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기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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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기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2)


맹세는 악한 것(?)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게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37)  

산상수훈에는 “옛 사람에게 ~~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동안 바리새인 혹은 서기관들이 구약의 규정이나 장로의 유전을 가르친 것과는 달리 주님이 새롭게 혹은 확대해서 해석 적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껏 맹세를 신중히 하되 꼭 지키라고 배웠지만, 이제부턴 맹세는 악한 것이니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몰랐거나 선한 의도로 하나님께 서약했다면 마땅히 지켜야 합니다. 구약의 계명과 그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한 서약은 물론 인간끼리의 약속도 꼭 지켜야합니다.

문제는 맹세란 모든 주변 상황이 틀림없이 자신이 약속한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미리 전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만사는 절대적이고도 완전하게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인간 쪽에선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너희는 머리 터럭 하나도 희게 혹은 검게 할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전에 약속, 계획, 추측, 기대, 상상한 대로 전개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대신 차지하는 것이며 또 그러니까 악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들어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3-16)

야고보 사도도 마찬가지 말씀을 합니다. 어떤 도시에 가서 새로운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고 큰소리 친 것입니다. 장래 일을 스스로 미리 확정했습니다. 특별히 “일 년 안에 이익을 낼 것”이라고 구체적인 시기는 물론 그 결산까지 단정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아래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에 불과한 인간은 절대로 자신의 미래사를 스스로 결정, 주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계획을 세워 시행해 나가되 모든 세밀한 부분에까지 주님의 간섭과 인도를 소망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 그 인도가 어떻게 되더라도 순종하겠다는 믿음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가능한 피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이면 기꺼이 지겠다고 밤새 기도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은 ‘예’나 ‘아니요’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주의 뜻이면 이것저것을 하겠다고만 말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응만 하면 되지 자신의 현실적 실력을 과신하여 함부로 인간적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의 서원도 엄밀히 따지면 인간이 장래 일을 미리 예단(豫斷)한 것입니다. 대학 합격 여부는 물론 하나님이 주관한 것입니다. 문제는 정확히 일 년 후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다시 기도원에 오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부분입니다. 그날 한 자리에 모이기 정말로 힘든 친척들이 모이는 바람에 가지 못했지  않습니까? 설령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혹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기도원 가는 길이 막힐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그 기도원이 문을 닫거나 정작 질문자 본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 가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신자가 스스로 소망하고 계획하여서 그 걸음을 인도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이뤄지는 결과와 시기와 방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자기 뜻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결과가 나올 수 있기에 실현되는 시기와 방식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예 그 뜻을 중도에 포기케 만들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질문자님으로선 그런 서원을 하기보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원으로 기도하고 그쳤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소원이 강하다보니 스스로 서원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더러 꼭 합격시켜주면 내 나름대로 최선의 것을 다시 바치겠다는 심정이 작용하여 맹세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예수님은 맹세는 악하다고 금한 것입니다. 그 깊은 속내에 하나님과 거래 내지 흥정하여 뭔가 얻어내려는 계산이 아주 조금이라도 깔려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고3 올라갈 때에 처음 드리는 기도로는 “제가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여건과 지혜들을 허락하시고, 힘들 때 다시 세워주시고, 제 노력한 그대로 거둘 수 있게 해주시고, 장래에 어떤 전공을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또 입시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주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겠습니다.”는 내용이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주님이 신자더러 ‘예’ 혹은 ‘아니요’라고만 말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서원과 언약과 명령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절제, 훈련, 실행하는 기준이 아주 모호한 것 같습니다. 정작 중요하고도 꼭 실천해야하는 측면은 등한시 하고 그렇지 않은 사소한 일에 고집스럽게 매달린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서원의 문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자가 꼭 실천해야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의 율법이나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산상수훈 같이 명시적으로 어떻게 살라는 계명과 가르침에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율법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문자적으로보다는 그 의미와 목적부터 제대로 실현시켜야 합니다.

사도들의 서신서에도 그런 가르침이 많습니다. 또 명시적이진 않아도 신구약 전체를 연결해 살피면 신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할 지에 관한 일관된 원리가 도출됩니다. 신자는 현실적 삶에서 어떤 선택의 기로든 반드시 그 원리대로 따라야 합니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지시한 계명은 신자에겐 강제적 의무 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서원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순전히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자발적 헌신의 발로입니다. 강제적 의무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대비하자면 특성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거나 무시하는 것은 예사로 여기면서도 강제성이 없는 서원에 대해선 극도로 예민해지는 잘못을 범합니다. 그 이유는 서원을 지키지 않으면 징벌이 반드시 따를 것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서원은 주로 어떤 목적이었습니까? 구약에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서 예물을 바치겠다는 헌물이 그 대부분이었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처럼 자신의 신앙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해 자신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예물을 바치겠다는 서원도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지만, 그 바침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도 자라게 되는 목적 내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명령한 것을 어겼다면 징계가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성장할 목적으로 기꺼이 자원한 것을, 그것도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지키지 못했음에도 벌을 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가만히 있는데 고3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 매일 영어 단어 열 개씩 외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고 아버지가 야단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설령 매일 아버지더러 테스트해보고 못 외운 단어 숫자만큼 자기 종아리를 때려달라고 아들이 요구해도 실제로 때릴 아버지는 없습니다. 다음에 덜 잘하면 된다고 격려를 했으면 했지 말입니다.

