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는 주면서 왜 벌주셨는가요? (민11:31-35)
[질문]
오늘 아침 큐티 하는 중에 민수기 11:31-35를 보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한 대로 고기를 주셨으면서 왜 또 벌까지 주셨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답변]
언뜻 보면 하나님이 병을 주고 또 약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거꾸로 약을 먼저 준 후에 병을 준 것으로 순서는 다르지만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기를 주지 않고 그냥 심판하든지, 고기를 주었으면 심판은 하지 말았어야 온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행사가 뭔가 불공평 불합리 과도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인간끼리 죄를 지어도 진심으로 사죄하며 용서를 구한 위에 반드시 현실적 피해는 보상해야 합니다. 나아가 피해자의 마음의 상처(정신적 피해)까지 씻어주어야 합니다. 피해자의 추가적인 요구가 불합리하거나 무리하지 않는 한에는 끝까지 들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상대로 죄를 지었습니다. 가해자는 이스라엘이고 피해자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마땅히 동일한 절차가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화해의 첫째 필수적인 일조차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정신적 피해 즉, 그 마음이 얼마나 실망하고 진노하셨을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고기만 달라고 원망과 불평을 첨가해 계속 떼만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선 고기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모를 리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고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믿음을 시험 연단시키기 위해서 고기가 없는 광야로 우회시킨 것입니다. 그들이 고기가 먹고 싶었다면 모세에게 불평 원망하기 이전에 진심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부터 했어야 합니다.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불평 가운데 도무지 용서 못할 완악한 배교가 있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대놓고 불평했습니다.(민11:5 & 18) 하나님과 동행하더라도 외적환경이 척박한 것보다는, 그분과 동행 아니 부재하더라도 외적환경이 풍족한 것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불평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한 것을 넘어서 아예 버리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또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민11:4)라고 설명합니다. 여호와 신앙으로 이방족속을 교화시켜야 할 이스라엘이 거꾸로 그들의 불신앙에 오염되어서 동참했습니다. “다시 울며”라고도 했습니다. 이전에 이미 동일한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불로 진영 끝을 사르는 벌을 내렸는데도(민11:1) 계속 불평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11:4)고 불평을 터트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애굽의 바로보다 못하다고 아니 그럴 능력조차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바로와 그 군대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을 얼마 전에 보고도 애굽이 하나님보다 능력이 세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 없이 노예 생활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자체도 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는 당신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오직 지금 당장 안락하고 배부르게 해달라는 요구뿐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합니다. 출애굽 그 엄청난 역사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아예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니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내려 주신 이유는 “누가 고기 줄 것인가 즉, 하나님도 주지 못하고 애굽의 바로만 고기를 줄 능력이 있다”고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그들 앞에 분명히 보여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은 이는 하나님 쪽에서 아무 필요 없는 절차였습니다. 이미 당신을 보여줄 대로 다 보여준 후입니다. 정말로 병 주고 약 주고이든, 약 준 후에 병을 주던 당신으로선 너무나 하찮은 일이었지만 백성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되풀이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끝없이 불평 배교하고, 하나님은 끝없이 당신을 당신의 방식대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고기를 주신 것은 그들에게 영양보충 시킬 필요도 있었다고 설명했지만 엄격히 말해 틀린 말입니다. 틀림없이 만나에 필수영양소가 충분히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기가 주는 식감, 말하자면 먹는 쾌락을 요구한 것입니다. 만나를 매일 반복해 먹는 것이 지겨워진 것입니다.
만나도 하나님이 초자연적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만나가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매일 그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잘못하고 있다고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부모가 평균 이상으로 아이의 모든 것을 다 마련해서 보살펴 주는데도 재벌 자식처럼 해주지 않는다고 부모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아니 이웃집 더 잘 사는 집 부모를 이제부터 자기 부모로 모시겠다고 말하는 꼴입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런데 만나 때와 비교해서 특이한 점은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민11:33) 하나님이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하루 끼니보다 만나를 더 많이 모은 것만 썩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나중에 먹으려고 고기를 모아서 말리기 전입니다. 한 달 후를 염려해 고기를 보관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도 전에 벌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어지는 34절에 “욕심을 낸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민11:4) ‘탐욕’이라고 말했습니다. 탐욕이 질적 양적으로 평균 혹은 검소한 것 이상으로 과도하게 욕심내는 것만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탐욕의 더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세상에서 자신의 요구 필요 소망 만족 기쁨 안락을 채우려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바울 사도가 “탐심은 우상숭배”(골3:5)라고 말하는 까닭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죄는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징계 내지 심판하십니다.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일관된 원리입니다. 도덕적 타락은 인간 세상에 항상 있었습니다. 또 그런 죄악은 하나님을 멀리하기에 생긴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배교하거나 우상숭배 할 때에는 더 이상 회개를 기다려 줄 당신의 인내의 한도를 넘었기에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는 것 즉,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이 첫째 역할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반드시 심판 받게 되고 그 외의 모든 죄는 심지어 살인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고기가 없다고 불평한 정도가 아닙니다. 애굽의 바로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아예 마음에서 지웠습니다. 매일 만나를 먹으면서도 그랬습니다. 그들 자신이 자신들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습니다. 출애굽 홍해 만나 반석의 생수 등등 우상 신들이 절대로 보일 수 없는 권능을 베풀었음에도 당장의 쾌락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탐심 즉,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임을 명백히 증명하기 위해 고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신을 너무나 철저히 배교했기에 심판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민11:34)이라고 이 사건을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
3/22/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