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조회 수 1219 추천 수 98 2009.09.19 11:38:13
                    
♣ 사58:1-6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2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옳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생각도 그렇지만, 각 조직체의 책임자 정도 되는 인물들의 의중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김심(金心=김 대통령의 마음)이니 노심(盧心=노 대통령의 마음)이니 하는 말로 빗대어, 누가 그 속마음을 정확히 짚어내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정된 김심이나 노심이 본인의 진짜 생각과 정확히 일치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 성도들은 설교(說敎)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대언되는 하나님 말씀’(설교=하나님 말씀)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가들(특히 칼빈)의 신학적 이해로서, 대다수 목회자들이 수용하여 평신도들에게 막연히 주입시킨 결과입니다.

하지만 ‘설교는 직접적인 하나님 말씀’은 아닙니다(설교≠하나님 말씀). 일부 신학자들이 규정한 설교의 신학적 정의에 사로잡히면 곤란합니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설교란 ‘설교자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힘입어 깨우침 받은 교훈을 제삼자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설교란, 곧 ‘설교자가 짚어낸 하심’(하心=하나님 마음)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심’도 하나님의 진짜 마음과 정확히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잘못된 설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 성경해석 원리들을 강조합니다만, 특정 원리만으로 충분할 수 없으며 상호 보충적 방법을 골고루 적용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입니다. 언어/문화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문맥적 해석을 유지해야 하며 신학/교리적 지식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강조하는 ‘성경해석 요령’ 중에는 ‘행간 의미’ 원리도 포함되는 것으로 압니다. ‘행과 행’ 사이의 표기되지 않은 의미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동의할 뿐 아니라 더욱 확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행간의미는 물론 기록된 문자 이면의 의미까지 고려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한 ‘김심, 노심, 하심’의 영역에 해당된다 할 것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주제로 ‘①형식주의를 벗어 버려라. ②약속하셨던 축복을 주신다.’는 요지였습니다. 그러나 설교 제목과 요점은 기대할만 했으나 편의주의적 해석과 편파적 설명에 불과해 크게 실망했습니다. 간단하게 4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첫째, 본문이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 이후의 일’이라는 설명 자체가 오류입니다. 본문은 귀환하기 약 200여 년 전에 행해졌던 ‘예언’에 속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큰 문제는 아닙니다(그래도 설교 준비하며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잘못은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형식주의를 벗어 버리라.’는 항목은 3-5절을 근거로 내세우며 “금식”이 관건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3-5절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충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금식을 알아주지 않은 이유는 금식하면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면서 정말 기도는 전혀 하지 않았을까요?(물론 외형상의 금식과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금식 잘 했고 기도도 잊지 않았습니다. 형식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기(長技)였으므로 위 설교는 잘못 짚은 것입니다.

아울러 갑자기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는 말씀을 인용하며 ‘금식기도는 정성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하는 데에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금식기도는 진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를 강조하는 구절이 아니며 따라서 이렇게 설명해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전혀 엉뚱한 해석일 뿐입니다.

위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짚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뒤따라 나오는 6-7절의 하나님의 진짜 속마음과 다르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결여되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바른 금식이 아니었기에 열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했던 것처럼(이 설교처럼) ‘온갖 인상 다 써가며 밥 굶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금식은 ‘배부르게 먹고 힘을 얻어 이웃의 작은 자를 제대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3절의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를 부연설명하면서 ‘오락=주일날 놀러가는 것 즉, 주일성수 안 하는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흔히 듣던 말이고 또 그러려니 했습니다만 개운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몇 시간 동안 영어성경과 주석도 찾아보고 꼼꼼히 살펴보니, 너무나 미진한 설명(설교)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오락’의 원어는 ‘헤페츠’(hepes)로서 ‘기쁨/쾌락’의 뜻입니다. 이 단어는 ‘기뻐하다/즐거워하다/욕망을 가지다’의 뜻을 지닌 ‘하페츠’(hapes)에서 파생되었다 합니다. 헤페츠는 ①어떤 사람이 강렬하게 행하고자 하거나 갖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사용할 수도 있고 ②한 사람의 큰 이익이나 그의 사업과 관련하여 사용할 수도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 아울러 사58:5절에 대해 ‘이스라엘은 금식에 관심이 있었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기쁨이었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영역본들도 비슷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 흠정역(KJV)와 개역(RSV)은 pleasure로, 신국제역(NIV)은 please로 번역했지만, 신개역(NRSV)은 interest로 번역했습니다(한글 공동번역은 ‘돈벌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NIV 문장 “Yet on the day of your fasting, you do as you please.”를 직역하면 ‘금식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기뻐하는 것을 행한다.’로 번역될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위 설교에서는 ‘주일성수’)을 안 하면서 현대적 의미의 오락에 빠지는 것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금식(주일성수)을 하기는 하는데 참다운 금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쁨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금식함으로써 고통을 당했으니 하나님도 알아주시고 사람들도 인정해 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금식행위 자체를 즐기면서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금식이라는 종교행위를 통해 종교성의 만족을 도모하는 것은 전혀 헛된 일이라는 것이 ‘오락’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함의인 것입니다.