헌물의 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고 3 아들을 집에서 안락하게 먹여주고 입혀주며 노트북 아이폰 등 모든 필요한 것을 사준 위에 용돈까지 주었습니다. 또 소원하던 대학에 입학하자 선물로 자동차까지 사주었습니다. 아들은 그런 아빠가 너무 감사해서 뭔가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돈의 일부를 되돌려드립니까? 노트북이나 자동차를 고이 모셔 놓습니까? 아닙니다. 대학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육체적, 정신적, 지성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회인으로 성숙, 자립하는 것이 가장 크고 올바른 보답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든 신자의 자발적 서원이든 성경이 반드시 지키라고 엄격하게 요구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절대 소홀히 여겨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신자는 그분과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신자에게 아버지이며 신자는 그분의 자녀이기에 정말로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열방을 향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친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으로 세상으로부터 따로 불려나온 존재입니다. 당신과 원수 되었던 자들을 일방적 은혜로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달성할 수 있는 당신의 일군으로 훈련하고 세우기 위해 여려 계명을 주셨습니다. 신자의 주변부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라는 구체적 사명을 주고 또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매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신자로선 평생토록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며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사는 것이 결국은 신자의 유익입니다.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로 설명해봅시다. 아들이 태어나면 일단 아버지와는 혈연관계가 맺어집니다. 이는 절대로 수정, 왜곡, 취소, 포기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신자는 하나님과 그런 관계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들은 아버지가 바라는 자리까지 성숙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순전히 아들의 유익을 위해서 여러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들이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처음 얼마간은 두고 본 후에 경고와 훈계를 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벌을 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또 온전한 아들이라면 앞에서 말한 대로 아버지의 명령과는 별도로 스스로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어떤 결단을 하고 실천하려 노력합니다. 이 또한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강제성에선 명령에 비해 훨씬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징벌이 꼭 따를 이유는 없습니다. 바로 서원에 해당됩니다. 신자가 서원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해 나중에 진정으로 회개하거나, 심지어 마음에 진심으로 부담감을 갖고 있어도 하나님은 용서해주십니다. 나아가 그분은 끝까지 신자를 지켜보시며 나중에라도 그 서원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조성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이든 스스로의 서원이든 오로지 징벌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잘못된 경향이 있습니다. 언약관계에서 자신의 바꿔진 신분과 특권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할 바를 자연스레, 기꺼이, 감사하며 수행하면 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예’ 아니면 ‘아니오’만 하라고 말하신 뜻입니다.    

잘못된 서원들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든 자신이 결단한 서원이든 징벌과 연결시키는 경향을 뒤집으면, 그것을 잘 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이 따르리라 기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상 받을 것만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은 초등학교, 그것도 저학년 때뿐입니다. 공부란 자신의 성숙을 도모하는 것이며 또 그것이 아버지에게 보답하는 길입니다. 아버지도 아들의 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사탕과 매를 사용합니다. 사탕과 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오직 아들이 성장하는 것이 아비의 소원이자 기쁨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벌 받을 것만 두려워하는 것은 상 받을 것만 목적으로 삼는, 벌 안 받는 것도 일종의 상임, 기복주의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서원의 대부분이 하나님이 먼저 무엇을 주시면 자신도 무엇으로 갚겠다는 식이지 않습니까? 구약의 헌물 서원조차 자기가 받을 은혜를 자기가 미리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뜻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반면에 올해 반드시 성경을 일회 통독하겠다, 아침마다 30분씩 기도하겠다는 것을 두고 서원이라고는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신년 결심 혹은 하나님께 드린 약속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실인의 서약처럼 오히려 그런 것을 서약이라고 말합니다. 또 나실인 서약은 자신을 구분해 하나님께 드리되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민6장)대로 충성되게 순종하겠다는 뜻마저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분의 자녀 된 언약관계에서 하나님의 요구가 있기 전에 자발적으로 자라거나, 순종하거나, 바치겠다는 것이 참된 서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 무엇을 요구하고선 그것이 이뤄져야만 보답하겠다는 꼴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입니다.      

