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16: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갓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 들어가기

  ▲ 일전 ‘아이 손의 사탕 빼앗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리 풍성한 이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고,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는 가장 적절하고 충분한 수준이었다는 교훈을 이끌어 내었었습니다.

  ▲ 오늘은 이와 연계되는 내용이지만, 약간 상이한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묵상의 소재는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입니다.

▣ 만나란 어떤 음식이었을까?

  ▲ ‘만나’란 히브리어로 ‘만’이라고 하며, 이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히브리어 ‘만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 성경에 기술된 만나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정리됩니다. ①크기가 작다(출16:14). ②둥글다(출16:14). ③흰색이다(출16:31). ④햇빛에 쉽게 녹는다(출16:21). ⑤맛이 달다(출16:31). ⑥단단하다(민11:8).

  ▲ 만나가 공급된 기간은, 출애굽 제2월 15일로부터(출16:1) 가나안 땅에 입성한 직후(수5:12)까지로서, 장장 40년간이었습니다.

  ▲ 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도 그냥 얻을 수 있었던 음식입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감사가 따라야 할 그런 하늘양식이었습니다(물론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 그런데, 사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냥 감사만 하며 받아먹기가 곤란한 그런 음식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불평은 일리가 있었습니다.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만족에 이르기 어려운 이 현상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 이스라엘은 왜 ‘만나’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없었는가?

  ▲ 요즘은 외국여행이 워낙 활성화 되어 있어서, 외국음식에 대해서도 상당히 적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전만해도 외국여행에서 부딪치는 음식문화의 충돌(거부감)은 자못 심각했습니다. 익숙지 못한 빵과 고기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동남아시아의 독특한 향신료는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며칠이 안 되어 김치와 깍두기와 고추장과 된장국을 그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입맛의 위력 때문입니다. 사람의 입맛은 적응은 가능하지만 상당한 진통을 동반합니다.

  ▲ 그리고 학창시절, 한계효용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꿀물 첫 잔과 두 번째 잔의 맛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주린 자는 쓴 것도 달게 여기지만 배부른 자는 꿀도 싫어합니다(잠27:7).  

  ▲ 이야기 전개를 위해, 만나의 정확한 정의를 규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만나는 ‘광야 40년간 이스라엘의 주식이자 부식이요 양념’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허락되었던 유일한 먹거리는 오직 만나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주식이었고 부식이었고 양념이었습니다. 가끔 메추라기 고기가 공급되기는 했으나, 메추라기는 매일 공급되는 일상 음식이 아니라, 필요시 한시적으로 공급되었던 특별식이었을 뿐입니다.  

  ▲ 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40년간 아무 노력도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감사만 하고 살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감사는커녕 심한 불평으로 일관했을 뿐입니다. 은근히 ‘나쁜 백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평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됩니다.

   ○ 먼저, 애굽에 있을 당시의 이스라엘의 음식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주식은 곡물과 고기였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제한받지 않는 부식과 양념이 첨가되었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먹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 민11:5절에는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라는 푸념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금도 틀리지 않는 진실이었습니다.  

   ○ 여기서 ‘생선’은 부식 종류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외와 수박’은 과일로서 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부추와 파와 마늘’은 양념 종류입니다. 값없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었고, 이는 온갖 양념으로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여 먹었다는 의미입니다.

   ○ 그런데,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늘 먹던 익숙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먹어본 적도 없었고(신8:3), 단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처음 먹게 된 생소한 음식이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만나는 이스라엘의 ‘비상식량’이었던 것입니다.  

   ○ 익숙지 않은 비상식량은 금방 실증나기 마련입니다. 한계효용의 법칙이 작용되고, 입맛에의 적응도 쉽지 않습니다. 처음 몇 끼 정도는 그런대로 넘길 수 있겠으나, 열흘이 넘고 한달도 넘고 사십년을 오직 만나만 먹는다면, 입에서 냄새가 나고 보기만 해도 질려 버립니다. 제 고향 사투리로는 ‘튀가 난다’고 합니다.

   ○ 만나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기울인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나를 단순하게 먹은 것이 아니라, 지지고 복고 온갖 요리 실력을 동원하여 최대한 노력했습니다(민11:8).      

   ○ 그러나, 만나에 대한 실증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만나를 매우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만나에 대한 실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인간이라면 응당 이스라엘의 불평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불평은 ‘이유가 충분한 불평’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사전(辭典)에는 ‘대박’은 없고 ‘쫀쫀함’만 있다.

  ▲ 지난번 묵상의 요지는 ‘하나님의 이적은, 사르밧 과부나 오병이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차고 넘치는 풍성한 양으로 나타나지는 않고 꼭 필요한 양만 채워 주시는 조금은 쫀쫀한 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오늘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왕 하늘양식을 내려 주시려거든, 애굽에서 먹던 것과 같이 주식은 물론이요 부식과 양념까지 풍성히 주시지, 달랑 만나 한 가지만 주신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 그냥 로또 복권같은 대박이 터지기를 바랍니다. 믿었으니 삼박자 축복이나 달라는 것이지요. 남보다는 조금이라도 많거나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내놓고 자랑하려는 생각입니다. “봐라! 나는 하나님을 믿었더니 이렇게 대박을 터트려 주셔서 잘 먹고 잘 산다. 메롱~~~” 이게 삼박자 축복의 진짜 뜻입니다.

