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조회 수 2282 추천 수 56 2009.11.09 13: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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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질문]

목사님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13절 말씀을 해석해주세요. 전에도 난해하게 여겨지던 말씀으로 새벽 기도 기간 중에 다시 듣게 되었는데 제가 기대했던 말씀들을 듣지 못해서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사이트에서 말씀별로 나와 있는 곳에도 그 장은 없기에 꼭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눅16:1-8a)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8b-13)

[답변]

이 기사는 대표적으로 난해한 구절로 꼽힙니다. 그 이유는 언뜻 보면 예수님이 누가 봐도 도덕적으로 분명히 악한 행위를 지혜롭다고 칭찬하고 또 신자들도 그런 점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당연히 그럴 리는 만무합니다.

성경을 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본문(text) 안에서의 문법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문자적 의미는 무시하고 곧바로 윤리적 영적 의미만 유추, 적용하려 드는데 잘못입니다. 문법적 분석이라고 해서 문자적 해석에 억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해석된 바탕 위에서라야 나머지 도덕적 영적 의미의 유추도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해석이 정확하게 파악된 연후라야 문맥상에 연관된(contextual) 의미의 도출도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비유

본문은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어떤 사안을 설명한 후에 그 비유를 풀어서 해석 적용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비유 부분과 그것을 해석 적용한 부분으로 나눠야만 문법적 해석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대개 1-8절과 9-13절의 둘로 나누는데 저는 특별히 8절 한절을 중간에서 반으로 나눴습니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처리했다고 칭찬한 것으로 비유는 끝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는 구절은 비유 안에서 주인이 그 종을 칭찬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비유의 내용을 한 마디로 결론내린 말씀으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예로 들기보다는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단지 설명의 방편으로만 사용합니다. 그런 칭찬을 받은 주체가 실제로 누구인지는 사실상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선 더더욱 칭찬한 내용을 풀어 설명한 내용이 “이 세대의 아들과 빛의 아들”로 대비되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문법적으로는 비유에 나오는 부자 주인이 말한 것처럼 되어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이 비유의 결론으로 하시는 말씀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가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단락 즉, 비유와 그에 대한 해설의 구체적 의미를 정확히 살펴보려면 성경의 비유, 특별히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의 기능과 해석 방법을 먼저 숙지해야 합니다. 비유(比喩, parables)란 단어 뜻 그대로 어떤 사안에다 그와 비슷한 사안을 평행으로 대비해 원래 사안의 의미를 더 명료하게 전하고자 하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화자(話者)가 강조하려는 요점을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함으로써 이해에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를 통해선 무엇보다 화자가 강조하려는 초점만, 혹은 초점을 우선적으로 건져내어야하지 비유 전체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해석해선 안 됩니다.

또 비유는 필연적으로 몇 가지 특성을 가지는데 해석도 그 특성에 맞추어서 행해져야 합니다. 첫째는 단순성(單純性)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강조하려는 요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려는 목적이기에 메시지는 간결하고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오묘한 천국복음을 모든 세대가 쉽고도 정확하게 이해하여 오래 기억에 남도록 비유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친밀성(親密性)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생활이나 환경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예로 들기에 현장에서 비유를 직접 듣는 자는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후대 사람들은 당시 상황을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심오한 내용과 진리를 구체적인 현실사안에 빗댐으로써 구상성(具象性)이 나타납니다. 이해를 돕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되 무엇보다 자신이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에 구체적인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셋은 모든 문학적 비유에 다 해당되는 일반적 특성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만이 갖는 고유의 특성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중성(二重星)입니다. 전하는 의미가 아주 심오해서 영적으로 이중적, 다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비유의 기본적 특성인 단순성과 배치될 뿐 아니라 예수님이 비유를 자주 사용한 목적과도 위배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0-13)

단순하고 친밀하며 구체적인 비유임에도,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는 제자들처럼 듣고 깨닫는 자가 있는가 하면 끝까지 그렇지 못한 자도 있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의미는 알아들었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궁극적으로는 천국 비밀을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성령의 감화로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열린 자는 순수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렇지 못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자들은 비유의 의미 즉, 진리를 알고도 완악하게 거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래서 비유를 더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4,35)

