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 선지학교 창건자는 사무엘이다?

조회 수 3387 추천 수 126 2008.08.01 23:54:16

♣ 삼상10:5(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인터넷 사이트(www.usaamen.net)에서 김삼 목사라는 분이 쓴 『최고 선지자? 신사도 ‘예언’의 현주소』라는 글을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주제가 평소 지니고 있던 관심사에 속하기에 자연스레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글의 전체 요지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을 표합니다. 개인적으로, 김 목사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신사도 운동은 분명 성경에서 벗어난 오류’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용은 직접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확한 성경지식’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부분이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논지에 반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간과된 작은 실수(?)로 볼 수 있어, 그냥 넘어가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왕 발견했고, 또 우리는 성경을 최대한 정확히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겠기에, 꼼꼼히 살펴볼 가치는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제가 되는 원문입니다. “유다-이스라엘 남북 연합군 출병 전 대언사건도 기억하는가(왕상22:1-14; 역대하18장 참조). 「본래 사무엘이 창건했고(삼상10:5) 북 이스라엘 대언자 엘리야-엘리사 등이 이어나갔던 대언자 학교 출신인 제데키야를 비롯한 이스라엘 국내의 내노라는 수많은 대언자들이」 서로가 자신이 받은 영감을 갖고 사악한 왕 아합이 이끄는 연합군이 승리할 것이란 긍정적 예언을 신나게 발표했다.”      

위 인용문 중에서 「  」안의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인 듯합니다. ‘대언자 학교는 사무엘이 창건했고 그 전통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거쳐 아합 왕 당시의 시드기야를 비롯한 수많은 대언자들에게로 이어졌다.’

여기서 ‘시드기야 등을 엘리야와 엘리사의 후계자’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입니다만(구약 선지자는 결코 승계되는 직분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승계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지요), “본래 사무엘이 창건했고”라는 설명은 크게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언자학교(선지학교)가 사무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학교와 관련되는 몇 가지 사항들을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김 목사가 “대언자”라 표현하는 구약 특별 직분인 “선지자 및 선견자”와 복합어로 사용되고 있는 “생도”라는 단어의 어의(語義)입니다.

개역한글성경(구약)을 기준하면, 아브라함에게 최초(창20:7)로 사용된 ‘선지자’는 약 294회, 삼상9:9절에 처음 표기된 ‘선견자’는 약 25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 선지자 : (히) 나비(nabi) = 예언자(prophet) 또는 영감받은 대언자(inspired spokesman)
  ○ 선견자① : (히) 로에(roeh) = 보다(see=라아 raa)에서 파생된 말로써 ‘보는 사람’ 의미  
  ○ 선견자② : (히) 호제(hozeh) = 보다(see=하자 haza)에서 파생된 말로써 ‘보는 사람’ 의미
  ○ 생도 : (히) 벤(ben) = 아들, 손자, 구성원의 일원 ⇒ 선지자의 생도들 = 선지자의 아들들

논리전개를 위해 일단 용어의 의미를 통일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말 ‘선지자/선견자’와, 히브리말 ‘나비/로에/호제’는, 의미상 ‘선지자’로 통합해도 무방합니다. 대상29:29절이 그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선견자(로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나비) 나단의 글과 선견자(호제) 갓의 글에 다 기록되고”

여기에다 생도(벤)는 선지자의 제자 즉 차세대 선지자를 지칭하므로, 결국 ‘나비/로에/호제/벤’을 몽땅 ‘선지자’로 번역하더라도 의미상 오류는 아니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힘들게 히브리어까지 찾아본 이유는 ‘선지자’라는 단어의 실제적 의미를 더 깊이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선지자’라는 용어를 대할 때, 유념사항(留念=기억해야 할 것)과 유의사항(留意=조심해야 할 것)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로 유념해야 할 점은 ‘선지자는 결코 인간에 의해 지명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지파에 관계없이, 반드시 하나님의 지명을 받은 자여야 합니다. 이것이 혈통에 의해 자동 승계되던 ‘왕 및 제사장’ 직분과 상이한 가장 큰 특징입니다.  

위에서 히브리어 ‘로에/호제’를 살필 때 ‘보는 사람’이라는 뜻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의미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능동적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꿈과 이상으로 ‘보여 주시는 것만 보는’ 지극히 수동적인 현상을 의미합니다.

이를 영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즉, 구약시대 선지자의 유일한 요건은 ‘성령임재 여부’였는데, 성령임재 형식이 신약시대와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구약시대에는 ① 성령께서 만인에게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에게만 임하셨습니다. ② 특정인에게 임하신 성령도 평생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사역이 종료되면 떠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신약에서는 모든 신자의 심령에 임하신 성령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구약의 성령임재 특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특정인에의 한시적 임재 즉, 하나님의 때와 필요에 따른 임재’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둘째로 유의해야 할 점은, 첫 번째 유념사항에서 파생되는 것으로서, ‘성경에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1) 동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임재 기간은 ‘참 선지자’이나 그 기간이 종료되면 더 이상 ‘선지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세 시대의 칠십 장로의 경우(민11:25)와 사울 시대의 사울왕(삼상10:10) 및 그의 사자들(삼상19:20) 등이 좋은 예라 할 것입니다. 만약 성령임재 기간이 지났음에도 계속 ‘예언’ 행위를 한다면 ‘거짓 선지자’로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성령임재가 없음에도 스스로 ‘선지자’로 행세하는 경우입니다. 느헤미야를 괴롭혔던 스마야(느6:12)와 아합 왕 시절의 시드기야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왕상22장)은 성령임재 없이 예언했습니다. 이는 ‘죽임’에 해당되는 범죄(신18:20)입니다만, 오늘 검토와 관련하여 정의한다면 ‘선지자라는 용어만으로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까지 살핀 내용을 기억하면서, 선지학교에 얽힌 비화(悲話=슬픈 이야기)를 재고(再考)해야 합니다. 선지학교는,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불신앙으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을, 출현하지 말았어야 할 그런 조직체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지학교의 실질적 창설자는 북왕국 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입니다! 10지파를 이끌고 북왕국을 시작한 여로보암이었지만(이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종교적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습니다. 여로보암은 북왕국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갈까봐 심히 걱정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통치력의 약화로 비화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2가지의 중요한 타개책을 강구합니다. 첫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설치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필요 없다고 호도한 것입니다. 둘째는 레위지파만이 수행할 수 있는 제사장 직분을 변개하여, 일정한 과정을 이수하면, 원하는 자 누구든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 2번째 개혁안에서 그 유명한 ‘선지학교’가 시발되었던 것입니다!(대하13:8-9).  

