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상16:22(나의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해하지 말라).

인간은, 본질적 연약성(죽음의 공포)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절대자(종교)를 만들어 의지합니다. 종교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됩니다만, 교리체계의 윤리성/도덕성/체계성/논리성/합리성 등을 기준하여, 고등종교와 저등종교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고등종교의 형식을 모방하지만 내용이 저등종교 수준인 유사종교를 ‘사이비’라 합니다.

고등/저등/사이비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종교에는 특수한 직분이 있습니다. 소위 절대자와 인간을 매개하는 ‘성직자’ 그룹이 그것입니다. 이 직분은, ‘절대자의 의중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대리자’라는 논리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성직자는 일반 신도와 완연하게 구분되는 신분으로 인식 및 대접받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종교들의 성직자상이야 어찌되었든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타종교 성직자나 무당 등의 정체성을 왈가왈부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기독 신앙이라면 성직자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잘못 이해할 경우 미몽을 헤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구약 시절에는 성직자 그룹이 존재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그들입니다. 특히 제사장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뜻)을 전달(선포)하는 대리자였습니다.

문제는 신약성경입니다. 엡4:11절은 교회의 지도권 관련 직분을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와 교사”로 명기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별다른 오해없이 받아들여졌던 이 직분들은, 중세교회에서는 ‘신부’로, 개혁교회에서는 ‘목사’라는 특수신분으로 고착 수용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구약의 ‘제사장과 선지자’ 직무가 신약의 ‘신부 내지 목사’로 승계되었다는 것이 정통신학(?)의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별도로 다루어야 할 아주 미묘하고 복잡한 주제입니다. 따라서 오늘 다루기에 적절치 않으므로 한마디로 정리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자(예표)인 구약에서 왕/제사장/선지자에게 분산 위임되었던 교회의 지도권(리더십)이, 성취인 신약에서 주님 한분께로 통합되어 완성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구약 지도권이 신약의 신부나 목사 등에게 전이된 것’이라는 논리(신학) 따위가 끼어들 틈조차 없습니다. 목사든 장로든 인간은 결코 주인공이 아닙니다. 아주 쉬운 이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초적 이해에도 이르지 못한 일부 기득권자들은 매우 한심스러운 말을 입 밖에 내곤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일 뿐 사람의 종이 아니다.”라는 망언을 말입니다.

이 말은 미국 풀러 신학교 교수인 레이 앤더슨의 말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헛소리인데, 젯밥에 마음 빼앗긴 수많은 삯군 목사들은 뜻도 모르고 흥얼대곤 합니다.  

자칭 ‘주의 종’ 신봉자들은,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근거로 삼고, 여기다 온갖 성경 구절들을 끌어다 붙여, “감히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을 대적하려 하다니!”라며 평신도들을 윽박지릅니다. 그 기세가 참으로 등등하여 겁날 지경입니다.

하지만, “감히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을 대적하려 하다니!”라는 강변에는 야무진 착각이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 ‘기름부음’의 참 의미 자체를 모릅니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에서는 특정한 이에게만 기름부음이 행해졌습니다. 성령님께서 제한적으로 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의 신약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임재 하셨습니다(이게 임마누엘입니다).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비교할 수 없는 차이점입니다.

신약에서는 목사만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목사는 단지 교회 지도권의 일부인 ‘가르침’의 직능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다 같이 교회(몸)를 이루는 지체요 형제인 것이지요. 목사는 교회의 유일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아닙니다!

둘째, 같은 맥락에서 모든 성도가 ‘주의 종’입니다. 목사는 주의 종이고 평신도는 사단의 종 아닙니다. 목사는 일급 종이고 평신도는 이급 종 아닙니다. 모두 ‘주의 종’입니다!

이것조차 이해 못하는 일부 목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심히 안타깝습니다. 해서 아주 쉬운 비유로써 알려 드리겠습니다.

학급은 담임선생님과 반장과 반원들로 구성됩니다. ‘주의 종’ 주의자들은 목사가 ‘담임선생’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님께서 담임선생님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마23:8=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목사는 기껏해야 ‘반장’일 뿐이라는 암시입니다. 만약 목사가 담임선생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면 이는 주님 자리를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반장과 반원들은, 선생 신분이 아니라, 다같이 학생(성도) 신분입니다. 너무 쉬운 이해 아닌가요!

셋째, ‘대적’이라는 단어의 무서움입니다. 이는 오직 ‘한 무리’인 성도를 성직자와 평신도로 차별화 시키려는 음흉한 궤계입니다. 목사와 평신도는 이분적 신분이 아니요 적대적 관계도 아닙니다. 다 함께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하는”(롬8:28) 형제들입니다.