예수님이 보이신 권능과 이적에는 환호하며 따랐던 수많은 자들이 막상 당신의 복음 전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종교 특권층들은 드러내놓고 반발, 비방, 멸시하며 일관되게 대적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태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의 선지자가 이미 다 예언한 그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보시고, 복음을 인간적 사상과 철학으로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로 성령의 조명으로만 이해할 수 있게 더욱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원칙 몇 가지가 드러났습니다. 우선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일이라 쉽게 알아들었던 현장에 있던 청자(聽者)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미 말한 대로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을 간단명료하게 추출해내어야 합니다. 비유 전체를 일일이 축자적(逐字的)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강조점이 천국 비밀을 가르친다는 관점에서 재검증하되 앞뒤 문맥과도 연결하여 주님의 진의를 파악해야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은?

당시의 청지기는 단순히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도맡아서 실제로 투자 운영하는 일까지 맡았습니다. 주인의 도장도 지니고 있으면서 모든 계약을 주인의 이름으로 맺을 정도였습니다. 지혜롭고 성실하며 충성된 종을 둔 주인은 오히려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성실하고 정직하며 자식 이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 그런 직분을 맡겼습니다. 물론 맡은 권한이 많은 만큼 조금만 마음을 잘못 먹으면 부정을 저지를 소지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재산을 도맡아 관리 운용하는 그런 청지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1절)고 합니다. 주인이 시킨 대로 한다면 허비를 해도 주인의 잘못이기에 그를 해고하기는커녕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채권증서를 본인이 소지하고 있으면서 자기 임의로 고칠 즉, 상거래 계약을 갱신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단순히 재산을 운영하여 증식함에 정세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면 주인에게 이실직고를 했을 것입니다. 또 사전에 위험 부담이 있는 계획이었다면 주인과 상의 내지 통보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말이 어찜이뇨”라고 따진 것을 보면 이미 청지기가 자금을 부정한 방법으로 유용, 횡령, 착복한다는 사실을 주위에선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는 뜻이 됩니다.

당연히 주인은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명했습니다. 관리하던 재산을 전부 공정하게 계산해서 되돌려 주고 청지기 직분을 그만두라는 해고명령이었습니다. 청지기란 자식보다 더 믿는 자라야 맡기는데 해고할 정도라면 그가 상당한 부정을 저지른 것이 확실합니다. 신뢰 관계가 완전히 금이 간 것입니다.

졸지에 해고를 당한 청지기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육체노동을 할 계제가 안 되고 특별한 기술도 없으며 거지 노릇은 더더욱 할 수 없어서 자기 살 길을 궁리했습니다. 채무자를 일일이 불러서 소지하고 있던 채권증서에서 채권금액을 까주기로 했습니다. 그럼 신세를 진 채무자들이 자신이 퇴직한 후에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거나, 혹은 그 활인금액을 서로 나눠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다 재산과 장부 일체를 되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동안 자기가 허비한, 사실은 착복한 만큼을 감해서 장부상으로도 부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금액을 끼워 맞추는 작업을 했습니다. 횡령에 대한 물적 증거를 없앤 것입니다. 채권증서를 자기가 변조 수정하지 않고 채무자더러 자필로 다시 쓰라고 한 까닭입니다. 주인의 인감도 맡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산과 장부를 되돌려 받은 주인으로선 시중에 떠도는 루머와 자기 짐작에 따른 심증은 분명 있지만 물증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지기가 지혜 있게 일을 처리했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행이나 업적을 높여주는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성경도 “이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 청지기이지만 자기 앞날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영악하게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비유 자체가 의미하는 바에 관심을 두어선 안 됩니다. 비유란 정작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명료하게 이해시키는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더러 그런 행동까지 본받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후반부에서 정작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을 이 비유에 비추어서 진지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관점은 오히려 청지기의 잘못을 세밀히 잘 파악하여서 절대 그대로 따르지 말라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주인이 분명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설마 이런 청지기를 닮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단연코 아닐 것 아닙니까? 주인을 우습게 알고 무시한 청지기가 오직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만 재물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서 재물을 맡긴 주인을 위해서만 재물을 공의롭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운용해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