아직까지 성경에서 남왕국 유다 소속 선지학교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도처에 선지학교가 난립했습니다. 벧엘(왕하2:3), 여리고(왕하2:5), 길갈(왕하4:38), 에브라임 산지(왕하5:22), 요단강가(왕하(6:1-7) 등이 확인되고 있고, 이 외에도 더 많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물론 엘리야나 엘리사는 선지자의 생도들과 긍정적 교제를 나누었고 때로는 사명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선지학교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성경적 근거로 해석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선지자와 선지학교’에 관한 성경의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먼저 생각했던 것은, 구약의 선지자는 성령임재가 유일한 요건이며 간혹 성령임재가 보증되지 않는 ‘거짓 선지자’도 상당수 존재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했던 것은, 선지학교는 일종의 배교정신에서 비롯된 비신앙적 실패작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지학교 창건자는 사무엘이다.’라는 이해는 근거가 매우 취약하다 할 것입니다. 성경을 꼼꼼히 살피지 않고 평소의 막연한 기억에 의지함으로써 초래된 착각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삼상10:5절을 잘못 읽었기 때문일는지 모릅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허기는 일부 주석도 “선지자의 무리”(헤벧 네비임)에 대해 김 목사와 유사한 설명을 합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사무엘의 영적지도를 받으면서 훈련을 받던 자들이었던 것 같다(L.Wood, F.R.Fay). 즉 이들은 블레셋에 의해 오랫동안 압제를 받던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적 혹은 신앙적 열심을 갖게 된 자들이 당시 대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의 지도를 받기 위해 이스라엘 각처에서 모여들어 무리를 형성한 일단의 선지훈련 생도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리 중 모두가 신적(神的)인 소명을 받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위 주석에서 사용되는 “아마도, 것 같다, 알 수 없다.” 등의 용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에 명기된 확실한 진실이 아니라, 개인의 ‘그럴는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반영된 ‘추정’입니다. 성경의 사실과 학자의 추정은 그 진실성에 있어서 동동하게 취급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주석이나 김 목사의 ‘추정’에서 가장 크게 의문시되는 점은 “하나님의 산”(기브앗엘로힘)으로 표기된 기브아는 사무엘의 주 활동무대가 아니었음을 간과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위 주석처럼 산당에서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를 사무엘의 제자들이라고 확신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나치게 비약된 억측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같은 자의적 추정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추정해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는지 모릅니다. 즉, ‘사무엘의 직접 신앙지도를 받는 생도들인가 라는 점에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환상을 예언함으로써, 사울에게 영적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사울이 부친의 암나귀를 찾을 때 사무엘이 가르쳐 줬던 것(이것도 성령께서 미리 보여주시고 알려 주셨던 일입니다)과 동일한 맥이라고 말입니다.  


긴 시간을 투자하여 세심히 검토해 봤으나, 김 목사의 ‘사무엘이 선지학교를 창설했다.’는 주장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선지학교는 사무엘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평소 확신을 재확인 받았을 뿐입니다.

우연히 접한 글 한 편을 매개로, 평소 관심사를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더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주님과함께

2008.08.05 23:11:52
*.7.13.27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얼마전에 아멘넷을 알았습니다.
물론 김삼 목사님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 글을 접했고 김목사님의 블로그에 가끔식 드나듭니다
전반적으로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것과 기독교의 진리를 위해 수고하신다는 개인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물론 모든 부분을 다 수용할수 없는 저만의 한계도 있구요

다른 글은 동의하고 유익할 부분이 참 많은 분이시고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박식하십니다.
열정도 대단하시구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김목사님의 십일조에 대한 글은 좀 의외입니다
^^외람되지만 오늘 수 시간에 걸쳐서 아멘넷의 문제의 십일조에 대한 김목사님의 칼럼과
무수한 댓글을 탐독(?)하느라 개인적인 일정마져 유보시켰습니다.

거기서 맑은바람님의 글도 봤구요^^
원래는 김목사님의 칼럼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써볼량으로
시간을 투자(?)했습니다만 지쳐버렸습니다요 ㅠ_ㅠ

나중에 성령께서 제게 다시금 불일듯한 감동을
혹시라도 허락하신다면 그때 할까하네요...

아니고 죄송 ㅎㅎㅎ~

주님과함께

2008.08.05 23:15:57
*.7.13.27

본문 내용과 동떨어진
사담이라 다시한번 죄송합니다...

무풀방지 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좋은것은 마니 써먹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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