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인간다운 지극히 인간다운…

조회 수 1340 추천 수 100 2008.11.01 07:53:13

※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 대한 독후감입니다(미공개)



무종교주의자 또는 타종교인들에게, 기독교와 천주교의 호오(好惡)를 묻는다면, 우호적인 반응을 얻는 쪽은 천주교이다. 기독교는 독선적/배타적 인상을 주는 것을 넘어 오히려 꺼리는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이에 비해 천주교는 ‘화합과 통합’을 표방하는 세계종교화를 그 목표로 추구하는 바, 인본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진화론의 인정 및 불교와의 화합 제스처 등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상 진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리타분한 교리로 미주알고주알 따지고 융화를 거부하는 기독교보다는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천주교가 훨씬 마음 편한 상대인 것이다. 기실 기독교는 인본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데 반하여 천주교는 인본주의를 옹호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와 천주교는 그 지향점이 무척 다르다.

초기에 로마의 정치권력(왕권)과 손잡고 세계 지배를 추구한 방법이라든지(중세, 아니 근세까지 천주교는 식민화 내지 자국영향력 증대의 전초 역할을 담당해 왔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성모 마리아나 성직자와 같은 인간 중보자의 인정문제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다.


인간중심의 천주교 논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 소설책이 있다.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이우승 역/성바오로출판사)가 그것이다(같은 출판사에서 구혜영 역 “성채”로도 발간하였다). 1941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는 이 책은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 신부의 일생을 통해 이상형의 인간상을 그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책 전반에서 치셤 신부의 사역은 천주교와 크게 대치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천주교가 추구하는 이상형을 인상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역자(이 우승)의 말을 들어보자.

『……즉 전 인류는 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형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다르다거나 사상이 다르다거나 종파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대립 내지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치셤 신부는 그의 생활환경에서 얻은 개신교와의 융화된 사상 때문에 본국에 있지 못하고, 중국으로 선교사가 되어 떠난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가서도 바로 그곳에 높은 도덕률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고 공자의 가르침을 흡수해서, 자기 안에 독자적인 참 신앙의 확립을 완성시킨다. 주인공은 바로 여기에서 타종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경화되고 대립된 대치상태를 극복해 간다. 그리하여 그는 이 대립에서 오는 서먹한 인간관계를 융화케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신앙의 기쁨을 되찾아줌으로써 깊은 감동과 용기를 갖게 해 준다.

……그리스도교 교파간의 알력이 신자들에게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주인공 치셤 신부를 통해 종파간의 불상용(不想容)을 해소시키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류의 이상으로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노자의 도교사상과 공자의 유교사상까지도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하려고 시도한다. 즉, 진리는 하나이며 둘이 아님과, 온 인류가 한 형제라는 것을 주인공이 입증하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들이 나오는지 모른다. 얼마나 가슴 치는 대목들이 나오는지 모른다. 많은 책을 번역해 보았어도 이 책처럼 내 가슴을 두드린 적은 없었다……』  


역자의 말은 사실이다. 책을 읽으면서 역자가 느낀 감동을 독자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주인공 치셤 신부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며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더욱이 인간을 향한 사랑 - 그 고귀한 박애정신과 실천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을 가져온다.

치셤 신부의 이 아름다운 생각과 삶이 가져다주는 감동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철저한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진리의 왜곡, 즉 ‘모든 종교의 동질화’라는 오류마저도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정도이다. 정말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책이다. 특히 진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감동의 도가 더욱 클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님의 무리인 기독교인은 이 책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껴야 한다. 인간적인 치셤 신부의 삶에서는 비난할 만한 그 어떤 명분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치셤 신부의 삶과 사상을 비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비방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 자체만으로 치셤 신부에 대한 아니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낄 정도이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에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이 책의 내용이 어쩌면 우리의 믿음인 진리와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깊은 영의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구약성경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 강조점에 따라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이스라엘 민족 측면에서는 ‘너무나 인간적인 선택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정의하는 것도 그 한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선택한 것들은 모두가 인간적이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말이다. 실제로 강력했던 가나안을 강하다고 평가했던 것도 옳았고, 가나안 족속을 진멸치 않고 함께 산 것도 인간적이었다. 그들은 늘 그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옳지 않다고 꾸중만 하신다. 엄청나게 노하신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니었다. 다만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백성이었을 뿐이었다. 인간적인 판단에 옳아 보이고 최선이라 생각되는 것을 계속 선택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의 연속이 바로 구약이다.

