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현 감독의 책에 관한 서평은 '방언'에 대한 의견이었습니다. 방언 문제는, 아주 다양한 이해로 나뉘어지기에, 매우 치열한 논쟁을 촉발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깊이 다루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교리(신학)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위에는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분들의 주장이 매우 그럴듯하기에 전적으로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분들의 주장에도 깐깐하게 살펴봐야 할 미비점은 많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앞으로 5-6회 정도 '방언' 관련 단상들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제 견해 또한 지극히 지엽적인 이해에 불과하므로 읽으시는 성도님들께서 잘 소화하시며 판단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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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 간에는 방언의 지속성 여부, 즉, 방언이 초대교회 시대에만 허락되었던 은사였다는 주장과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은사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학적 소양이 미흡한 평신도에게는 매우 난감한 주제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나 상당한 신학 지식 능력을 보유한 학자들(목회자들 포함)의 견해도 완전성을 확신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수긍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비점 또한 부인할 수 없을 듯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방언은 오늘날에도 허락된 은사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구원받은 자의 표징으로 여기는 극단적 은사주의(방언 은사를 얻지 못한 자는 구원 얻지 못했다)는 배격합니다.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방언의 가치와 중요성을 역설하시는 분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참으로 그럴듯합니다. 성경적인 것 같고 은혜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은사주의자들(방언필수론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자세에는 커다란 미비점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은혜로운 주장이므로 조목조목 따지지 말고 그냥 넘어가자.’고 하기에는 부담이 클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첫 번째 미비점은, 특정구절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다른 구절과의 결정적 상충을 초래한다는 점입니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행2:1-4) 당시 120문도 전부가 방언은사를 받았으므로, 오늘날에도 믿는 자라면 반드시 방언 받아야 하며 만약 방언 못하면 구원 여부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확대 해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120문도 전원이 방언 받았다는 해석도 문제입니다만, 120명 모두 방언 받았다 해도 이것이 기독교 역사에 포함된 모든 성도들의 구원여부 확증의 증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구구절절 따져볼 필요도 없이, 당장 성경의 다른 구절과의 불일치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 누구에 못지않게 방언 잘 했고 또 권장했던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대비해 보겠습니다.

고전12:3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이 문장은 ‘모든 성도는 전부 방언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일지라도 방언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문맥적으로도, 단일 문장으로도, 너무나 명백한 의미입니다.

바울은 14:5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이 문장 역시 ‘성도는 무조건 방언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방언 말하기를 바라지만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원하나”는 강력한 희망을 나타내지만 그렇지 못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표현입니다.


두 번째 미비점은, 첫 번째와 연계됩니다만, ‘특정구절을 모든 성도에게 일률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측면에서, 조금 부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순절 사건시 한 명의 예외도 없이 120문도 전체가 방언을 받았으므로 성도는 누구든지 다 방언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수천 명의 집단 회심 사례가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사건에 이어진 삼천 명 회심(행2:41)과 앉은뱅이 사건에 이어진 오천 명 회심(행4:4)이 그것입니다.

자! 이 8,120명 전원이 모두 방언은사 받았을까요? 성경은 침묵을 지킵니다. 위의 주장대로라면 모두 방언은사 받아 구원 받았어야 하겠지만 확률은 반반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는다면,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늦게 회심한 팔천 명은 차치하고, 먼저 회심한 120명도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의 구원은 방언구사 여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 붙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확정됩니다!

이는, 구원 얻은 강도의 사건(눅23:39-43)과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인 니골라의 경우(행6:5)를 통해, 단적으로 증명 됩니다.

구원얻은 강도는 평생 강도짓만 했습니다. 그에게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도, 27가지 은사도, 기도/십일조/구제/봉사/섬김 등 그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요건인 육체의 일들(갈5:19-21)만 수두룩할 뿐입니다. 천국 입성은 물 건너갔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방언 한 마디 못했습니다!

반면, 니골라는 오순절 다락방 사건(행2장)을 경험한 120문도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일곱 집사의 일인으로 뽑혔을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판단하면, 그는 천국입성 예약표를 확보했던 신분입니다. 그런데 후일 “니골라당”의 원흉으로 기록되었습니다(계2:6). 당연히 방언 받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강도와 니골라의 최후가 어찌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같은 결말에 이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신앙 수준과 공로 때문도 아니었고, 방언구사 여부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로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지, 강도는 최후 순간에 주님을 의지했고 니골라는 스스로 떠났다는 사실이 유일한 원인입니다.

방언 문제와 연계하여 정리한다면, 강도와 니골라에게 있어서, 방언구사 여부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방언의 효능을 심사숙고하도록 만드는 부분입니다.

