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어느 부목사와의 교제

조회 수 734 추천 수 30 2012.06.23 02:37:59
                   [회상] 어느 부목사와의 교제(1)


JJH 목사님!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한 교회를 섬기게 되었지만 아무 교제 없이 그냥 지냈습니다. 우리교회에 등록하면서 이미 다짐한 바 있기에 아쉽거나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목사님께서 매일 아침 문자 넣어주시는 것에 부담을 느껴, 제 모습의 일단이나마 열어 드려야 할 것 같아 글을 씁니다.

저는 20대 중반부터 교회 나가기 시작했으나 1년에 한 두 번 정도 출석하는 수준이었고 30이 넘어서야 아내 손에 이끌려 본격 출석하였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한국의 대부분의 일반성도들이 겪는 부정적 경험들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목사들과의 대립은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순수하게 믿고 따르다, 실상을 알고,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좌절한 경우였습니다. 다시는 교회와 목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없을 듯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깊숙한 교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실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중심주의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주 직설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으나(사실 초안에는 어느 정도 언급했다가 수정해서 보냅니다), 덕 되지 않을 것이기에 생략합니다.

요즘의 한국교회 실상을 볼 때, 무교회주의를 대안 삼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진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가정교회’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할는지 모릅니다. 사실 가정교회를 향한 심증적 기대가 크지만 용기가 없어 결행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현재는, 어찌할 수 없어, 인터넷을 통한 교제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곳은 www.nosuchjesus.com입니다. 운영자께서 전용 공간을 허락해 주셔서 ‘맑은바람소리’라는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주제는 성경해석 중심의 묵상, 단편적인 성경묵상 위주인 단상, 독후감과 서평 및 기타 주제들입니다. 우리교회에서 환자들을 돌보면서 느꼈던 감상을 ‘환우나눔’이라는 제목으로 올리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매일 관심 가져 주심은 정말 감사하나 그냥 놔두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현재와 같은 교회라면 다시 옛날처럼 회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복하고 다시 헌신하게 된다면 허무한 것에 얽매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겠습니다. 홀로 끙끙대며 작은 것을 추구하는 신앙생활만 고수하고자 합니다. 신앙생활도 때론 혼자만의 침묵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지금은 혼자 감당해야 할 때일 것입니다.

위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글에는 개인적 신앙관의 단편적 표현들이 간간이 섞여 있습니다.

아무튼 목사님!

목사님의 지체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 꼭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전달되기를 원하면서 첫 번째 글을 마칩니다.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목사님과 가정과 그리고 사역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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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상] 어느 부목사와의 교제(2)


JJH 목사님! 두 번째 글입니다.

첫 답신 감사했습니다. 목사님의 자아반성적 고백 - 이해와 공감을 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 이르지 못한 목사들이 너무 많은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초안에 언급했다 수정해서 보낸다.’는 첫 편지의 표현을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다소 직설적인 이야기일지라도 소화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 거의 모든 목사들이 지니고 있는 야무진 오해 내지 착각은 ‘목사만이 공인된 성직자/사명자/지도자’라는 인식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대리자연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하는 중요한 내용은 지식과 능력과 영성입니다.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지식 자격을 구비했고, 수많은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를 원만히 관리함으로써 지도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다수의 영적 은사를 받음으로써 앞선 영성을 확보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나 신학 교수에 못지 않는 신학지식 보유한 일반성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또 목사가 발 벗고도 못 따라갈 정도의 조직관리 능력을 보유한 일반성도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보다 더 많은 은사 받은 일반성도들도 무수합니다.

목사와 신학교수들의 그 무엇으로도 일반성도보다 우수하다고 평가받을 요건들은 없습니다. 목사든 일반성도든 그저 그렇고 그런 수준의 존재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결코 오만이 아닙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감정은 시기별로 다릅니다. 유소년기와 사춘기와 장년기에 느끼는 아버지상은 사뭇 차이가 납니다. 그러다 노년에 이르게 되면 급기야 과거 아버지의 언행이 옳았음을 깨닫고 이미 타계하신 분을 몹시 그리워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존경하게 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겨우겨우 깨닫게 되는 인생의 맛이자 멋입니다(해당 연령이 되기 전에는 말해줘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고 있는 교훈은 관점의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관계적 측면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독립된 개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도와야 할 협력자’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과거처럼 자식이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로 보는 것이나, 현재처럼 비뚤어진 독립적(방임적) 존재로 보는 것은 둘 다 옳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독립적 개체임과 동시에 함께 사랑을 이루어 가야 할 협력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정확한 위상입니다.

목사를 향한 일반성도의 감정은 어떨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초신자 시절과 중견 시절과 성숙 시절에 느끼는 목사상은 역시 차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정말 신앙이 최고조로 성숙했을 때는, ‘목사를 존경해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부모를 바르게 이해해 가는 자식처럼, 신앙생활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사와 일반성도의 관계도, 아버지와 아들처럼, ‘독립적 개체임과 동시에 함께 사랑을 이루어 가야 할 협력관계’여야 합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도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일부 이해가 부족한 목사들은 언제나 ‘강자’의 위치에 머무르려 합니다. 목사 스스로 또는 홀로 책임지려 합니다. 일반성도들의 협력과 동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진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들을 자기 마음대로만 휘두르려 합니다.

일반성도들은 이미 ‘무너지지 않는 목사는 없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데 목사들은 아직도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직 목사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이런 강변을 들어야만 하는 일반성도들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한지요! 이 상태에 머물고 있다면 그는 ‘꿈속 헤매는 자’입니다!

오늘날 일반성도들은 목사들에게 ‘홀로 교회사역을 독점하려 하지 말라. 성경대로 일반성도의 이해를 구하고 협력을 이끌어내는 관계를 형성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경의 요구에 실패함으로써 오늘날 목사들은 거의 모두 ‘탈진’이 이르고 맙니다. 아니면 유아독존적 ‘오만’에 발목 잡혀 버리고 맙니다.

일례로서 목사들의 독점적 권한으로 여기는 설교에 대해서도 우린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정의도 다시 짚어야 하겠습니다만 이는 복잡하기에 생략하고, 목사들의 설교가 잘못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교회 담임목사님의 경우도 이를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일부러 비평적 시각으로 들으려 하지는 않으나, 때론 너무 피상적인 설교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공개하지는 않았으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기도 했습니다. 원하시면 목사님께 보내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목사님!

두서없이 또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쏟았습니다. 잘못된 인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상을 볼 때, 목사님들의 일반성도관을 획기적으로(아니 성경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바른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평가를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와 일반성도는 결코 대립적 관계가 아닙니다. 명백한 이해와 협력의 관계입니다. 이는 수평적 관계임을 의미합니다(그런데 지금까지 신학은 이 관계를 수직적인 것처럼 왜곡시켜 왔습니다).


일단 두 번째 글은 여기서 줄이기로 하고, 앞으로 좀더 구체적인 교제가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의 조명하심이 항상 밝히 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정순태

2012.06.23 02:45:52
*.229.102.176

매일 아침 문자로 권면하는 부목사에게 보냈던 글입니다. 순수하고 순진했던 분이지요.
하지만 이 교제는 아주 짧았습니다.
한국의 대부분 교회에서 부목사 등 협력목회자의 위상이 어떤 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담임목사 앞에서 부목사는 완전한 생쥐입니다.
이 부목사도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약 2년 정도 되자 떠났습니다.
따라서 이 분과의 교제도 끝났고 저 또한 얼마 후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특정 직분자가 군림하지 않는 교회, 어디엔가는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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