세상의 정통종교 중에서 악을 권장하는 종교는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옳아 보이고 높은 윤리성도 지니고 있다. 이 책의 치셤 신부처럼 바람직한 인격도 구비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영의 문제는 ‘옳아 보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것의 마력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이스라엘이 수천년 동안 그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극복하지 못했을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리만큼 ‘옳아 보이는 상태’(치셤 신부처럼)를 우리는 어떻게 진리와 대비하여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그 상태를 ‘옳지 않은 상태’라고 말씀하시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세상종교가 다같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주권(근원)의 문제였다. 이스라엘은 현실을 보며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고 세상종교는 현상을 보며 인본주의적 관념을 도출한다. 인간을 선(善)과 연결시킬 때 그 인본주의의 열매는 아름다워 보이고 옳아 보인다. 우리가 현혹될 수밖에 없음은 그 결과의 유사성(옳아 보이는 것) 때문인데,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모조품이 진품보다 더욱 현란해 보인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영적원리 한 가지를 생각해 보자.

성경이 열매를 최고의 가치로 강조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간혹 있으나 이는 큰 오해이다. 접붙임의 원리를 기억해야 한다. 근원(뿌리)이 중요한 것이지 가지(열매)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열매는 맺혀지는 것이다. 곡식이 곡식인 것은 그 뿌리가 곡식이기 때문이며 가라지가 가라지인 것은 그 뿌리에 인함이다.

유능한 농부는 곡식과 가라지의 차이점을 잘 안다. 사이비 농부의 눈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추수 때가 되면 변명할 수 없도록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유능한 농부처럼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안다. 사이비 농부가 가라지를 곡식이라 우기더라도 미소 지을 뿐이다. 정말로 비슷해 보이고 진정으로 옳아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 근원을 본다. 그 뿌리가 예수에게 견고하게 박혀 있을 때에라야(예수에게 기생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예수에게 확실히 뿌리내린 상태여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진리라 인식하며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천주교의 노리는 바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 부드러운 교리 속에 감추어진 날카로운 발톱은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천주교는 결코 이 발톱을 함부로 내 보일만큼 바보스럽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온화하고 포용하며 인간답다.

그렇다, 바로 이 인간답다는 데에 너무도 엄청난 영적 사기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인간다운 것은 참으로 불행하게도, 기독교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다! 기독교는, 아무리 인간답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더라도, 오직 예수님을 닮으려 애쓸 뿐이다. 예수님은 결코 인간답다는 것을 증명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다우심만 증명하시고 승천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할는지도 모른다.

이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천주교에는 기독교와 융화될 수 없는 이질성 아니 적대성이 존재하고 있다. 천주교는 예수님께 뿌리박은 진리가 아니라 단지 예수님께 기생하는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론의 ‘옳아 보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표피적인 유사성에 판단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치셤 신부가 “제발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 지향을 보아 제 생애를 심판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볼 때, 기독교인의 간구와 상당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인품과 인격과 품행의 고상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예수님 이외의 구원의 길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반드시 좁을 길을 고집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치셤 신부처럼 보편적이지도 대범하지도 않다.


작가의 의도가 잘 나타난 치셤 신부의 말을 살피면서 마무리하겠다.

『우리들 모두가 흔히 잊어버리는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죠. 오늘날 교회에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확고한 신앙만 지니고 있다면 누구든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누구든지……그렇습니다. 불교도이든 회교도이든 도교의 신봉자이든 아니 선교사를 죽여 그 사람 고기를 먹어버렸다는 무지한 식인종도……스스로가 돌아보아 가책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겁니다. 그게 하느님의 넓으신 자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의심 많은 불가지론자를 보시더라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실 겁니다. 약간 비꼬는 투로 이런 말씀 정도는 하시겠죠. ‘보아라. 나는 여기 있다.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나와 천국이 여기 있다. 자, 들어오너라.’』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쪽 문을 택해서 천국에 들어가듯이, 새로 오시는 선교사들은 그 다른 문을 택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분들이 자기의 믿음의 길을 따라 신앙과 자선을 베풀 권리를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이곳에서 자기들의 교리를 전하고 싶어 한다면 역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위와 같은 진리를 선포하셨는가? 또 교회는 언제 위와 같은 교리를 가르쳤는가? 성경을 이처럼 멋대로 왜곡시켜도 되는가? 각자 양심에 따라 구원받는다면 갈보리 십자가는 무엇 때문에 필요했는가? 천국 문이 수십 개도 더 되는가?

두 번째 문장에서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사를 지칭한다. 치셤 신부는 기독교 선교사들보다 마음이 훨씬 넓은 인격자이다. 참으로 인간다운 인격자의 생각이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노리는 핵심이다. 인간답다. 인간답다! 참으로 인간답다는 바로 여기에 교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인간다운 사상을 덧씌우고 있으나 기실은 우리 믿음을 엉뚱한 곳으로 오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책이므로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할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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