성경을 바로 아는 평신도들은 갈피 못 잡고 자의적인 ‘주의 종’ 타령으로 칭얼대는 목사들을 매우 슬픈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하루빨리 제 정신 차리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그러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목사들은 온갖 이론들을 총동원하며 고집 꺾지 않으려 합니다. 아주 몸부림을 칩니다.

이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말씀이므로 아니라 부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목사 입장이 강화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결코 신약교회 목사들의 손을 들어 주기 위해 기록케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이 목적으로 자주 인용되는 다른 구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본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문맥적으로 보면 왕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금하는 내용이지 결코 설교자와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대한 주의 깊은 검토나 비판을 정죄한 내용이 아니다.”(무질서한 은사주의/부흥과개혁사. p.15).

맥아더 목사는 ‘목사들이 오늘 본문을 근거로 평신도들의 정당한 이의를 원천봉쇄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지로 말한 것입니다. 타당한 이해입니다(물론 ‘왕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금하는 내용’이라는 주장은 크게 잘못 본 오해입니다만).

역대상 16장은, 이리저리 유리하던 법궤의 예루살렘 안치식을 묘사한 내용이며, 7-36절은 다윗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다윗의 설명에 포함된 분문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윗이 직접 인용하는 형식입니다. 그 의미는 ‘이방족속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17절 하반부의 “이스라엘”이라는 명사를 단수(야곱의 별명)로 볼 것이냐 아니면 복수(이스라엘 민족)로 볼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단수와 복수로 혼용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18절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복수 개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분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족장 개개인 보호를 의미한다기보다, 복수인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영어성경(NIV)은 ‘my anointed ones’와 ‘my prophets’로 번역함으로써, 복수의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함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결국 맥아더 목사는, 비록 일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본문이 신약교회 목사의 권위 보증 구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일부 주석도 “나의 선지자”를 주석하면서 위와 비슷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비멜렉으로부터 하나님이 특별한 보호를 받았을 때 ‘선지자’라는 칭호를 들었다(창20:7). 또한 이삭은 임종 직전 야곱에게 예언적인 축도를 하였으며(창27 :27-29), 야곱도 그의 아들들에게 역시 예언적인 축도를 하였다(창48:19; 49:1).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 또한 이방나라에 대해 선지자요 제사장 나라이다(벧전2:9). 그리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따라 선택된 자로서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호 아래 있을 뿐 아니라 온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마5:14; 엡1:4; 유1:24).』

※ 글의 주제와 무관하지만, 이 주석에 포함된 오류는 지적하고 가겠습니다. “또한 이삭은 ‘임종 직전’ 야곱에게 예언적인 축도를 하였으며(창27:27-29)”라는 표현은 오류입니다. 이삭은 ‘임종 직전’ 축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가 죽음을 예감하며 축도한 것은 사실이나 그는 그후 적어도 20여 년 이상 더 생존했습니다. 평신도가 아닌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라면 사소한 부분에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할 것입니다.

위 주석 또한 소수의 개개인(아브라함 등 족장들)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전체(이스라엘 백성들)를 고려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해석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내가 그 누구도 너희들에게 손 못 대도록 보호했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이러한 원래의 의미는 땅찜(짐작)도 못하고, 이 귀한 구절을 오늘날 목사라는 특정 직분자 옹호 구절로 악용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한 처사입니다. 엄한 꾸지람 들어 마땅한 일입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는 결코 특정 개인이나 직분을 두둔하기 위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항상 주님을 정점으로 한 공동체(무리, 백성)를 대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구절들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학지식이 일천한 평신도 입장에서 전문가인 목사들의 현학적인 이론에 휩쓸려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비록 전문가일지라도 상당한 오류와 미비를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만 주의 종이고 평신도는 주의 종 아닌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도 목사에 뒤지지 않는 ‘주의 종’입니다. 다 같이 ‘주의 종’이기에, “서로 돌아보아”(히10:24)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8:28) 것이 옳지, 목사에게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며 성도의 의무(성경을 자세히 살펴 연구하는 것)를 포기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결론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일부 목사들이 “감히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에게 대적하려 하다니!”라는 말로 윽박지르더라도, 엉터리 주장에 주눅들지 말고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성경이 평신도(모든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 변명 : 사용된 용어와 표현이 다소 과격하여 ‘목사 직분에 관한 부정적 주장(목사무용론 같은)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마음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너무 뒤틀려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키고는 있으나, 목사 직분은 분명 성경이 허락하고 또 교회에 꼭 필요한 지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목사를 ‘왕따’ 시키자는 선동이 아닌, 목사 본연의 역할회복을 갈구하는 호소임을 말씀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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