문제는 예수님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신 뜻이 애매한 것입니다. 우선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니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도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친구를 사귀라고 했으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번 돈이라도 장래를 대비해 주변 사람들을 잘 대접하라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나중에 그 보상으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라고 하니까 더욱 모호해집니다.

이런 오해들은 성경본문을 건성으로 읽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서두에 가장 먼저 문법적 분석부터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문법적 분석이라는 것이 다른 것 아닙니다. 문장의 정확한 뜻부터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앞뒤 문장과 연결된 자연스런 흐름을 추적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문장이 스스로 표명하고 있는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성경을 읽고 치웁니다. 문법적 해석은 생략한 채 무조건 윤리적 영적 교훈만 찾으려 듭니다. 마치 도덕적 영적 해석이 더 우월하고 정확한 해석인양 착각합니다. 성경 말씀이 자증(自證)하는 정확한 의미를 벗어난 채 도덕적 영적 교훈을 먼저 내세우는 것이 이단이 대표적으로 범하는 오류인데도 말입니다.

본문의 경우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걸려서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앞 문장 즉, 예수님이 비유의 결론으로 내린 말씀부터 다시 봅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은 불신자와 신자를 대비하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더 지혜로운 요소가 작동되는 영역에 어떤 부가적 조건과 제한을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불신자들이 이 땅에서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서만은 신자들보다 아주 영악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수로 지칭했습니다. 비유의 청지기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부정에 기꺼이 동참한 채무자들도 함께 포함시킨 표현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안일과 풍요만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쓰는 자들인데 그들더러 자기 시대의 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또 비유에서 부자는 하나님을, 청지기와 채무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그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함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뜻대로 살려는 신자들은 불의한 청지기와 그 공범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는 뜻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신자에겐 재물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쓰라고 일시적으로 맡겨주신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번 돈이라고 해도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여건 전부는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이 땅을 전부로 보는 사상입니다. 자기 안일과 풍요만을 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사랑하여 모으고 씁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인식이 전혀 없기에 자기 능력이 뛰어나 번 것으로 착각합니다. 자기를 위해 이 땅에만 쌓아놓은 재물이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도적과 동록이 번창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 자신의 생명마저 앗아갈지 모릅니다.    

신자는 그 반대로 “자기 시대가 아닌 하나님의 시대에서” 사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세계가 있으며 오히려 그곳을 더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성실하게 모으고 정직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또 재물은 어제 있다가도 내일 없어질 것이며 영원한 것이 절대 되지 못합니다. 재물 그 차제로는 절대로 하늘의 보물로 쌓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자기 안일과 풍요가 아닌 하나님이 쓰시라고 하는 곳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처럼 비유만, 특별히 마지막 결론에 비추어서 정확히 살펴봐도 예수님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거의 다 나온 셈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간단명료하게 전하시려고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맥락으로 일관되게 해석하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의 뜻도 저절로 명확해집니다.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쓰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불의한 재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시대만 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재물을 벌고 또 자기 안락만을 위해서 사용하므로 불의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시대를 사는 빛의 아들들은 비유의 청지기와 달리 재물을 하나님 뜻대로 벌고 또 그분 뜻에 맞춰서 의롭게 사용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번 재물로만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비유의 청지기는 친구가 아니라 서로의 이해타산에 맞는 상거래를 한 것뿐입니다. 서로 진심을 주고받으며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일에 가치중립적인 재물을 사용하면 하나님 안에선 의의 재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청지기인 빛의 아들들에 돈을 맡기신 뜻입니다.


