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진 하나님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이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암5:22&25)
하나님은 먼저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가 광야에서 제대로 제사를 드린 적이 없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희생과 소제물을 구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인 광야에선 제사 드리지 않았다고 야단치고선, 지금은 열심히 잘 드리고 있는데도 받지 않겠다고 하면 여간 심술 할아버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제사 안 드렸다고 토라진(?) 것입니까?
아모스 시절엔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한 때였습니다. 희생도 살진 것으로 바치고 또 번제나 소제 등 율법에 규정된 방식대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은 제물과 형식을 다 갖추었다고 온전한 제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바치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제물과 격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을지라도 당신을 향한 온전한 중심을 보기 원하십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운데도 바친 과부의 두 렙 돈을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풍요할 때에 드리는 제사도 온전한 마음이 함께 실려 있다면 당연히 기꺼워하십니다.
그러나 아모스 시절의 풍요는 죄악으로 쌓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공법을 인진으로 바꾸고 정의를 땅에 던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보다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5:24)고 죄부터 바로 잡으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잘못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화해하라고 했습니다.(마5:22,23)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제사 자체가 신자를 향한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진 제사를 받기 원하시지만 그보다는 실제 삶에서 신자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아예 제사 자체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사는 신자더러 거룩하게 살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며 또 거룩하게 살고 있는 신자라면 당연히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의 제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가 목적이면 종교가 됩니다. 제사가 목적인 이유는 두 가지 뿐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지 않아 벌을 받을까 염려하는 것과 열심과 치성을 더 많이 바쳐서 더 많은 축복을 받아 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의 제사 수용여부와는 관계없이 신자 쪽의 일방적 소원과 요구만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런 예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삶이 목적일 때는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면 그분의 인도 가운데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때로 광야 같은 환난이 닥쳐도 오직 그분만 의지하기에 요동치 않습니다. 제물과 함께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오는 것은 오직 감사와 찬양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면 제사 가운데 그분과의 실질적 대면이 이뤄지고 그분의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또 제사로 그분의 권능과 은총을 입으면 당연히 삶에서도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은 역설적 표현입니다. 제사가 없었어도 당신은 이스라엘과 함께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계속 범죄했어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의 참 뜻은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이 제사와 삶 중에 과연 어느 것이겠느냐?”입니다. 다른 말로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가 내가 주는 상벌 때문이냐? 나와 동행하여 거룩해지기 원해서이냐?”입니다.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의 대답이 잘못되면 하나님이 진짜 토라지실지 알 수 없습니다.
9/1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