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자가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조회 수 1333 추천 수 65 2009.09.21 19:37:21
운영자 *.104.231.129
불신자가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질문]

현재 다니는 교회에서 초신자를 위한 간단한 10주짜리 프로그램을 합니다. 이 중에 “성경은 왜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대상이 초신자, 혹은 교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대단히 '똑똑한 분'들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가, 성경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성경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대략 세 가지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이야기들을 하려다보니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반적인 논리의 오류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지 봅시다...그러기 위해 성경말씀을 봅시다”와 같은 피정의 항이 정의항을 내포하는 전형적인 논리 전개의 오류로 여겨지는 상황이 발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목사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수긍할만'하게 접근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차라리 “안 믿는 분들은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뭐라고 답해줄 수 있을까요.

[답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사실 그렇겠습니다. 특별히 아직 잘 믿지 못하는 대단히 똑똑한 초신자 내지 불신자들을 상대로 성경을 읽어야 할 당위성을 입증하기는 더더욱 난처하겠습니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고 말한 어거스틴의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은혜를 받고 확실히 믿은 후에서야 그것도 33살의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성경을 제대로 읽어볼 마음이 생겼던 제 경우를 뒤돌아 봐도 그렇습니다.

가장 상식적인 답변으로는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므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읽어야 한다는 것이 되겠지만, 그럼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같거나 비슷한 반열에 세우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실제로 회교, 유대교, 기독교(신구교 합친 광의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에선 자기들의 경전을 말 그대로 종교 경전이라고 칭하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동일하게 절대적 유일신을 믿는 이 세 종교에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성경이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확실하다면 누구라도 한 번 읽어볼 마음까지는 몰라도 필요는 당연히 있을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본 질문에 대한 정답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자니, 그것도 수천 년 전에 인간이 기록한 책을 두고, 아주 힘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려면, 아니 불신자나 초신자로부터 최소한의 논리적 수긍을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철학 능력이나 도덕성 영성을 폄하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커녕 지식조차 거의 없고 단지 학교에서 배운 종교에 대한 상식과 불신 세대를 주도하는 세계관에 바탕을 둔 사고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실을 전제로 해두고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선 종교가 도덕이나 철학과 다른 점부터 확실히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영위해야 할 의로운 삶을 규정하는 부분은 도덕과, 이 세계의 형성과 운행의 원리를 규명하는 부분은 철학과 겹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 즉 눈에 안 보이고 영적이며 절대적 존재인 신과 가시적 물질계에 나서 살고 죽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관계는 종교만이 다루는 독특한 영역입니다.

종교를 도덕 및 철학과 동일한 맥락에서만 이해하는 자에게는 성경을 읽어야할 당위성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명해도 소귀에 경 읽기일 뿐입니다. 원죄 이후의 인간의 영적 상태는 완전히 부패되었기에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그 죄에서 구원 한다는 성경의 진리는 너무나 요원한 과제입니다.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전혀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런 자에게는 신의 존재부터 따져 보는 별도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신은 있고 있다면 하나일 것이라고 명시적이던 묵시적이던 그런대로 수긍하는 불신자들이 생각보다 꽤 많습니다. 그들은 인간사가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고 신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것까지도 나름대로 인정합니다. 말하자면 아주 기초적인 신관(神觀)은, 즉 “세상을 따로 움직이는 신은 존재 한다 내지 할 것이다”라는,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성경을 꼭 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자가당착적 모순

무엇보다도 그들은 아주 큰 영적 딜레마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선 아무 지식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자가당착적 모순입니다. 인생사가 자기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눈에 안 보이는 다른 더 큰 힘이 있다고는 인정하면서도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려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게도 불신자들의 그런 모순과 원인을 바로 성경이 두 곳에서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로마서에 나오는 익히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18-20)

성경을 읽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양심입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인간이 우연히 진화된 존재라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란 아무리 인간 영혼이 부패되었어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둘째는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아주 세밀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것을 보면 창조주가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구한 세월을 전제로 한다 해도 우연히 선재(先在)한 물질이 우연에 우연을 겹쳐서 인간으로 변했다는 진화가 오히려 더 큰 믿음을 요구하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분명한 증거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 외면, 거역하는 것은 어떤 핑계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엄숙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롬1:21-23)습니다.