  ▲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2번에 걸친 묵상을 통해 볼 때, 대박을 터트려 주시는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항상 쫀쫀하다 싶을 정도의 필요량만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는 정도만 주십니다(출16:18).

  ▲ 그리고 그 ‘필요량’마저도 인간의 ‘포기’를 전제한 것입니다! 먼저, 사르밧 과부의 찢어 붙일 것도 없는 밀가루와 기름과, 어린아이의 알량한 보리떡과 도루묵 같은 물고기반찬을 포기하게 하시고, 그 후에야 필요한 양을 베풀어 주십니다.

  ▲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에서의 갖은 양념 곁들인 음식을 포기하는 대신 최소한의 필요를 채워 주신 것입니다.

▣ 결국은 갈보리로 돌아와야만 한다!  

  ▲ 이제 사르밧 과부와 어린아이와 만나의 사례를 통해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진의를 살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쫀쫀하다는 평가를 받으시면서 까지 보잘것없는 것으로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 우리가 거의 암송하다시피 하는 이사야서 53장을 살펴야 합니다. 밀가루와 보리떡과 만나는, 모두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누구처럼?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정말 형편없어 보입니다.

  ▲ 정말로 우리 주님은 겉보기에 자랑할 만한 것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왕자도 귀족도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비천한 목수에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포기할 것조차 없으셨습니다. 내어 놓을 것이라곤 당신의 목숨뿐이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하셨습니다. 본시 창조주이시므로 죽으실 수 없으신 존재이시지만, 기꺼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이야기를 왜 다시 반복하는지요? 2번의 묵상의 결론과 연계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포기하심에 따라 당신께서도 다시 사셨고(할렐루야!), 덕분에 우리 성도들도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아멘!).

   ○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 공로의 덕을 엉뚱한 성도들이 본 것입니다.

   ○ 과부가 밀가루를, 어린아이가 보리떡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엘리야와 5천 명이 덕을 보았습니다. 과부와 아이의 공로의 덕을 다른 사람들이 본 것입니다.

   ○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포기한 자도 결코 손해 보지 않았으며, 옆의 사람들에게까지 포기의 덕이 나누어졌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계산법의 신비입니다.

▣ 나가기.

  ▲ 2번의 묵상을 통해 볼 때, 관점에 따라서는 쫀쫀함을 넘어 지나치다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는 충분한 은혜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전(辭典)에는 ‘로또 복권과 같은 대박’이 없습니다. 당연히 삼박자 축복 같은 뻥튀기기도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내가 가진 작은 것을 포기함에 따라 오는 다른 이들의 소요 충족’이라는 비밀을 조금이나마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큰 것이며 충분하고 또 완전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내 것의 포기를 통해 이웃이 덕 보는 하나님의 원리’가 핵심입니다. ‘내 것을 이만큼 투자했으니 수십 배의 이득이 있어야 한다.’는 투기(삼박자 축복론) 심리는 성경에서 눈 닦고 찾아도 발견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는 믿음 또한 넘치는 은혜인 줄 믿습니다. 아멘! ♣

mskong

2007.05.14 01:03:46
*.226.142.22

'내 것의 포기를 통해 이웃이 덕 보는 하나님의 원리'가 핵심입니다.'
서서히 말씀안에서 중심이 잡혀가는 저를 봅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조재춘

2007.05.14 03:12:40
*.29.165.87

나를 위해 사는것에서 주를위해 살때 진정한 풍성한 삶을
누리는 비결임을.....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1 [환우나눔] 의사도 포기한 병든 몸을 이끌고 정순태 2007-08-11 1309
40 [의문] 「거룩한 의문」 시리즈를 마치면서 [2] 정순태 2007-08-04 1257
39 [묵상] 이방신의 축복이 더 풍성하다? [5] 정순태 2007-07-27 1293
38 [환우나눔]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을! 정순태 2007-07-14 1174
37 [환우나눔] 걱정도 팔자네! 정순태 2007-06-23 1173
36 [묵상] 기드온은 정말 큰 용사였는가? [3] 정순태 2007-06-16 2248
35 [환우나눔] 소문은 소문일 뿐, 그냥 섬김이 전부이다. 정순태 2007-06-09 1195
34 [단상] 예수님은 흥하고 목사는 망해야한다! [4] 정순태 2007-06-02 1424
33 [환우나눔] K 형제님을 통한 반면 교훈 몇 가지 [2] 정순태 2007-05-27 1308
32 [단상] 중신아비로 만족할 수는 없는가? 정순태 2007-05-19 1290
» [묵상] 충분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던(?) 만나의 은혜 [2] 정순태 2007-05-13 1783
30 [묵상] 천국체험 주장들 -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나? [4] 정순태 2007-05-05 4787
29 [묵상] 수지맞은 구경꾼(출14:1-14) [1] 정순태 2007-04-27 1507
28 [묵상] 아이 손의 사탕을 빼앗으시는 하나님(?) [2] 정순태 2007-04-21 1637
27 [단상] 정제되지 못한 간증의 위험 [4] 정순태 2007-04-14 1545
26 [환우나눔] 마음만은 언제나 정순태 2007-04-01 1296
25 [환우나눔] 아주 작은 소자들의 지극히 작은 나눔 이야기 정순태 2007-04-01 1500
24 [의문] 야곱은 하란에 40년 체류했다? 정순태 2007-03-24 1669
23 [의문] 단 지파의 기이한 특공대? [2] 정순태 2007-03-17 1641
22 [묵상] 맛 잃은 소금 [4] 정순태 2007-03-10 548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