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한국에서는 작자 미상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시가 인터넷 상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눈물이 너무 나서 끝까지 읽는 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 중요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참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내용이다.
그런데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대조 시킨 내용이었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는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가 될 것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 부모님 두분 중에 누가 더 크고 진실한가를 나타내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감히 추측해보면 어머니는 감성적 사랑을 아버지는 이성적 사랑을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봄과 여름은 어머니의 몫, 가을과 겨울은 아버지의 몫이라고 했다. 자식이 잘할 때 칭찬하는 것은 엄마의 몫이다. 아빠는 그저 빙그레 웃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식이 정작 힘들고 어려울 때는 어찌할 바 모르는 엄마보다 ‘뒷동산의 바위’ 같은 아빠가 나서 도와주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돕는 배필’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가 빠지면 완전한 하나가 되지 않는다. 자식 사랑에도 부부가 역할 분담은 하되 뜻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빠가 야단 치는데 엄마는 옆에서 위로하고 있거나 반대로 엄마가 위로하는데 아빠가 야단쳐선 죽도 밥도 안 된다. 결국 온전한 자식 사랑을 위해선 부모가 먼저 주안에서 영육간에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9)
9/15/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