성경이 불신자들의 모순을 지적한 두 번째 부분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이방인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참 하나님은 외면하고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 만들어진 신에게 삶이 형통될 수 있도록 빌고 있습니다. 인생살이가 자기들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기에 항상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가 끊일 새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염려에 휩싸이는 이유는 그들은 인생의 목표를 오직 이 땅에서의 물질적 풍요와 현실적 형통을 추구하는 데만 두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신자들은 마땅히 그런 이방인들과는 달라야, 아니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아야 하고 그에 따라 기도할 때에도 그것만 간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신자가 믿는 참 하나님은 신자에게 그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미리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역으로 말해 이방인들이 틀린 기도를 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신은 자기 신자들의 그런 필요를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신이 그런 필요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는 사실을 신자 쪽에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원칙적으로는 전자가 맞습니다. 하나님 외에 존재하는 신은 따로 없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을 두고 실제 존재한다고 착각 내지 믿습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선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처에서 계획과 예상 밖의 일들이 발발하니까 단순히 산에 가면 산신이 바다에 가면 해신이 있으리라 간주합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형상을 적당히 만들어 신으로 모십니다.

그러니 신이 자기들 형편을 잘 모르거나 바치는 정성이 모자라 기분이 상했다고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선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시종일관 자기들 짐작에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신의 확실한 존재 여부조차 점검하지 않고 하는 기도이니까 열심히 빌고는 있지만 지금 자기가 빌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왜 빌어야 하는지, 또 빌면 왜 응답이 되는지, 응답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등등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상을 자기들 위로를 위해 스스로 깎아 만들었듯이, 비는 것도 자기들을 위해 스스로 위안을 얻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제만 해도 그들은 생전에 착하게 살았거나 많은 것을 바쳐서 신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는 자는 구원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짐작합니다. 평생을 두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죽은 후 신의 처분만 기다려야 합니다. 그 신이 어떤 신인지 전혀 모르니 이 땅에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불신자나 초신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뜻입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그러나 모든 사람이 완전히 공감하여 납득할 정도로 신의 존재성과 그 특성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설명뿐 아니라 이해하는 것도 아주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증(自證)할 뿐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계시(revelation)할 뿐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아빠가 동전을 손에 감추고 꽉 쥐고 있으면 어린 자녀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아빠가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보여주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그 존재 뿐 아니라 어떤 존재라는 것도 인간 이성으로선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인간에게 양심과 자연을 통해 자신이라는 존재는 이미 확연히 드러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성을 추가로 계시할 필요나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여 서로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나아가 자신의 대리자로 이 땅을 다스릴 동역자로 삼았기에 자신의 존재 증명을 넘어서 당신의 특별한 계획과 뜻을 드러내어 보여줄 필요는 있습니다.

바꿔 말해 신의 존재만 믿어선 구원 문제는커녕 올바른 믿음을 갖는데도 절대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신자와 이방인들이 모르고 있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 부분, 즉 양심과 자연(신학용어로 일반계시) 만으로 미처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드러낼 또 다른 수단(특별계시)이 당연히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인간 쪽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의 이유와 열심에 의해서 말입니다.