넷째, ‘약속하셨던 축복을 주신다.’는 항목은 8-11절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지는 ‘제대로 된 금식기도를 드리면 네가 드러나고(인정받고) 병도 고쳐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살피며 참 의미를 따진다면 긴 글이 되겠기에 생략하고 딱 한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금식이 열납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6-7절과, 역시 설교에서 철저히 배제된 9b-10a(…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에 있습니다!

올바른 금식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겠다는 응답은, 설교자가 설명하는 것 같이 ‘드러남’(인정받음)과 신유의 형태가 아니라, 작은 자를 향한 ‘베풂’(섬김)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억측에 붙잡혀 본문(여기서는 8-12절)의 진의를 보지 못함으로써, 전혀 헛다리짚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별도로 조명해 주신 부분을 조금 더 나누었으면 합니다. 바로 2절 말씀입니다. 몇 번을 읽는 동안 묘한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2절만 뚝 떼어 읽으면 무슨 의미가 될까요? 앞뒤 정황을 고려치 않고 또 문맥을 무시하고 읽는다면, ‘대단한 칭찬’ 구절이 됩니다! 이런 성도, 이런 교회, 이런 국가가 있다면 이는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할 것입니다.

헌데, 당시 이스라엘은 정말 그랬다는 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3절의 “이르기를”이라는 단어로 인해 유추되는 정황입니다. 2절의 행위들을 실행하면서 ‘참 신앙행위로 확신하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2절의 한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마치”입니다. 영어성경은 이 말을 “as if”로 번역했습니다. 가정법적 표현입니다. 가정법은 반드시 사실과 일치되는 사물에 제한 사용되는 표현법은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즉, 2절은 진실에 기초한 행위로 확정하여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대로서 가정(假定)의 의미까지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불의한 자신들의 행위를 의로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히브리어 성경에는 ‘마치’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백성의 허물과 야곱 집의 죄’를 질타하신 1절에 연계시킬 때 그 정당성이 더욱 분명하게 입증됩니다.


설교는 내내 긍정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성도들은 설교내용에 흔쾌히 동의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대강 살핀 대로 본 설교는 온전하다 평하기 어렵습니다. 미진할 뿐 아니라 잘못된 부분도 많습니다. 설교자도 이러한 미비점을 우려했는지, 반론을 제기할지 모를 일부 성도들에 대한 일침 놓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멘’을 유도하며 ‘동의하지 않으면 영성이 병든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무모하고 잘못된 속단이지요.

아무리 영성이 뛰어나고 유능한 설교자라 할지라도, 선택한 본문의 심오한 진리 전부를 조명 받을 수는 없습니다.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에 일부 미진함은 수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설교 본문으로 잡았다면 최선을 다해 묵상해야 합니다. 원문도 찾아보고 주석도 찾아보고 좋은 설교도 참조하고 그리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깨우쳐 주심을 간구하며 준비해야 합니다(그렇다고 어려운 원어를 남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의 의미는 살피되 쉽게 풀어 전달하라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해도 충분치 못하거늘, 아무 노력도 없이 피상적으로 해석하여 설명하려 든다면, 이런 무성의한 설교는 즉각 중지되어야 합니다.  

소위 설교의 직무를 맡은 목회자들이 땀 흘려 연구한 바른 내용을 전해 들음으로써, 평안한 마음에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김순희

2009.09.19 12:10:50
*.254.209.141

목회자들이 땀 흘려 연구한 바른 내용을 전해 들음으로써, 평안한 마음에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저도요....

김유상

2009.09.24 00:51:41
*.170.40.25

여전히, 아니 나날이 더 예리한 통찰과 비평에 목사가 아닌 저까지 다시 한 번 제 신학을 점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중 속에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자주 거기에서 벗어나 제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곤 합니다. 설교의 직무를 맡은 목회자들이 땀 흘려 연구하여 바른 내용을 전해주도록 애써야 하는 것만큼, 설교를 듣는 직무를 맡은 신도들 또한 말씀 묵상과 연구 및 기도를 통해 늘 "하심"을 파악하고 그 하심으로 살아가고자 애써야 하리라 믿습니다.

제 짧은 소견엔, 잘못된 설교의 경우 하나님의 마음을 잘못 짚었다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빌어 자신의 마음을 내세우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의중 속에 거한다면, 형제님 권면대로 기도하며 준비할 것이고, 그럴 경우, 하나님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아시는 성령님께서 잘못을 고쳐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설교는 애당초 하나님의 마음을 짚어내는 데에는 관심조차 없지 않나 의심이 듭니다.

늘 께어 있어 우리를 경계시켜 주시는 형제님께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정순태

2009.09.26 00:43:45
*.75.152.227

설교는 넘치는데...................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또 다시 반복되는 예배의 현장들
우린 너무 많이 경험했나 봅니다.

참 예배 바른 예배를 그토록 기다리며 사모하건만...........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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