 후에 결론으로 어떻게 말했습니까?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자신이 각지에 세운 교회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당한 육체적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도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이 땅에 남아서 사역을 더 계속하기로 자기 마음을 굳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육신을 예수 믿기 전의 인간적 본성(flesh)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으나 본문에서만 육체(body) 즉, 생명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순교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은데 순전히 너희 즉, 빌립보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러겠다고 합니다. 

 

불신자 전도보다 이미 믿은 안에 세워진 교회와 신자들을 위하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알다시피 세 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으로 지중해 인근 지역 곳곳에 많은 교회를 개척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같이 성도들 간에 분파, 소송, 불륜 등의 내부적인 문제가 많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거기다 유대주의자나 영지주의자 같은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서서히 침투해서 영적으로 어지럽혔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에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가르쳐 든든한 믿음 위에 다시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서신의 수신자인 빌립보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류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선교 여행을 갈 때마다 가장 먼저 유대인 회당부터 들러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에 여호와가 보내주기로 약속한 메시아가 예수라고 선포하면서 십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에선 유대 회당이 없어서 강가에서 비단 직물 장사 이방 여인 루디아를 만나 전도했습니다. 그 후에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더니 이익이 끊기게 된 주인의 모함으로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밤중에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켜서 바울 일행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어지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본 간수가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습니다.(행16장) 이제 갓 믿은 이방 여인 다비다와 로마 간수가 주축이 되어서 세운 이방인 중심의 빌립보 교회니까 더더욱 순전한 복음 위에 바로 세워야 하겠다고 로마에 갇혀 있는 내내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알다시피 당시의 땅끝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까지 가서 선교하고 싶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지금 로마에 발이 묶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새로운 지역에 교회도 더 세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갑갑하게 여겼겠습니까? 결국 그는  이미 세워진 교회도 염려했지만 예수님이 처음 자기에게 맡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소명의 실현에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고 40명의 결사대가 암살하려고 노리고 있으니 매 순간이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실제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자는 다른 것들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라는 고백이 절대 빈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은 것만으로 인생의 모든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비유이긴 해도 그 외에는 전부 배설물이라고 했으니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초기에는 선교 사역을 위해서 열심히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각지에 세운 교회들에서 보내주는 헌금이 점점 늘어나자 전적으로 선교 사역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는 선교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예컨대 자신이 얼마나 풍요롭고 안락하게 사느냐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소원 

 

말하자면 보통 사람은 평생 겪어보지 못할 죽을 뻔한 그 수많은 위기도 그에겐 사실상 배설물밖에 안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크게 고통스러웠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가 인생에서 달성할 목표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더더욱 살아서 자신의 소명에 헌신 충성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이자 유일한 생명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완악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음을 자신이 이전에 유대주의자였을 때를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성령의 인도 받는 삶이 얼마나 충만하고 은혜로운지 체험적으로 깨달았으니까 아무리 저들이 반대 대적 핍박해도 반드시 그들로 이 생명의 복음을 알게 해주어야겠다는 소원이 더 간절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은 물론이고 복음 전파 사역은 더더욱 의미 있고 영광스럽기에 천국 가는 것보다는 이 땅에 더 남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처럼 도덕적으로 조금 선해져야겠다든지 또는 힘든 문제를 기도해서 해결 받는 정도의 신앙으로는 바울처럼 목숨까지 걸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과 신자들을 핍박했던 잘못을 갚으려고, 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다시 그를 벌 줄까 두려워서 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의무적으로 행하는 것은 반드시 지치기 마련이고 어느샌가 자신이 행한 바에 대한 삯을 요구합니다. 나아가 자신이 행한 잘못과 받은 벌을 비교해서 어느 정도 보상이 되었다고 여겨지면 그만두거나 조금 게을리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겪은 고난을 보십시오. 그에겐 정말로 목숨을 그것도 여러 번 걸 만큼 절대적 가치가 있는 일이었고 나아가 그런 고통 가운데도 충만한 기쁨을 느꼈기에 가능했던 수고와 희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이 원어의 어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득불 할 일이라고 해서 마치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하는 것처럼 여겨지나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라고 절감하기에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이 닥칠 줄 알아도 자신의 소명이자 인생의 목표이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화의 원어 ‘우아이’는 사실은 큰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한탄한다는 것이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벌을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담대한 선언을 보십시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흔히들 이 말씀을 13절 한 절만 떼내어서 하나님이 능력 주시면 자신이 무슨 일이든 즉, 일류대학 입학이든 큰 사업을 성공할 수 있다고 적용하는데 너무나 어이없는 해석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들이 더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적극적 사고와 그 실천이라는 인본주의 철학 아니 인생 처세술 정도로 격하시키는 큰 잘못입니다. 