이처럼 서원에 대해 기복주의적 개념을 갖게 된 데는 한나의 서원기도를 잘못 이해한 까닭도 큽니다. 잘 알다시피 그녀는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 기도를 했고, 하나님은 그 간절한 기도에 응답했으며, 그래서 얻은 아들 사무엘을 젖 떼자마자 매정하게(?) 평생 사역자가 되도록 바쳤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내용은 분명 한나가 어떤 보상을 먼저 지정했고 하나님이 응답하자 그 서원한대로 이행했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근본목적이 아들을 얻는 것보다 다른 데 있었습니다. 후처 브닌나가 자꾸 멸시한 것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삼상1:7) 당시 아들을 갖지 못한 것은 죄가 원인이라 믿었습니다. 무자(無子)한 부녀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구원 받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한나에게 꼭 아들을 잉태해 건방진 브닌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인간적 욕구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심령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보려는 소망이 더 컸던 것입니다. 아들을 얻고 난 감사 찬송의 첫 마디가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라고 했지 않습니까? .

그녀도 하나님과의 언약에 입각한 서원 기도를 했고, 준행되자 그런 관계에서 찬송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의 서원 가운데 순전히 자신의 인격적, 도덕적, 영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죄를 안 짓겠다고 서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최소한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겠다는 서원이라도 합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과 흥정 내지 계약하는 심산으로 서원하는 것은 서원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아주 큰 잘못이자 예수님 말씀대로 악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자신의 마음의 다짐을 서원이라고 여깁니다. 그 결심을 더 견고히 하고 자신을 채찍질하여서 꼭 지키겠다는 동기는 사줄만합니다. 그러나 못 지켰다고 심한 죄책감에 빠지거나 그로 인해 다른 일에 장해가 된다면 아주 큰 잘못입니다.

또 간혹 분명 선의이긴 해도 실은 자신의 유달리 강한 소망을, 그것도 주변 여건이나 감정에 흔들려 맹세한 것을 서원이라고 착각합니다. 제일 대표적인 것으로 청소년 수련회에서 주의 종으로 헌신하겠다고 서원 기도를 시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는 경우는 전부 하나님의 분병하고도 구체적인 부르심이 인간의 서원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사무엘, 이사야, 등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신약시대의 열두 제자나 바울의 경우도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사명을 부여하면서 당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신구약 모두 그런 부르심 없이 인간 쪽에서 스스로의 결단으로 먼저 서원한 경우는 없습니다. 유일한 예외로 사무엘이 엄마 한나의 서원에 의해 주의 종으로 바쳐지긴 했지만, 일단 타의에 의한 것이며 또 그 후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아와서 분명한 육성으로 소명을 심어주었습니다.  

반면에 수련회에선 어떻게 합니까? 강사의 감동어린 설교와 뜨거운 찬양으로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켜 놓고 주의 종으로 헌신할 사람 손을 들라고 합니다. 어린 마음에 평생에 전임사역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또 서원과 맹세와 언약 등의 성경적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분위기에 취해 손을 듭니다. 강사의 설교나 뜨거운 찬양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요하듯이 몰아가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당신께서 택하시고 당신만의 고유하고도 개별적인 방법과 때에 따라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당신께서 불러내어 세우십니다. 수련회 강사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수련회 이후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관계에서 그분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도록 다짐만 시키면 됩니다. 주의 종으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수제자라 해도 그가 주님의 제자를 택하여 직분을 줄 수는 결코 없는 법입니다. (유감스럽고도 안타깝게 천주교는 항상 그렇게 하고, 예의 수련회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탄의 훼방