친구라고 해서 단순히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는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유 속에 항상 천국의 비밀을 담았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말씀들 안에도 서로 연관되는 뜻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이웃 즉, 친구의 범위를 예수님이 어떻게 정의했습니까? 사회적 신분, 위치, 권세, 재물, 계급 등에 전혀 차별대우를 두지 말고 누구라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자들을 자기 가진 소유를 사용해 성심껏 도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는 당연히 천국입니다. 없어질 때라는 표현에는 무엇이 없어지는지 그 주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물(의 효능과 의미가) 없어질 때라고 하든지, 생명이 없어질 때라고 하든지 간에 어쨌든 신자가 죽어 천국 갈 때인데 이어지는 말씀과도 뜻이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사귄 친구들이 신자를 천국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표현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섬긴 신자는 천국가고 또 그런 섬김을 받은 자도 빛의 자녀가 되어서 함께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행이 조건이 되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항은 예수님은 지금 빛의 아들들 즉,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이 재물을 어떻게 운용해야할 지에 관해서 가르치는 중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예수님은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의 하나님의 기쁨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되찾은 열 드라크마와 돌아온 탕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6장에선 재물에 관한 세 가지 강화를,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말씀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하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책 전체의 문맥상 의미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후로 지녀야 할 재물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물론, 정말 당신의 은혜를 아는 참 신자라면 자연히 그런 물질관(物質觀)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크고 참된 것에 충성하라.

그런데 예수님의 재물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빛의 아들들에게 정작 가르치고 싶은 내용은 지금부터입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사실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문장이 스스로 나타내는 의미만 살펴도 그런 뜻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고 합니다. 그럼 논리적 흐름 상 재물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또 앞문장과 연결하면 참된 것을 맡아 충성하는 것이 큰 것에 충성하는 일이 됩니다. 역으로 따지면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럼 크고 참된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정작 충성해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다시 문장의 의미를 순서대로 추적해 들어가 봅시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지금 예수님이 처음 비유를 들 때부터 지금까지 또 마지막 결론격인 13절에 이르도록 의도적으로 두 가지 사물을 일관되게 대조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한쪽은 남의 것에 충성하는 일인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또 그것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비유에서 청지기가 부자 주인이 맡긴 재산을 주인 뜻대로 잘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부정하게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을 외면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를 지혜롭게 사는 방안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하지 못한 실패를 범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조되는 다른 쪽은 크고 참된 것입니다. 빛의 아들들은 영원한 시대를 살기에 남이 맡긴 지극히 작은 재물에도 당연히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크고 참된 것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크고 참된 것을 지금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재물은 결코 너희의 것이 아니며 진짜 충성해야 할 너희의 것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결론을 보십시오. 집 하인이 두 주인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 너희의 것이자, 크고 참된 것이자,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자, 없어지지 않을 것이자, 영원한 처소의 주인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그런 주인으로 확고히 모시고 있는 자에게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자, 나의 것이 아닌 맡긴 것이자, 그것으로 이웃을 섬겨야 할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이 말씀도 당시의 사정을 알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에게 복수의 주인들이 있었듯이, 하인이 때로는 실제로 두 주인을 섬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다른 한 주인에게는 여전히 종으로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 복수의 주인을 섬기다 보면 아무래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주인을 더 성의껏 섬기려 들게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려 해도 동일한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재물이 하나님보다 현실에선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안락에 유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잘 인도해주실 때는 몰라도 환난이 조금만 닥쳐도 그분을 의심 불신합니다. 그러나 돈에 대해서 비굴하게 굴종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도 솔직한 그 속내를 따지면 재물을 더 얻고자 하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어떻게  밝혔습니까?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6:24) 반드시 자기가 더 좋아하는 쪽으로 쏠리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했지 않습니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보물이라고 즉,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와 그 해석과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결론까지 다 듣고 난 바리새인들이 보인 반응을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3:14)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과 경건에선 당대 최고였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합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이중성이 여실히 입증된 사례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고 들으면 그 뜻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오히려 복음의 비밀이 그들에게 가려진 것입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예수님의 초대의 손길을 거절, 아니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음이 완악해져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절)

그들 마음의 보물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는 것은 뒷전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게 된 종교적 권세를 이용해 역으로 사람들로부터 교묘하게 돈을 긁어내어서 모으기에 바빴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처럼 자기 시대에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를 위해 돈을 쌓아가는 이 세대의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나무보다 숲을 먼저 보라.

