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RS의 위력이 수그러들 줄 모르고 갈수록 세계적으로 더 확산되어 가고 있다. 중국과 홍콩은 경제가 마비될 지경까지 갔다.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서로 악수나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일만 마치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손 씻고 자기 바쁘다. 며칠 전 보도로는 영원히 퇴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온다.
일생을 사는 동안 온갖 어려운 일을 겪게 마련이다. 그 중에는 우리 쪽에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당해야 하는 시련도 많다. 테러, SARS, 이번 주 미국 중서부를 휩쓸고 지나간 토네이도 같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불시에 당할 수 있는 재앙들은 쉽게 이해할 수도 없고 이 땅의 삶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키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저 나쁜 일만 안 생기고 안락하게 살면 전부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런 억울한 죽음들로 인해 하나님은 불공평 하거나 없다고 단정해버린다. 과연 그럴까?
만약에 정말 이 땅에 자연 재앙이나 질병, 인간 사회의 갈등과 반목, 또 생존을 위한 수고와 시련이 단 하나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사방에 널린 것이 먹고 입을 것이라면 과연 그 삶이 살아갈 가치와 의미가 있으며 서로 사랑하는 삶이 가능할까? 하나님 존재에 대해 생각이라도 해 볼 수 있을까? 혹독한 추위가 없으면 따스한 햇볕에 감사할 수 없으며 뜨거운 무더위가 있어야 시원한 바람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를 사람들은 잊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둘째 치고 아마 모든 사람들이 너무 심심해 미쳐 죽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재미있게 살아라고 만들지 않으셨다. 인간을 의미 있게 살아라고 이 땅에 보내셨다. 재미와 안락만을 삶의 목표로 삼은 자는 모든 재앙을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부인할 핑계로 삼는다. 재앙 때문에 미처 제대로 재미있게 살아 보기도 전에 억울하게 죽는다고 아우성이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자에게는 어떤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억울한 죽음이라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9:27)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재미를 찾다 죽느냐 의미를 쌓다가 죽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재앙에서 분명 재미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의미는 찾을 수 있고 그런 자만이 인생을 성공할 수 있다. 아니 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3,4)
5/11/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