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16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즉위한 지 25주년 되는 날이었다. 이전 교황과는 달리 바티칸에서 칙령으로만 다스리지 않고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직접 찾아가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국내를 143차례 여행했고 102차례 해외 순방을 했다. 여행한 거리만도 지구를 수십 바퀴 돌 정도다. 참으로 전세계 10억 카토릭 신자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탈리아 대통령이 축하 메시지에서 표현한대로 ‘문화들 사이에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TV화면에 나타난 그는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겨울 정도로 노쇠해 보여 안쓰러웠다. 올해 83세로 파킨슨병과 관절질환을 앓고 있어 이미 외빈을 접견해도 말 한 마디 못하는데도 바티칸 당국에선 “교황은 앓고 있지만 포기 하지 않고 있다”고 강변(?)했다. 교황과 카토릭 당국 중 누가 포기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본인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은퇴시켜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축하 미사 내내 말 한마디 없는 교황 얼굴만 보고도 환호했다고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는 동안 자기들 지도자가 부재(不在) 하므로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삼고 그 앞에서 축제를 벌였다. 인간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면 안심하지 못한다. 로마의 철학자 마커스 테렌시우스는 “신의 형상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들은 두려움은 제거하였지만 잘못을 첨가하였다”라고 말했다. 영원한 하나님조차 어떤 형상으로 대체해야 불안하지 않고 복을 제대로 받고 있는 것 같다. 순전히 자기 위로요 인간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짓이다.
예수님은 도보로도 충분히 여행할 정도로 좁은 유대 땅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겨우 3년간 오갔다. 그리고 당장에 드러나는 세상의 외적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 분이 가는 곳마다 오히려 다툼이 더 일어났다. 인간 내면에 있는 영혼의 죄악과 세상을 누르고 있는 흑암의 세력을 먼저 제거하지 않고는 문화들 사이의 대화는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사람들의 환호는 오히려 더 멀리 했다. 교황의 업적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체 당해 사람들의 불안만 없애주는 역할을 억지로 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이는 것에서 오는 불안을 보이는 것으로는 결코 없앨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예수님의 사랑 외에 인간에게 참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10/19/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