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난 항상 하나님 편이다!

조회 수 1031 추천 수 127 2009.08.08 00:32:09

♣ 고전5:10(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각종 신앙서적이나 여러 설교들을 보면, 신학자/목회자마다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것을 봅니다. 때론 자신의 견해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옹고집을 만나기도 합니다. ‘나는 항상 옳다!’는 뜻인데, 실제는 세상과의 충돌입니다.  

비단 전문가들(신학자/목회자)만 그런 것이 아닌 듯합니다. 인터넷 상의 각종 신앙관련 토론을 보면, 일반 성도들 역시 동일한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이 또한 세상과의 충돌입니다.

이처럼 전문가 및 비전문가를 불문한 모든 성도들이 신앙에 대한 맹목적 열정과 확신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인지 한번쯤은 냉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의 충돌 현상이, 과연 성경에 부합되는 태도인지, 인간적으로 권장할만한 자세인지에 관해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도 해석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은 구절일 듯싶습니다. 문맥적으로는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데, 단일 구절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학자들의 주석을 참고해도 명쾌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해서, 늘 그렇듯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교훈 받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문맥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1장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4장까지 분쟁과 분파문제가 지적되고 있으며, 5장부터는 음행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범위를 좁혀 5:9-13절로 한정하더라도, 역시 음행문제가 주제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음행문제와 관련된 처신’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까지는 비교적 쉽게 정리될 것입니다.

본문 하반절 즉,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에 중점을 두면, 이는 세상과의 타협 내지 동화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겠느냐?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죄를 범해도 그들과 모든 관계를 끊고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받을 수 있습니다. 10절만 뚝 떼어서 문자적으로만 보면 충분히 가능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러나 찜찜합니다.  

또 혹자는 11절의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와 13절의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는 말씀을 부각시켜, 세상과의 분리나 은둔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당수 주석가들도 본문(때로는 조금 확대된 본문=5:9-13)을 세상과의 【타협 내지 동화】 대 【분리 내지 은둔】구도로 이해하여, ‘악한 자들과의 관계 포기와 이에 따른 불이익 및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옳다.’는 해석(Chrysostom)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 주제에서 약간 벗어납니다만 크리소스톰 및 그 지지자들의 해석의 미비점 하나는 짚고 넘어가는 것이 유익할 듯싶습니다. 그것은 “나는 음행/탐심/토색/우상숭배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죄를 범하는 자들과의 인연을 끊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깔고 해석에 임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죄를 극복한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고 성령세례 받았어도, 죄 속에 빠져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성도는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데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특정한 죄를 제외한 어떤 죄라도 하나님의 정죄를 당치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한 마디로 죄와 무관한 증류수와 같은 성도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오시할 수 있는 무죄한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악한 자들과의 관계 포기와 이에 따른 불이익 및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옳다.’는 해석(크리소스톰)은 잘못된 관점일 수 있습니다. ‘악한 자’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깊은 대석학들의 해석이므로 긍정적으로 참고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학자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습니다(조금 전에 지적했던 가능한 미비점). 비록 미흡할지라도 나름대로의 교훈을 더 찾아보는 것이 마땅한 자세입니다.

이 문제를 마10:16절의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는 말씀과 연계시키고 싶습니다.

‘나’는 주님이시고, ‘너희와 양’은 제자들이고, ‘이리’는 세상입니다. 전도를 위해 세상으로 파견된 제자들은 온갖 핍박과 거부와 박해를 감내해야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 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상황을 주시면서, 제시하시는 대처요령이 2가지입니다! 뱀과 비둘기입니다.

