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선하지 않는가?

조회 수 296 추천 수 8 2010.07.24 16:23:30
예수는 선하지 않는가?


[질문]


전 서울에 어느 대형교회에 다니고 있는 청년입니다. 예전부터 질문이 하나 있지만 주변에 딱히 답해주실 만한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형교회다 보니  전도사님들도 많은 성도를 양육하고 계시고 제 질문은 제 신앙에 의한 호기심으로 남을 뿐 신앙의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어서 어떻게 질문을 드릴까 망설였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양육하는 양이 아닌 저에게 부스러기라도 던져주실 수 있을까 해서 질문 드립니다.

- 질문 (1)

현재 이슬람 인구는 16억에 육박할 정도로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들은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선지자의 하나로 인정은 하되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부정하는데요, 일례로 그들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이 말씀을 예로 들어 예수님이 스스로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고 판단하고 이를 근거로
선하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냐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슬람의 말을 들으면 답답하지만, 딱히 반론할 지식이 부족하여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말씀의 근거로 해서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이슬람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하면 될까요?

- 질문 (2)

그리고 이슬람의 존재와 발전을 하나님께서 묵인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이슬람과 기독교는 철천지원수처럼 서로 싸워왔는데요 이들을 단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구절로 설명하기엔 이들의 신앙은 기독교인들이 보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단지 ‘알라’라고 부를 뿐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끔찍할 정도로 대단하죠. 게다가 이들의 시조인 마호메트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로 설명하려고 해도 그 후의 파급효과가 너무 크고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5:38,39)

에 기록된 말씀처럼 된다면 이들이 불교나 힌두교처럼 복음이 없는 지역이 아닌 복음이 융성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융성한 이상 이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았다면 무너졌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현재 유럽의 기독교에 대해 위협을 가하는 현실과 세계적으로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적대적인 모습을 취하는 그들을 볼 때 이들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정립하고 대처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지식으로 생각을 정립할 수 있도록 이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정립해야 옳은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길게 질문을 주셨는데 편의상 두 주제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먼저 막10:18의 정확한 해석에 바탕을 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변증과, 또 이슬람이 계속 융성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각각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에 비추어 살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선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경을 앞뒤로 아무리 다 따져 봐도 "No"라는 것 외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본체이십니다. 그럼에도 한 청년의 질문을 받고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7,18)

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청년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질문자도 하나님의 구원 진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잘 살펴보면 청년은 지금 예수님을 한 경건한 유대인 랍비로 간주하고 영생을 얻을 방도를 물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다다스칼로스”는 일반적으로 교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는 전혀 관련 없는 단어입니다.

또 “무엇을 하여야”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도 구원의 조건 내지 전제로 의로운 행위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모세 율법에 바탕을 둔 구원의 길을 물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덕적 계명을 완수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해야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지에 관해 질문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랍비에 대해 “선한”이란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청년 관원은 예수님 앞에서 무릎 꿇을 정도의 존경심을 표했기에 선하다는 표현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평소 자기가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답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또 무릎을 꿇고 선한 랍비라고 부를 만큼 그 질문이 자기로선 아주 절실한 과제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에 반하여 예수님은 구원 진리의 초점을 전혀 다른 데에 두고 답을 했습니다. 우선 주지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는 말씀은 정확히 따지면 당신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와는 별개입니다. 청년더러 어떤 근거에서 나를 선하다고 말하느냐고 반문한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너는 나에 대해 존경과 신뢰의 표시로 선하다고 일컫는데 “선(善)”이란 용어는 그런 의미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선한 랍비라고 부르느냐고 따졌으므로 사실상 그런 네 생각이 틀렸다는 뜻이 됩니다.

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도덕적 행위에 기준을 둔 인간 사회의 상대적 선과는 전혀 다른 완전하며 절대적인 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청년은 윤리적으로 좀 더 경건한 자 내지 행위에 선을 적용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보시기엔 인간의 그런 선은 선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선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 스스로 자신이 선하지 않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구원에 관한 객관적 진리를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이란 절대적이어야 하며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했을 뿐이지, 당신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이 알고 있는 선과 구원에 대한 개념의 잘못을 고쳐준 것입니다. 특별히 선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당신의 정체성을 구원의 진리와 연관해서 대답한 것입니다.    