당연히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즉, 오순절 다락방사건을 근거로, 방언이 모든 성도들의 구원에 필수적 은사라고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 미비점은 방언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은 물론이려니와 결코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 번 살펴보았던 눅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오늘의 주제와 연계하여 다시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의 자랑 중에서 잘못된 행위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토색/불의/간음을 하지 않았고 금식(기도)과 십일조 생활(그것도 철저한)을 했고, 상당한 구제활동도 했을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자랑할 만한 행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리는 분명 토색과 불의를 저질렀고(세금 거두기 위해서는 당연히 동원될 수밖에 없는 행위들입니다), 금식과 십일조와 구제를 못했습니다(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경적(영적)인 답변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답변을 묻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정말 잘했고 세리는 정말 못했다!’는 답변이 나와야 하며, 이래야 솔직한 인간입니다. 인간적 견지에서는 이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반대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세리가 잘했다!”(눅18:14 의역)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대와 100% 어긋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대와 다른 정답을 선포하시는 성경 - 실제로 성경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행위의 정당성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정체성 인식을 주목할 뿐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거절되고 세리가 열납된 유일한 근거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원리(삼상16:7)에 있습니다.

눅18장의 열납 받은 세리 사건을 방언은사에 적용하면 참으로 은혜로운(다행스러운) 교훈이 도출됩니다. 거절과 열납의 근거는 행위 때문이 아니었음은 물론 방언 구사여부도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인간(성도)의 생각은 이럴 것입니다. ; ‘방언 받으면 아주 좋은 일이고 잘 한 일이다. 반대로, 만약 방언은사 못 받았다면 구원도 얻지 못하므로 석고대죄 해야 한다. 따라서 이미 방언받은 성도는 뿌듯한 자긍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만약 주님께서도 같은 생각을 하신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기사만큼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칭찬받고 세리는 꾸중 듣는 내용으로 말입니다(그러나 성경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쩌면 주님은, 방언받아 으스대는 성도보다, 방언 못 받아 고민하는(자기의 죄 때문에 주님께 인정받지 못했고 방언도 못 받았다고 부끄러워하는) 성도들에게, 더 애절하신 마음을 지니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방언하는 자가 누구냐를 식별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애통한 마음으로 주님 찾는 자(방언하든 못하든)를 살피고 계실 것입니다.


네 번째 미비점은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방언은 유창하게 하지만 각종 물의를 야기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봅니다. 방언에 관한 한, 둘 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잘 알려진 유명인사들(목회자 및 신학자들)의 삶을 보면, 방언필수론자들의 주장이 너무 허망스러워 보입니다. 그들을 통해 절제되지 않은 욕망 덩어리를 보고, 타인을 고려치 않는 독선을 쉽게 발견하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주장과 실상이 너무 안 맞습니다.

반면 방언은 못하지만 모범이 될 만한 이들도 봅니다. 어느 분의 책을 보니, 유명 목회자들 중에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다음에 방언 받은 경우가 나옵디다(예를 들면 대천덕 신부). 만약 이런 분들이 방언 받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이분들의 구원 여부에 관한 매우 심각한 논의를 해야 할 판입니다.

방언필수론자들의 주장이 타당성을 지니려면 주장과 실상이 어느 정도는 일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방언은 유창하게 하면서 현실에서는 전혀 성도답지 못한 이들의 행위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 비춘 검토가 아니라 세상의 현상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샤먼(무당)과 외계인과의 교감자들(채널러)의 경우입니다.

입신상태에서 무당들이 펼치는 극단적 행위를 종종 봅니다. 새파랗게 날 선 작두날 위에 올라서서 걷기도 하고 춤도 추지만, 상처 하나 나지 않습니다. 놀라운 현상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엘리야를 본받아 굳건한 믿음으로 이들과 대결할 성도가 있을까요? 함께 작두날 위에 올라서서 누가 이기나 보는 것이지요(요즘 방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목사/장로/평신도를 대표선수로 추천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믿음좋은(방언에 도통한) 성도라 할지라도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당연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최근 어떤 TV에서 외계인과 대화하는 채널러에 관한 프로가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채널링에 관한 제법 다양한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분명 외계인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언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번역도 해 줍니다. 방언과 방언통역 은사와 너무 비슷합니다.

자,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우리(성도)는 “사단도 이적을 행할 수 있으므로 무당이나 채널러의 행위가 인정은 되지만, 그러나 그들은 사단의 힘을 빌린 것이고 성도는 성령님의 힘을 입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저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전혀 다를지 모릅니다. “그게 그거고 차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특히, 방언하는 기독교인이나 무당 및 채널러의 삶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아무런 차이도 발견할 수 없으므로 ‘차이 없음’ 판정은 정당하다.”라고 한다면 반론제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이제는 방언에 대해서도 좀 더 열린, 아니 성경적인, 이해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 방언을 ‘하늘언어’로 규정하여 모든 성도의 기본(필수) 은사로 보는 견해가 지극히 은혜스럽겠지만, 자칫하면 방언이 구원의 보증수표라도 되는 것처럼 오도할 소지가 큽니다. 이러한 인식이 지니는 문제점은 요즘 신흥 명사(VIP)로서의 입지를 구축해 가고 있는 김우현 감독의 책 ‘하늘의 언어-하늘 문을 여는 열쇠’에 대한 독후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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