마지막으로 첨언할 사항이, 사실은 재차 강조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 원리 중의 하나는 반드시 숲을 먼저 본 후에 나무를 보라는 것입니다. 먼저 숲을 보면  나무도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지만, 나무에만 시야를 한정시키면 전체 숲이 어떤 것이지 종잡을 수조차 없습니다. 전체 대의를 먼저 파악한 후에 세부적인 구절의 개별적 의미를 따져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함에선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본 사안이 아닙니다. 본건의 의미를 명료하게 단순화시켜서 강조하기 위한 보조 사안입니다. 또 모든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천국 복음이라는 일관된 주제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그것도 일부 부분만 붙들어서 영적으로 해석하려 시도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청지기가 불시에 닥친 환난을 자신의 지혜를 전부 동원해서 잘 이겨내었기에 우리도 어떤 환난이 닥쳐도 절대 당황하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하면 피할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권하는 것입니다. 환난 때에 당황하지 말고 지혜를 동원해 이겨내라는 권고 자체는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아주 좋은 충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몰라도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아니 상식적으로 아는 내용입니다. 구태여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질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본문 비유를 두고 환난이 닥치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 이겨내라는 정도로 해석하는 것도 나무를 보는 해석일 뿐입니다. 전체 대의는 신자가 지녀야할 물질관에 관한 것이지 환난을 이겨내는 방법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또 지극히 적은 것에도 충성해야 더 큰 것을 맡긴다는 구절만 인용하여서 흔히들 교회에 물질로 잘 봉사하면 하나님이 더 큰 것으로 축복한다는 식으로도 해석합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해석으로 절대 금해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의 복음을 물질로 잘 섬겨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는 물질 복음으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교회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또 더 큰 것이 문법적 해석만으로도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복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라는 것이 밝혀졌지 않습니까?

심지어 불의한 재물이라는 한 구절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은 불의한 것이고 악의 근원이므로 신자는 아예 멀리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돈 자체에는 선악간의 의미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재물 자체는 결코 불의한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질 뿐입니다. 빛의 아들이 정직하게 재물을 벌어 그분 뜻대로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하면 의로운 재물이 되지만 옳지 않는 청지기 식으로 운용하면 불의의 재물이 됩니다.

나아가 기독교는 재물을 아예 부인하는 염세적 가치관도 완전히 배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물질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구현할 영육간의 삶 양쪽을 다 귀중히 여깁니다. 인간에게 고급한 지정의를 부여해서 당신 대신에 모든 피조물을 거룩하게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육체적 물질적인 것은 천하고 더러운 반면에 정신적 영적인 것만 선하고 귀하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잘 운용하여서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그분의 공동체를 이루면 그에 사용된 물질은 너무나 선한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위의 몇 가지 해석 예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이자, 비유라는 특성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본문 기사의 요체는 마지막 결론 즉, 신자는 절대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한 말씀에 다 모여 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신자가 세상에서 빼앗기지 않고 영원토록 섬길 수 있는 신자의 절대적 소유입니다. 재물은 오직 그 주인을 충성되게 섬길 수 있는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지극히 작은 것일 뿐입니다.

재물이 커져 보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작아 보이거나, 하나님을 재물을 얻는데 도움 얻는 종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요컨대 신자는 비유에 나타난 청지기와는 재물에 대한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서 정반대의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이 뜻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 안에 든 자에게는 그 아들과 함께 하늘에 속한 모든 좋은 것으로 풍성히 주십니다. 이제 빛의 아들이 된 신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야합니다. 그럼 나머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지는 그분께서 다 아시기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다 채워주십니다. 정말로 그분께서 우리 것으로 주신, 바로 그분 당신만을 평생토록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11/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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