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참 의미와 교회의 인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 가운데 하나는 ‘소명/사명/부르심’(이후 문장에 적합한 단어를 교호로 사용하겠습니다) 관련 신학일 것입니다.

소명신학은 기독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의 진정성에는 물론이요 궁극적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명’에 대한 현실적 이해는 크게 왜곡되기 일쑤입니다. 단어는 동일한 데 엉뚱한 의미로 잘못 사용되곤 합니다. 문제는 변질된 ‘소명관’으로는 아무런 영적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백성으로 부르시는 것으로서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2회에 걸쳐 ‘소명’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 ‘소명’의 문자적 의미와 전문가들의 견해

각 언어별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 히브리어는 ‘카라/콰라’(qura)(사42:6 등)라 합니다. 부르다(창19:5), 칭하다(이름하다)(창1:5) 등의 뜻이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목청껏 부르짖는 것도 ‘카라’입니다.

  ○ 헬라어는 명사 ‘클레시스’(klesis), 동사 칼레오(kaleo), 형용사 클레토스(kletos)가 있는데, 의미는 히브리어와 동일하다 합니다.

  ○ 영어는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먼저는 잘 알려진 call/calling입니다. 히브리어 및 헬라어 의미와 동일합니다. 다음은 ‘직업’(profession, occupation)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는 ‘사명’ (voc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클레시스’를 어근으로 하는 라틴어 ‘보카시오’(vocatio=부름을 받다)에서 파생된 말이라 합니다. 따라서 vocation은 ‘봉사를 위한 부르심’의 뜻을 지니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 종합하면, 히브리어 ‘카라’, 헬라어 ‘클레시스’, 영어 ‘call/vocation’은 ‘부르다/칭하다/청하다’의 뜻으로서, ①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의 길로 부르시고, ②특별한 사명을 위해 불러내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보다 상세한 내용은 직접 신학사전 등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경건서적에서 읽었던 몇몇 전문가들의 이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 강준민 목사의 말입니다. “calling이 아니다. 부름받은 자의 자격/능력/가치의 인식개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오히려 자격있는 자는 부르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포하신다. 지혜없는 자라야 부름받을 수 있다. vocation이어야 한다. vocation은 voice(음성)에서 나온 말이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 내면에 주신 음성을 듣는 것이다.”(무대 뒤에 선 영웅들. p.196).

  ○ 파커 파머의 말입니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무대 뒤에 선 영웅들. p.198에서 간접 인용).

  ○ 폴 스티븐스의 말입니다. “소명이나 부르심이란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발견한 신분에 걸맞게 어떤 것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소명은 부르심의 목적, 곧 ‘한 소망’이다.(엡4:4)”(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p.39).

  ○ 오스 기니는 ‘소명’이라는 단행본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그는 소명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다.”(p.21).

  ○ 그레그 옥덴 목사는 ‘새로운 교회개혁 이야기’라는 책의 제10장 ‘새로운 소명의 시대’에서 역시 ‘소명’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성직임명(ordination=안수) 개념을 반대하면서(p.248), 소명은 소수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책임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는 모든 성도의 특권이요 책임이다.”(p.278).


▣ 현대의 ‘소명’에 대한 적용의 실패

앞서 살핀 몇 분의 이해는 상당히 정확합니다. 소명을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개념으로 잘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소명신학은, 소명을 목사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용어로 고착시키고, 평신도로 칭해지는 각각의 성도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이러한 오류가 득세하게 된 원인은 소명의 참 뜻을 오해한 대다수 목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목사들에게는 자신들의 특별한 부르심을 내세움으로써 영적권위를 보증 받고 싶은 유혹이 있는데, 이에 넘어간 결과가 바로 소명신학의 왜곡인 것입니다.

거의 모든 목사들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내가 목사된 것은 결코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감동으로, 꿈으로, 환상으로, 나를 부르셨다. 분명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체험의 산물이기에 내가 목사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나의 사명이다!”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당사자의 주장이 너무나 강력하고, 또 이를 부정할 뚜렷한 방법이 없기에, 듣는 자들은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용기 내어 “정말이냐?”고 물어봐야 “틀림없는 정말이다!”라는 데야 더 이상 할 말도 없습니다.  

사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이들의 주장에 일말의 타당성이 인정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전하신 뜻에 따라, 환상이나 음성이나 다른 여러 방법으로, 특정인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다분히 개인적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당사자 외에는 알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달리 말하면 ‘개인적인 부르심은 객관적인 사실 확인이 쉽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제삼자는 수용(인정)하거나 거부(불인정)하거나의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소명론자는 항상 목소리가 크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소명을 의아스럽게 여기는 측의 이의는 미약할 뿐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소명신학의 왜곡이 시작됩니다. 즉, ‘소명’이라는 단어를 오직 목사에게만 개인적․배타적으로 적용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mskong

2011.03.27 12:41:03
*.61.23.211

학생부 시절, 청년부 시절에 매년 새로이 부임하시는 전도사님들께 물어보았던 말이 있었습니다. 전도사님이 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시냐고?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의 삶이 그닥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게 부임하시는 분들마다 일일이 물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부르심이 있으셨던 분도 있으시고 없지만 그런 삶이 좋아서 그런분도 계셨던것 같고... 저는 목사로써의 삶을 거부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지금은 성직자의 삶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다른 삶에 비하여 성직자의 삶은 평범한 삶은 아닌것 같기에 소명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더욱 크게 부각되어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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