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조회 수 1026 추천 수 10 2011.07.02 04:02:35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질문]


요즘 교회에는 1:1 제자반 같은 교육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프로그램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기에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모으시고  어떻게 훈련시키셨을까요? 제자들의 개성이 강했을 것이고 개인별로 수준 차이도 있었을 텐데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많은 청중들 앞에서 대중들을 휘어잡으며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방법도 물론 하나의 교육 프로그램이었겠지만 분명히 제자들만 따로 모아놓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22절~26절에 벳새다에서 맹인을 치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서 치유하신 후에는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유추해볼 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으로 봐서 현장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맹인만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맹인이 가고 나서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틀림없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맹인 치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왜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지 물어봤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에 대해 설명해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제자들만의 모임에선 따로 특별한 교육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제자더러 대중 앞에 몸소 실천하도록 하거나, 비유법과 강조법 같은 어법을 사용하거나, 당시 실정에 맞는 직설적 표현을 사용해가며 교육한 것은 짐작됩니다만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자세히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답변]

몇 가지 전제들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전제할 사항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어떤 의문도 이 진리의 바탕 위에서 추적 분석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그분의 인간적 측면과 신적 차원 둘 중 하나에만 근거해선 온전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제자들을 따로 교육시키는 방법을 살핌에도 인간적 신적 측면 둘 다 감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성경, 그중에서도 네 복음서가 기록한 범위를 벗어나선 안 됩니다. 행간(行間)의 의미에 대해선 전체문맥, 다른 복음서의 연관기록, 성경전체의 진리, 당시의 문화와 관습, 저자의 저작 의도와 책의 주제, 등등과 비교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이런 객관적 판단의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추측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질문자님은 마가복음 8:22-26에 대해 상식적으로 아주 타당한 추리를 하셨습니다. 치유 후에 제자들이 그에 대해 질의하고 예수님이 가르치는 일이 따랐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거기다 질문하신 예수님이 “따로 제자들과만 있을” 때에 사용한 특별한 교수방법에 관해서도 성경에 분명 그런 경우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구태여 유추할 필요 없이 그에 따라 판단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본문과 곧 바로 이어지는 기록도 그렇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리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쌔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4:27) 제자들과 여러 마을로 이동 중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질문에 합당한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특정 주제에 대해 먼저 질문을 제기하여서 제자들로 생각하여서 대답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로서 벌써 주님의 중요한 교수법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록을 다 살펴봐도 실은 유별난 방법이 동원된 것이 아닙니다. 요즘 식으로 부흥회와 소그룹 모임으로 나눠 절차, 방식, 내용을 달리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로선 몇몇 경우를 빼고는 거의 소그룹 모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교수법도 당연히 소그룹에 적합한 대화법이 주였다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대규모 청중이 모인 적도 가끔 있지만 그럴 때도 주님은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차분히 풀어 설명만 했습니다. 의식적인 절차나 대중을 향한 호소, 선동, 웅변으로 그들의 감성을 전혀 자극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인간의 지적 영적 반응만 기대했을 뿐입니다.

때로는 치유나 기적 같은 방식도 동원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당신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귀중함과, 당신께서 가르친 내용이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치유가 없었고 또 물 위를 걷는 기적만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요한복음의 다락방 강화에서 보듯이 제자들과 따로 있을 때는 더더욱 평상적 강의 내지 대화식 교수법에 의존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대중들을 가르칠 때에 제자들이 앞장서 배우되 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또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도록 했고, 당신의 가르침에 동참도 시켰습니다. 예컨대 산상수훈을 하실 때에 제자들은 맨 앞자리에 앉았고(마5:1), 오병이어 이적 때는 직접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마14:16) 또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제자들이 전해주자 예수님은 대중보다는 그들의 의중을 중시했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과 따로 있는 경우만 별도로 살필 필요까지는 구태여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주일학교나 구역모임 등에서 실제로 적용해보고 싶은 구체적 교수법을 알고 싶다면 관련 책들을 참조하시면 될 것입니다. (예: 예수님의 티칭 스타일, 로이 B. 주크, 도서출판 디모데 / 위대한 교사 예수, J. M. 프라이스, 침례회출판사 등)        

대신에 우리 모두가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가르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효과가 있었던 방법을 다른 이가 동일한 대상을 두고 동일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동일한 효력은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사람의 지성과 영성을 다루는 신앙교육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거기다 예수님의 경우는 성육신한 하나님 본체로서 신적 권위를 갖추었기에 그분의 교수법 중에는 우리가 도무지 흉내도 낼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교육방법을 물어오셨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교육 원리와 그 배경 등에 관해 초점을 맞추어 답변 드리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예수님의 교육 배경            

잘 가르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선생부터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도 그러합니다. 비유컨대 구구셈도 모르면서 수학교사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비록 전지하신 신성을 갖추었어도 마리아에게서 아기 예수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성경은 분명히 지혜도 자라갔다고 증언합니다. 인간으로 일반적 성장기를 거쳤고 정상적인 유대교육도 받았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당시의 성경인 구약에 대해서 아주 능통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선 가정에서부터 율법을 가르치고 또 실제 실천하도록 훈련시킵니다. 예컨대 식사 때마다 기도하기, 절기 지키기, 쉐마(신6:5) 외우기, 등등입니다. 또 회당마다 평일에 모이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그 출석은 의무적이었습니다. 6살부터 10살까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성경을 배우며 10살부터 15살까지는 율법의 구두해설법을 배웁니다. 예수님이 이런 초등교육을 얼마나 철저히 받았는지는 12살에 이미 성전에서 랍비들과 성경을 두고 토론한 사건이 여실히 증명합니다.(눅2:46,47)

