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불만(2)-하나님을 멸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
신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고의로 멸시하지는 않습니다. 불신자들도 "그런 일을 하다가는 천벌을 받지?" 혹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나?" 등의 말을 합니다. 나아가 성직자들을 대체로 존경 내지는 두려워 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신자들마저 당신을 멸시하고 공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일 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헌금도 가장 깨끗한 새 돈으로 준비해서 예배 드리며 교회 안에선 큰 소리로 떠들거나 잘 웃지도 않습니다. 최대한의 공경심을 표현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처럼 하나님을 항상 공경만 했지 멸시했던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하나님을 멸시한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왜 나를 멸시하지가 신자들의 영원한 불만입니다.
지금 성경은 멸시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습니까? 아들이 아비를, 종이 주인을 공경하듯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에, 종이 주인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멸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며 자기 기대와는 어긋난 길을 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들이 자기를 멸시했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의 경우 당신의 "이름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위치와 권능이 상실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참 주인으로 임재하여 구체적으로 역사하는 일은 없어지고 단지 초월적인 객체로서 따로 존재만 할 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절대자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본성적 공포심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일대일 인격적 관계에 바탕을 둔 경외심은 없는 채 신앙 생활을 합니다. 오직 의무감에서 형식적으로 주일을 지키고, 큰 재앙만 생기지 말아달라는 정도의 기도만 간단히 하고, 성경은 책장의 장식물로 둔갑한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주일날 제일 좋은 옷을 차려 입고 겉으로 최고의 예의를 갖추는 것은 그나마 벌을 받지 않고 혹시라도 복을 주실까 기대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첫 걸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제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꼭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수고하며 희생까지 안 해도 됩니다. 진정으로 내 삶과 인생과 존재 전부가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과 인도 안에 붙잡혀져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에 걸맞게 반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힘들거나 슬픈 일 가운데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넘치도록 채워져 있음을 단 한치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하나님을 제대로 공경하는 법은 절대 따로 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도 신자를 절대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12/21/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