사실은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고 혹시 벌 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만큼 신앙적으로 어리석은 짓이 없습니다. 그렇게 염려할 바에야 그냥 한 시라도 빨리 이행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자꾸 염려하는 것은 아직은 지킬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주변 여건과 자신의 현실적 형편에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질문자님의 경우 특정 시간을 정하는 바람에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긴 합니다. 그러나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럴 경우의 방안까지 하나님은 다 마련해 놓았기에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서원은 신자 쪽의 자발적 헌신이므로 비록 좀 늦어도 몇 배의 힘과 정성을 다해 다시 헌신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늦었다고 여겨질 때가 사실은 가장 빠른 때라는 것이 치과의사의 구호만이 아니라 신앙에도 해당되는 금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서원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도 중히 여기지만, 그보다는 서원을 언제가 되었든 그대로 잘 지켜서 “신자 자신이 영적으로 자라는 것” 을 훨씬 더 귀하게 보십니다. 언약 관계에서 신자답게 거룩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맹세를 악하다고 말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께선 죄인을 향한 일방적이고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구속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실은 지금도 개신교 외의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지만, 모든 이들이 신에게 뭔가를 바쳐야만 그에 비례해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최소한 신의 진노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반면에 골고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포한 선언이었습니다.  당신의 교제의 대상으로 지었던 인간이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십자가 이후로는 그 놀라운 은혜 앞에 진심으로 엎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답게 성장시키고 반드시 천국의 영광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인간이 바친 것에 비례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선의의 목적이라고 해도 구태여 서원까지 하며 자신의 믿음, 정성, 경외, 사랑 등을 하나님께 내보일 필요나 이유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채찍질 하려는 목적이라도 그런 맹세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을 내주시켰기에 진심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열심히 경건을 이루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주님이 십자가로 신자에게 베풀어준 궁극적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은 무조건 신자 편이라는 것입니다. 장래 일도 그 사랑 안에서 신자를 끊어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래 일을 스스로 결정하여 서원한 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지켰는데도 죄책감과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않겠다고, 다른 말로 자식이 아비의 사랑이 필요 없다고, 우기는 꼴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짓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그런 번민에 사로잡혀 영적 성숙과 실행에 나태해지면 바로 사탄의 궤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지금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를 훼방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타락한 천사장이 바로 사탄이며 그 부하들인 악한 천사가 귀신들입니다. 비록 직접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사탄에 넘어가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도리어 의와 신은 버리는 신자들  

예수님은 성경의 모든 계명이 뜻하는 바를 두 가지로 축약시켰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시행함에 있어서 문자적, 율법적, 외형적, 의무적 순종보다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유대 관원들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문자적 규정에만 집착하여 채소나 양념의 십일조까지 바쳤습니다. 십일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기업이 없는 레위인의 생계를 책임지고 나아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킨 것 하나로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부하면서 가난하고 소위 받는 계층은 무시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가르쳐야 할 유대 종교 지도자들마저 율법의 모든 강령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목적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저것도 버리지 말고 행하지만 의와 신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원을 드린 목적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성숙이든, 하나님께 감사든, 자신의 전부를 그분의 종으로 드리던, 그 목적이 이뤄지면 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서원 자체의 목적도 반드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형태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에게 복을 주면 갚겠다는 서원은 두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신앙성숙만을 위한 목적이라면 구태여 서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뜻은 담겨 있겠지만 이웃 사랑의 목적이 없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서원한 대로 신앙이 성숙되었다면 그 성숙된 신앙으로 이웃 사랑에 모두 바쳐야 합니다. 나아가 정작 서원하려면 차라리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서원을 하는 것이 더 옳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서원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기어이 서원하겠다면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정리하자면 신자들이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등한히 하면서 종교적 도덕적 형식과 명분에 매이는 일이 너무 잦습니다. 신자가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그 참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도 의무감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기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말입니다. 어떤 희생과 수고도 고달프기보다 오히려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주로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을 서원이라고 자주 착각합니다. 자기감정이나 주변의 종교적 분위기에 휩싸여 그런 서원을 남발합니다. 자신에 대한 약속은 스스로 열심을 다해 실천하면 그만입니다. 서원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그 다짐을 견고케 하려는 뜻은 좋지만, 진짜로 그런 열심과 진심이 있다면 그대로 실천하면 되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되겠다는 서원은 정말로 신중하고 진지해야 합니다. 그런 소원을 갖고 기도는 해도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함부로 서원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소명(召命, calling)이 전제되지 않는 헌신은 인간적 헛수고로 그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하나님의 명령이든, 스스로의 서원이든, 하나님의 부르심이든 순종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신자가 그분의 뜻을 앞질러 갈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진정으로 신자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원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아서 그대로 행하면 됩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의와 신은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상 받을지 벌 받을지 관심을 두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서원에도 해당됨, 아주 큰 잘못입니다. 신자가 된 것이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단순히 신자답게 살면 됩니다. 자신부터 영적으로 성숙시키고, 빛과 소금으로 세상 앞에 서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신은 죽되 다른 이는 살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은혜와 권능 가운데로 이웃을 초대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향기를 내며 사는 것입니다.

요컨대 모든 신자는 영광된 천국이 보장된 언약관계에 이미 들어와 있기에 범사에 주님과 교제 동행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태여 서원할 필요가 생기지 않습니다. 설령 잘 모르고 혹은 선의로 서원했다가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번민할 필요 또한 더더욱 없습니다.  

4/11/2012  


운영자

2012.04.11 18:15:37
*.104.233.248

앞 글에 이어지는 답변 글입니다.
편의상 함께 붙이지 않고 별도로 올렸습니다. ^o^

모루두개

2024.03.14 09:08:56
*.230.44.2

용감한 질문과 멋진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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