계속 동일한 비유로 풀어 설명하자면 아이가 뭔지는 몰라도 손 안에 아빠가 감추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는 것이 일반계시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아빠가 손을 직접 벌려 주어야만 손안의 동전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양심과 자연 외에 따로 요구되는 특별계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직접 마련한 성경과 성경대로 당신께서 직접 오셔서 죽으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경을 왜 꼭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른 말로 왜 여러 비슷한 혹은 동일한 내용을 다루는 종교 경전 중에서 유독 성경을 필독서로 꼽느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의 경전과 성경이 확실히 다른 점도 납득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차이도 지금껏 설명한 내용 대로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신에게 잘 보일 수 있는지만 가르칩니다. 심지어 절대적 유일신을 믿는 회교와 유대교마저 그렇습니다. 회교는 숙명론적 맹종을, 유대교는 율법적 선행과 형식을 바쳐야 합니다. 또 유대교는 자기 민족만의 구원을 지향하며 회교는 알라에게 복종하지 않는 종족을 제거 대상으로 보기에 참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하셨고 앞으로 어떻게 이끌 것이라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세상과 인간을 향한 당신의 뜻과 계획을 당신께서 직접 하나씩 구체적으로 밝히되 아주 점진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마치 아빠가 손가락 하나만 풀면 동전 귀퉁이만 조금 보이다가 둘, 셋, 넷, 풀어갈수록 동전이 더 크게 보이다 마지막 다섯을 풀면 완전히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구약의 창세기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손바닥 펴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정점으로 하여 신약의 계시록에 이르러 완성된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

다시 말하건대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드러낸 경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기분을 누그러뜨리려 스스로 규정한 계명과 신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맹종, 행위, 정성, 열심 어느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믿음만 요구할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데도 믿음이 필요하지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는데 요구되는 인간적 논리나 지성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왜 꼭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성경에 기반을 둔 답변이 되어야 하고 또 그 답변을 수긍하려면 사실상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또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되돌아 왔지만 질문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질문의 특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특성이 그래서 그렇습니다.  

예컨대 성경에는 “우리는 이런 저런 것을 믿는다”든지, “우리 종교의 계명으로 삼는다”는 표현은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하지 그 사실을  믿기에 기독교의 제일 신조로 삼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하나님이 일인칭 주어가 되어 직접 말씀하신 형식만 동원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인간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천 몇 백 년에 걸쳐서 서로 다른 직업, 신분, 개성, 지성을 지닌 수십 명의 저자가 기록했기에 그럴 수는 전혀 없었습니다. 따로 모여 편집회의를 할 수 없었는데도 하나 예외 없이 일관되게 동일한 형식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저자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즉,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계획과 뜻을 완전히 드러낸 특별 계시의 절정인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지라 이 땅에 와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자기를 믿는 길 외에는 구원의 방도가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가르침대로 따라야 구원 받는다든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믿으면 구원 얻을 것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C.S. 루이스의 표현대로 완전히 미쳤거나 아니면 그 말한 대로 진짜 하나님 둘 중 하나의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그에 대해 인간이 보일 반응도 아예 거역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럼 그분의 십자가 계시로 인해 하나님의 특성과 또 그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전에 아니 죄에 빠져 그분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죄와 악은 철두철미하게 저주했습니다. 반면에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너무나 긍휼히 여겨서 당신께서 직접 죽으셔서 죄 값을 다 지불하고 죄인은 구원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피조물인 죄인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자기를 지은 분마저 배반하여 타락한 죄에 대한 그분의 공의가 십자가에서 동시에 실현된 것입니다. 요컨대 죄는 벌하고 죄인은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선 인간 스스로 신에게 갖다 바쳐서 그 기분을 누그러뜨리며 죽은 후에야  영원한 운명이 생전의 성적표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모든 것이 전혀 불필요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인간들이 안타까워서 제발 당신의 사랑을 알아달라고 당신께서 외친 것이 십자가입니다. 단 죄인이 자기 죄를 스스로는 도저히 씻을 수 없다는 사실 하나는 겸손히 인정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보혈로 깨끗케 하신 후에 그분의 의로 덧입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상 딱 한번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완료된 사건입니다. 이제 예수 즉 하나님의 완성된 특별계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성경을 통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는 지금도 성경을 읽지 않고도 성령의 간섭으로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다른 말로 십자가 구원의 구체적인 의미는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덧붙일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한 번뿐인 짧은 인생을 행복하고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해선 자신의 실체부터 알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 스스로 자신을 절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자기는 자신의 전부가 아니며 부분적 실체도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아는 자신마저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이자 진리입니다. 오죽하면 소크라테스마저 철학의 최우선 과제, 아니 모든 인간이 평생을 두고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네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했겠습니까?