청년의 질문의 요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제일 거룩한 (인간) 랍비로 보이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를 확실하게 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지금 아무리 거룩한 인간 랍비라도,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님 자신에 적용되는 뜻이 아님,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선하지 않기에 인간 랍비의 가르침으로는 구원의 방도를 알 수 없다고 답한 것입니다.

대신에 구원은 오직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만이 선물로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다면 당연히 인간은 선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하지 않은 인간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그 선으로는 하나님 구원의 기준에 합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왜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고, 그런 표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신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뜻을 네가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내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무조건 선한 랍비라고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임을 알지도 못하면서 구원의 길만 알려고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선이라는 단어가 전혀 해당되지 않기에 선을 바탕으로는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행위는 절대로 구원의 기준이 되지 못하며 대신에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만이 구원을 은혜로 베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으려면 인간이 선한 행위를 증진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하나님을 제대로 찾고 알아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청년더러 구원의 방도를 알아보려 하지 말고 과연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며 지금 눈앞에 서있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 제대로 알라고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을 주시는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간접적으로 설명해준 셈입니다. 요컨대 인간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고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계명 준수와 구원

예수님이 이어서 청년에게 계명을 철저히 지키라고 가르친 것을 두고 행위 구원을 옹호한 것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거명한 것은 전부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들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선한 행위가 요구되는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첫째에서 넷째까지의 계명은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이 반응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선 자신은 계명을 지키는 데에는 남들보다 뛰어났다고 반쯤은 자랑삼아 말한 것입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그랬으니 집안에서 율법 교육을 철저히 받아 그대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부자관원이기에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세상에서 칭송 받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것은 두 가지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처럼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은 확실히 보장된 것인지 다시 다짐받으려 했거나, 아니면 세상에선 의인 대접을 받는데도 여전히 심령 한구석으로는 뭔지 모르게 갈급하며 평강과 자유가 없는 까닭을 물으려 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둘 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는 영생의 방도를 가르쳐 줍니다. 이는 선행의 범위를 최대한도로 넓히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나 절묘한 예수님만이, 말하자면 하나님이시기에, 제시할 수 있는 구원의 진리였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청년이 인간관계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모범을 보였다면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대한 바르게 가지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처음 네 계명은 네가 제대로 잘 지켰느냐고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선행을 근거로 구원의 방도를 말해주었습니다. 질문자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서 신앙교육을 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우선 네가 선행에 대해 자신하고 있는데 과연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를 돌볼 만큼 완전하게 선했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인간이 행한 선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완전히 선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지 곰곰이 따져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만이 선하다는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청년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오인하고 선한 랍비라고 했지만 아무리 선한 랍비라도 하나님의 온전한 선에는 절대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네가 아무리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신해도 선행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의미가 나타납니다. 네 재산이 다 없어져도 과연 첫째부터 넷째 계명을 지켜낼 자신이 있는지 물은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과 세상의 것 중에서 무엇을 고를지에 관한 질문에 아무 주저 없이 딱 부러지게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한다면 네가 구원의 길을 묻는 의미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오직 예수님을 따르겠는지 물은 것입니다. 결국 네가 지금껏 가졌던 율법적 구원관부터 완전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율법 준수에 자신이 있었든지, 혹은 마음 한 구석으로 미진했든지 간에 구원은 인간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그것을 얻으려면 그분만을 존재와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길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만이 구원을 주시는 분이며, 모든 인간이 그분의 의에 도무지 미치지 못한다면, 그분의 긍휼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결국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22절) 가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재물 중에 재물을 택한 것입니다. 아무리 선행을 해도 심령에 갈급해서 예수님을 찾아 와놓고선 단지 세상 속에서 의인이라는 칭송을 들으면서 적당히 선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도, 아니 그렇게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다른 랍비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참으로 자가당착적인 결말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에게서 다르고도 온전한 가르침을 얻으려고 시도했습니다. 막상 정말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비록 간접적인 것이긴 해도, 그 진리는 외면한 채 다시 이전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만약 지금 그런 가르침을 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그 정확한 실체를 알았다면 쉽게 그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당신께서 자기에게 재산을 다 팔고 당신을 따르라고 직접 말했다는 확신이 있다면 따르지 않을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선한 선생님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인간의 가르침이라면 같은 인간인 자신이 판단하여 결정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지금 재산을 적게 파느냐, 다 파느냐는 식으로 선행의 세기로 구원을 가름한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밖에 생각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럴 바에는 다 팔지 않아도 구원 얻는 데는, 말하자면 실제로도 자기가 가장 구제를 많이 하고 있으니까, 큰 지장이 없으리라 본 것입니다.

