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불만(3)-하나님을 더럽힘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말1:7-9)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제사장들이 희생 제물마저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렸습니다. 오늘 날의 독자로선 언뜻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성행한 배경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율법에 규정된 제물의 종류와 숫자만 채워서 형식적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마 일반 백성이 바친 제물 중에 정상적인 것도 있었을 텐데 제사장들이 좋은 것들은 전부 뒤로 빼돌리고 나쁜 것만 바쳤다는 뜻입니다. 셋째,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선민이며 율법대로 제사들 드렸으니 복을 받으리라 기대했다는 뜻입니다. 넷째, 혹은 희생 제사를 아무리 드려도, 설령 율법대로 정확하게 드려도 자기들 삶에 여호와의 어떤 권능도 나타나지 않아 복 받기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다섯째, 그래서 성전에선 여호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 없이 제사장들이 일반인을 상대로 제물을 받고 복만 빌어주는 종교적 장사만 했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이런 상태인데도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고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도 드물거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일곱째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친 제물을 부정한 수단으로 취득했다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칠 소득이 전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에 오직 그분의 은혜라는 진정한 믿음과 감사가 있었다면 가장 좋은 것으로 바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그런 소득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자기가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난 후 종교적 의무감이나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 형식적으로 바치고 치웁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소득을 얻으려는 자는 필연적으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무조건 많이 벌려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책을 기록한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를 통해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1:10)라고 한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말씀대로 400년 간 아무런 계시를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LA의 한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성전 건축을 독려하면서 "'남의 것, 세상의 것 뺏어서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자'는 요지의 설교를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정말 그런 요지로 설교했다면 도둑질 해서라도 건축 헌금을 하라고 한 뜻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 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뺏은 돈으로 지은 성전이 아무리 그 크고 화려한 문을 열어본들 그 날로 하나님이 닫으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말씀이 결코 그렇게 눈에 띄게 잘못을 범하는 교회와 신자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위의 일곱 가지 하나님을 더럽히는 의미들 가운데 하나라도 저촉되지 않고 완전히 무죄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까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성전 문도 혹시 닫히지는 않을까요? 아무리 우리가 주일날 최고의 정장을 하고 깨끗한 돈으로 헌금을 하고 강단을 아름답게 꽃으로 장식하더라도 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너무나 찔리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가정법 질문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실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어법입니다. 너희가 총독에게는 좋은 제물을 바치고 나에게는 병든 것으로 바치지 않느냐라고 질책한 것입니다.
오늘도 현실에서 당장 실감할 수 있는 가시적 행복을 위해서는 세상과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정작 하나님은 무시 내지 경시하지는 않는가요? 그래서 아무리 어떤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는 것이 혹시 하나님이 말라기 이후의 이스라엘에게 침묵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이 아침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제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그리고 또다시 붙들 것은 오직 십자가 예수님의 용서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성령의 권능 뿐임을 확인합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 닮게 바꾸어 주옵소서!
12/22/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