먼저, “뱀같이 지혜로워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고대 근동지방의 속담을 인용하신 것이라 합니다. 성경도 뱀을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하고 있고(창3:1; 고후11:3), 애굽인들도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여겼다 합니다. 뱀은 위험에 처하면 신속히 빠져나가는 능력이 뛰어난 동물입니다. 이는 뱀이 매우 신중한 분별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리처럼 생명을 노리는 세상 속에서 뱀의 분별력을 닮은 지혜로써 헤쳐 나갈 것을 주문하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라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 “비둘기같이 순결하라.”입니다. ‘순결’의 헬라어 의미는 ‘부패한 것이 혼합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솔직하고 순진하다.’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비둘기가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듯, 제자들도 세상 속에서 평화롭고 순결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주문인 것입니다. 역시 ‘세상 속에서’라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뱀과 비둘기를 함께 거론하신 주님의 본뜻은,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전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비둘기의 순결과 뱀의 분별(지혜)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진실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해석과 이해는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평범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의 적용문제로 나가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서두에서 ‘세상과의 충돌’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성도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해 엄청난 반감을 지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끼리도 조그마한 교리적 이해 차이만 나도 대단한 분노를 숨기지 않습니다.

이때 어느 누구든 예외 없이 【나야말로 하나님 편이다!】라고 확신합니다. 목회자든 평신도는 전부 이러한 태도를 지닙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도, 자신과 일치되지 않는 성경이해를 가진 성도도, 모두가 멸망의 자식으로 단죄되어 버립니다. 수용할 수 없는 원색적인 말까지 동원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진리를 수호하고 싶다는 충정으로, 열변을 토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내 편일 것’임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누가 하나님 편이냐’에 관한 판정권이 인간에게 없다는 진리를 숨기지 않습니다(마25:31-46). 이는 인간의 소관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의 ‘나만큼은 확실한 하나님 편일 것’이라는 자기 확신은 얼토당토않은 ‘자기 속임’일 수가 있습니다.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이른 후부터는, 위에서 기억하시라 권해 드렸던 ‘세상 속’이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어쩌면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울 사도의 깊은 속뜻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칫 ‘전부 기독교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영적 속임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너무나 그럴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아닌 이상 기독교인만의 세상은, 물고기가 못 사는 증류수처럼, 사람이 살기 힘든 불모지일 뿐입니다(중세 기독교 역사가 증명합니다). 인간 세상은 죄인들로 가득 차야 할 필요성조차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지독한 역설입니다).

이제 정리하기에 앞서, 현실을 통해 증명 받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의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아닙니다. 천주교는 양보하더라도 불교와 회교와 무속종교를 믿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가족이나 친구나 동료와 관계를 단절하고(위에서 살핀 신학자의 해석처럼) 고고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이들이 세상종교를 믿더라도 이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절대로 끊어서는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도 좋고 회교도 좋다며 다원주의를 표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니면 성경도 부인하고 주님 신성도 부정하며 자유주의를 지지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는 단지 현실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불신자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해도 그곳에는 성도들도 살지 못합니다(증류수와 동일). 비현실적 세계를 기대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제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원리가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의 삶”입니다. 성도라 해서 죄와 분리된 ‘세상 밖’(천국)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만 가지고 해석하려면 완전한 해석에 이르기 어렵습니다(앞에서 살핀 것처럼). 이는 혹자가 이해하듯, 세상과의 단절도 아니요 세상과의 동화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슬기롭게 사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 살되, 잘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반드시 ‘세상 속’이지 절대로 ‘성도들 속’이 아님)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절대 필요한 기본원칙은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입니다. 이는 긴장과 이완의 영적원리임을 의미할 수 있지만, 분리와 단절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나를 반대하는 세상은 물론이요 나의 견해와 다른 성도들을 향하여, ‘나는 항상 하나님 편이므로 안전하고 너는 무조건 지옥행이다.’라는 단정적 자기 판단으로, 원수 대하듯 하는 태도는 전혀 성경적이 아닐 수 있습니다. 더욱이 신빙성이 전혀 없는 ‘나의 하나님 편 됨’을 내세워,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윽박지르는 행위도 정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연계 해석한 마10:16절 포함)은, 세상이란 【성도가 대립각을 세우거나 아니면 경원시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포용하고(세상을 밟고 살 수밖에 없으므로) 진리로 극복할 대상(필수 상대)】임을 암시하는 구절일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는 지옥자식, 나는 하나님 편”이라는 자의적인 단정을 함부로 내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좀 더 깊이 묵상해 봐야 할 주제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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