 

분명히 그 앞에 궁핍에 처하는 일도 말하고 있으니 본문의 문자적인 뜻부터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무엇보다 바울 개인의 고백인데 그가 예수를 믿은 후에 현실에서 출세 형통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지 않습니까? 바울이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는데 왜 오늘날 신자들이 자기 편리한 대로 곡해해서 적용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자기가 저작하는 잘못이자 하나님을 대신하는 엄청난 죄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은 후로는 사나 죽으나 오직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기로 결단하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리스도가 내게 함께 사니까 궁핍이나 부요 같은 현실적 요건으로 인해서 아무 장애 요소가 되지 않더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겪는 풍요나 궁핍이나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잘할 수 있는 여건으로 허락하신 것이라 복음 전파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유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를 들어 사용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므로 자기가 그분의 일에 순전한 믿음으로 헌신하면 어떤 외부적 장애가 있어도 그분이 모든 일을 다 이뤄주셨다고 자신의 선교 사역에서 일상적으로 체험했던 은혜를 고백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복음을 전파하는데 죽음도 장애가 될 수 없으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순교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뜻도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이처럼 바울이 자기가 저작한 서신서들에서 고백한 내용들 전부가 예수로 시작해 예수로 끝납니다. 현실적 형통을 고무 격려하는 의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그렇게 살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본문에서 자기에게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고 담대히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의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람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더 살아남기로 결단한 구체적인 이유 즉,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염려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 때문이라고 합니다.(25절) 단순히 교회 생활 성실히 하여 성경에 대한 지식도 늘어나고 기도 열심히 하여서 현실 고난을 이겨내는 그런 정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교회가 일심이 되어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라고 했습니다.(27절) 혼자서 집에서 자신을 성찰 성숙시키려고만 하지 말고 성도들이 힘을 합쳐서 땅끝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고 그 후로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함으로써 신자 개인에 대한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럼 신자로선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 신분과 영원한 운명에 대해선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도 소망할 필요 없이 이미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는 당연히 다른 이에게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어서 천국을 소지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모든 다른 종교와 달리 죽기 전에 이 땅에서 이뤄지는 이유입니다. 

 

연합하라는 의미가 바로 집에 혼자 있지 말고 밖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처럼 고달픈 현실과 천국 가고 싶다는 소망 사이에 끼어있다면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그러다 보면 고난도 자기처럼 필연적으로 더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그리고 그런 고난이 바로 너희에게 유익이라는 것인데 주님도 그래서 천국을 침노해서 차지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진보되면서 기쁨까지 생기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과장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과 동일한데 그분의 삶이 천국을 침노하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진보에서 진보는 군대 용어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퇴역군인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였는데 이 서신을 읽게 될 그런 성도들을 위해서 군대 용어와 표현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진보는 군대가 오직 한 가지 목표 지점인 적군을 향해서 어떤 극렬한 저항이 있어도 후퇴 없이 앞으로 진군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자기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 후에도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4)라고 칭찬해준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사업을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 바로 신자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신자가 가져야 할 소원

 

이 세대의 신자로선 바울 같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천국을 어서 가든지 주님이 어서 오시든지 하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천국에 빨리 가려면 빨리 죽어야 하는데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어서 다시 오시려면 그 전에 적그리스도로 인한 대환난이 있을 것인데 이 또한 너무 두려워서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함부로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선 안 될 것입니다. 자칫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위선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죄악이 너무 꼴 보기 싫어서 그렇다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신자 된 의미를 완전히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불신자처럼 인생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세상이 한 번 완전히 뒤집어지든지 내가 빨리 죽든지 하면 좋겠다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순진한 고백입니다. 신자가 바울처럼 예수님만이 인생의 목적이자 삶의 방식이 되어서 실제로 온갖 환난 가운데도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다면 빨리 천국 가고 싶다는 소월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천국 소망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 선한 것이지만 자칫 주님을 대면했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종말로 치달을수록 주변의 미혹된 영혼들의 궁극적 운명이 너무 안타까워서 간절히 십자가로 초대하고 싶어야 합니다. 그럼 주님의 재림에는 관심이 가지 않고 오히려 더 미뤄졌으면 하는 소원이 생기면서 불신 이웃의 유익을 위해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이 자기 생명까지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부터 자기와 함께 살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지금 당장 죽어도 주님의 품 안에서 눈을 뜬다는 확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을 때 천국이 이미 땅에 완전히 도래했음을 알았고 그 후로 천국 백성으로 매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더러도 자기처럼 그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해주고 싶으니까 남아있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마다 강단마다 인간적 감동을 주는 설교와 가르침은 많으나 바울 같은 원색적 복음을,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를, 생생히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곳은 점점 줄다가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니 기독교도 교회도 성도도 세상을 이길 힘을 잃고 있고 개인적인 고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천국 시민이 이미 완전히 되어서 천국까지 완전히 소지했다는 인식이 없으니까 그 시민으로 의무와 책임을 다할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 믿어서 천국 시민이 되었다는 교리만 알고서 그 시민권자가 누리는 혜택과 보상만 자꾸 요구합니다. 

 

바울처럼 예수로 인해 살고 또 예수로 인해 죽어야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신자라면 모두가 마땅히 아니 기꺼이 행해야 할 바입니다. 오늘날은 핍박이 없으니 훨씬 더 쉽게 더 기뻐하며 더 열심히 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종말로 치닫는 이유가 현대 교회와 신자가 바울에 비해 너무 잘못하고 있고 신자로서 꼭 행해야 할 바도 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천국 가고 싶다고 한탄만 하면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바로 천국으로 이끌지 않고 이 땅에 남겨 두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그리스도 참 생명의 냄새를 풍기라는 것입니다. 현실적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염려는 전혀 없으니 안심하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지켜주든지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려가 주든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의 고백대로 둘 중 어느 쪽이 되었든 신자에겐 다 유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선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신자를 이 땅에 남겨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신자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끝날까지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간이 갖는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염려마저 완전히 해결되었기에 구원은 완성된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 된다는 의미도 죽음에서마저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삶에서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매일을 죽음 앞에서 살고 있습니까?

 

(12/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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