변증과 전도
  
누차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선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생의 도를 물은 청년에게 그 청년의 종교적 개념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만의 놀라운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복음을 가르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그 복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 매인 옛 사람을 깨트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그가 악하다거나 지혜가 모자랐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선 가장 의롭고 똑똑하며 심지어 영적으로도 아주 깨어있는 자였습니다. 스스로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온 자는 성경 전체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지 않습니까?

단지 세상 신이 그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믿지 않는 모든 불신자의 대표였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그 심령에서 사단의 영을 밀어내어 주지 않는 한에는 모든 이가 영적으로는 봉사요 시체입니다.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거기다 예수님도 구원의 길에 대해 직접적, 구체적,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주로 비유, 상징, 이야기로만 가르쳤습니다. 삼년간 동고동락한 제자들조차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제자들이 비유로만 가르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이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의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나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4-16)

예수님이 불신자에게 구원을 주기 싫어서 일부러 어렵거나 애매모호하게 가르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이들이 죄 가운데서 스스로 완악해진데다 그 모든 심령들이 사단의 미혹하는 권세에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 가르쳐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어 각 죄인에게 역사해야만 당신의 가르침, 사역, 죽음에 담긴 구원의 길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경우도 영적으로 뛰어나 진리를 보고 듣고 깨달아서 복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먼저 선택 받아서 구원의 길로 들어섰고 또 당신과 함께 다니며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 듣는 놀라운 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고선 “구원 진리”를 깨달아, 구원은 택함 받았을 때에 이미 확보된 것임, 신약 성경을 저술하게 된 것입니다.

원죄 하의 인간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 베푸심이 선행되어서 성령이 간섭하여야만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그러면 신자 쪽에서도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려는 간절한 소망이 필연적으로 생깁니다.

따라서 이슬람 신자에게 이 구절이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여전히 못 알아먹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계명대로 선하게 살았으며 실제로 구원의 길을 소망했던 이 청년조차 주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을 보십시오. 당시로선 지성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최고 현인, 의인, 경건한 자였지만 스스로는 복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지 않습니까?

회교 신자를 비롯해 모든 불신자에게 문제 된 성경 말씀들을 변증한다고 그 미혹된 영이 바로 잡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구절을 들고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술을 즐긴 사람이라든지, 부모의 장례도 치르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든지, 집안 식구들 가운데 원수를 만들려고 당신께서 오셨다는 등, 문자적인 의미로만 따져선 얼마든지 그분을 거부할 또 다른 구실을 댈 수 있습니다.  

불신자와 성경 구절을 하나씩 따져선 토론과 논쟁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토론해도 각기 전혀 다른 영적 차원에 있는지라 성경대로의 합리적 결론에 결코 도달될 수 없습니다. 이슬람뿐만 아니라 모든 타종교와 기독교 이단과 무신론자들이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 속고 있습니다. 사단의 그 속임을 중지시키지 않고는,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기에 성령의 간섭이 필요함, 성경의 구원 진리에 관해선 납득시킬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들을 정말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단에 묶여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가 복음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의 구원이 시급하고 안타까울수록 종교적 교리로 논쟁해선 안 됩니다. 별무소득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만 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을 위해서 무엇보다 간절히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이슬람 교리는 배척하되 회교도인 한 개인은 진정으로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또 복음부터 전하는 것도 좋지만 신약성경 전체 특별히 복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잘 읽어보라고 권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희생하며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란 너무나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회교 경전 ‘코란’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알라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벌이 기다리는 정죄의 하나님입니다. 지금도 계명대로 따르지 않으면 실제로 엄정한 형벌을 받습니다. 반면에 알라만 따르면 최상의 낙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알라만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조금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복음서와 신약성경을 읽으면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단계까지 가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베풀어져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알게 됩니다. 실제로 이슬람 신자가 신약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고는 개종하는 예가 종종 있습니다.

요컨대 이단과 불신자는 교리로 설득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신자의 섬김을 통해 알게 해야 합니다. 구원의 길이 어느 쪽이 옳으냐를 납득시키기보다는 예수님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즉, 하나님이 어떤 죄인도 사랑하시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신자는 불신자를 끊임없이 진정한 사랑으로 섬기고, 계속해서 기도해 주고, 적절한 때와 방식으로 복음을 풀어 설명하며, 가능하면 성경도 읽도록 권해야 합니다.

7/6/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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