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쌍둥이 샴 자매의 뇌 분리 수술 실패에 따른 뒷말이 많다.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었음에도 수술을 강행한 것은 살인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본인이 원해도 의사의 양심으로 거절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번지 점프 고무 줄이 낡아 점프 중에 끊어질 수 있음을 아는데 아무리 본인이 죽어도 하겠다고 우긴다고 시킬 사람은 없다. 미국에선 자동차 앞 좌석에 아이를 태우다가 사고가 나 죽어도 부모가 살인죄로 처벌 받는다.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로선 참으로 미묘한 문제였을 것이다.
금주 한국에선 생활고를 비관한 30대 주부가 세 아이를 아파트 14층 난간에서 던져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곤궁함이 오죽 절망적이었나 싶어 안타깝기도 하고 아이들이 살아 남아 최소한의 인간적 대접도 받지 못하고 클 것을 생각하니 같이 죽겠다는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어떤 43살의 주부는 이 기사를 읽고 너무 가슴이 아파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 통곡했다고 한다. 아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이었는가 보다. 아이들이 “죽기 싫어 살려 줘”라고 엄마에게 매어 달렸지만 떠밀어 버렸으니 동반자살이 아니라 분명한 살인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다 이해해 주어도 되거나 그 일이 옳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입시 공부에 너무 지쳐 대학가는 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 이해는 되지만 그만두게 하는 부모는 없다. 예의 두 사건에서 그 당사자의 고통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자가 그들의 아픔을 알 길은 없다. 아무리 죽더라도 그 괴로운 삶을 끝내고 싶다는 심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옳은 일은 아니다.
이것과 정반대의 살인이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만 옳은 일이었다.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로 로마를 없앨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택했다. 우리로선 이해할 수 없고 옳은 일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길 외에는 인간이 살 길이 없었다. 모든 인류는 죄 중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저주하고 있었음에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인간이 생활고나 핸디캡의 고통에 헤맨 것도 아니었다. 먹고 마시고 즐기기에 바빴다. 집 나간 아들이 방탕에 빠져 돌아올 기미가 전혀 없자 그 부모가 대신 죽은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하신 자살 외의 세상의 어떠한 인간의 자살은 살인이다. 대신에 인간은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더구나 하나님과 맞 바꾼 목숨일 바에야 더할 나위 있으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7/27/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