인간을 생리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아주 세밀하고도 높은 수준으로 발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네 자신을 정말로 제대로 아는가라고 물었을 때에 확답을 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한 영적 존재인지라 자기 지정의만으로는 정확히 규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존재란 쉽게 말해 죽음과 그 너머까지를 생각할 수 있기에 신에 대해 묵상하며 신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인간을 제대로 알려면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려면 하나님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 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성경뿐입니다. 요컨대 인간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서 정말 참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라면 꼭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논리에 모순이 없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인간이 성경을 꼭 잃어야 하는 이유들마저 성경이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자님께서 염려한 것의 대답도 그런 염려가 들수록 더더욱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지 봅시다...그러기 위해 성경말씀을 봅시다”는 전제가 결코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계시해주어야만 인간이 그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확히 말해 믿음이 없는 자가 접할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특별 계시가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방법 외에는 그분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비슷한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의 그랜드 케년은 너무 장엄하고 규모 또한 무지하게 큽니다. 아무리 완악한 불신자라도 입이 딱 벌어지는 엄청난 장관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조물주가 있는 것 같기도 해”라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긍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랜드 케년의 그 장관을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디오로 찍어도 실감하지 못합니다. 케년 입구의 영화관에서 년 중 상영하고 있는 근접 확대 촬영한 아이맥스 영화도 실제 규모와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됩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잠시 구경하는 것으로 그 규모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비행기로 공중에서 전체를 내려다보고, 계곡 밑으로 걸어 내려가 보고, 또 가로지르는 강을 보트타고 구석구석 탐사해서 전체를 종합해 봐야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랜드 케년과 비교라도 되겠습니까? 도저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신 분이지 않습니까? 아니 그랜드 케년 자체를 만드신 분이지 않습니까? 그럼 그분을 직접 만나지 않고는 그분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만나려면 그분이 직접 계시해주는 길을 통할 수밖에 없는데 이 세대에 유효한 아니 영원토록 유효하면서도 완전한 계시는 성경뿐이지 않습니까?

인류가 성경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다 마련해 주신 것이지만, 정말로 행운이자,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모든 인간은 아무런 소망 없이 절망의 나락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었다 부활하셨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실, 아니 그 계시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으니 복음이 복음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답을 다시 정의하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면” 성경을 읽어야, 그것도 반드시 신구약을 서로 대조해 깊은 뜻을 새겨가며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 아예 믿지 못하거나 엉터리로 믿게 되는 것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가장 알기 쉽게 말해 성경 없이는 무턱대고 비나이다는 할 수 있지만 구체적이고 풍성한 기도의 참 응답을 절대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12/2008  

답변 글을 올리고 다시 보니까 제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 간단히 첨언하겠습니다.

성경을 꼭 읽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는 분에게 성경 말씀으로 설명하면 논리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질문의 핵심주제였습니다. 따라서 혹시 그런 질문을 접하여 답을 해주어야 하는 경우는 상기에 인용한 성경 구절(롬 1:18-23, 마31,32)을 직접적인 변증 자료로 들지말고(예컨대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있다는 식으로), 그 구절이 뜻하는 바와 제가 보충한 내용만 -즉 불신자의 영적 모순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안만 설명해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상대가 그런 설명을 납득한다면 그 변증의 출처로 성경을 펼쳐서 인용하여 보여주고
제 설명대로 성경만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올바르게 밝혀주는 유일한 책임을 강조해서 부연설명해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 신자를 따라 하는 동성애자들 운영자 2009-11-04 670
5 방주(方舟)에 타고 있는가? 운영자 2009-11-03 601
4 구약성경이 역사서에 불과한가요? 운영자 2009-09-21 1219
3 목사를 믿지 말라. 운영자 2009-09-21 725
» 불신자가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운영자 2009-09-21 1333
1 말씀이 보약인가 치료제인가? 운영자 2009-09-21 825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