그러다 13살이 되면 회당의 성인예배에 정회원으로서 안식일마다 참석할 수 있었는데, 회당에서도 3년 안에 모세 오경을 다 배우도록 했습니다. 오후 예배에는 주로 선지서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회당에서의 성경교육도 철저히 받은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양피지 두루마리 성경이 아주 귀한데다, 성경자체가 암송하기를 권하기에 유대의 성경교육은 구두 암송과 그 해설에 의존했습니다. 당연히 주님도 그런 방식을 따랐을 것이며,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회당의 예배와 교육에 빠짐없이 참석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최소 20권의 구약성경이 인용되었습니다. 주님이 성경에 능통했음을 보여주는 한 예를 들자면,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실망해서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던 사건입니다. 자신에 관한 성경 예언을 풀어서 설명해 주자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눅24:27)

그러나 예수님은 특별한 고등교육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와 회당에서 행하는 예배와 율법 교육으로 그쳤습니다. 당시의 고등교육이란 랍비의 제자가 되어서 사사(私師)를 받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에 속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그들 종파의 교육과 관습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에서 성경 일반에 대해 배우고 평신도 제자훈련까지는 마쳤어도 정식 신학교에서 신학학위를 취득한 적은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7:15)라는 말이 문맹(文盲)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문맹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식 랍비, 율법사, 서기관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아주 능통하게 성경을 풀어 가르치기에 의아심과 당혹감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은 바로 이 점을 꼬투리 삼아 무자격자라고 비난했지만, 대중들은 오히려 그들과 전혀 다른 권세 있는 가르침이라고 경탄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권세 있었던 이유는 당신께서 갖고 계셨던 신적 권위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분은 하나님이었으니까 세상만사와 하늘의 모든 것까지 이미 훤히 꿰뚫고 계셨다고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럼 구태여 이 땅에서 키와 지혜가 자랄 필요도, 또 유대의 초등학교와 회당에서 성경을 배워야할 이유도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12:49)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그분의 신적 권위는 오직 성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안에 하나가 되어 계셨기에 인간 예수는 언제 어디서니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아버지가 시키지 않은 일은 아들은 일절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그런 하나 됨은 당연히 성령의 교통으로만 가능했기에 삼위하나님이 항상 일체가 되어서 주님을 통해 합력하여 사역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통의 실제적 통로는 주님이 이 땅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부단(不斷)히 행했던 기도와 말씀 묵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 본인의 성경 교육은 유대 문화권에 실제 통용되는 방식으로, 또 영성 교육은 기도하고 묵상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이뤄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께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방법도 그 두 차원으로 나눠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을 성경과 영성 교육을 따로 시켰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두에 전제한 대로 하나님과 동시에 인간이셨던 그분만의 특성에 맞추어 교수 방법을 고찰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교수 방법

먼저 유대 방식대로 가르친 점은 당신께서 랍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일반 랍비와 같은 점도 있었지만 다른 점도 많았습니다. 우선 동일한 점은 합숙 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랍비와 동고동락하면서 모든 면에서 랍비와 똑 같이 행해야 했습니다. 중세에 스승(master)이 행하는 기술을 100% 답습해 배워야했던 도제(craft, 徒弟)제도처럼, 랍비는 삶에서 본을 보이고 제자는 그대로 따라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다른 점은 이미 말한 대로 별도의 학파나 종파에 소속되지 않은 초교파 독립 랍비스쿨을 열었습니다. 또 보통은 제자들이 랍비를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직접 뽑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평범하고 무식하며 소외된 계층 사람들로만 골랐습니다. 심지어 당시 유대사회에선 매국노로 상종도 않는 죄인 취급 받은 세리는 물론, 나중에 자기를 배반해서 팔 자임을 미리 아시고도 포함시켰습니다. .

무엇보다 인간 랍비는 율법을 다 이루지 못했지만 주님은 완전히 성취한 점이 아주 크게 달랐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제자들과 예수님과 따로 있을 때의 교수 방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삶에서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율법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100% 온전히 성취하는  본을 보이신 것이야말로 핵심적 답변, 아니 정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당시 랍비들은 강의보다는 대체로 문답식 방식으로 교육했습니다. 그것도 해답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짐으로써 그에 대한 답을 주는 형식을 많이 취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유대인과 토론할 때에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무는 방식이 확연히 드러나 있습니다.

자칫 불교의 선(禪)문답과 같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구름 잡듯 애매모호하게 대답한 것을 각자 나름대로 해석해도 다 정답이 되는 선문답과는 전혀 다릅니다. 유대 탈무드에서 보듯이 분명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반문들 속에는 당신만의 영적 과제나 진리가 점층적이고도 명확하게 계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인간이신지라 일반학교에서 통용되는 모든 교육방식을 다 사용하셨습니다. 강의, 질문, 대화, 비유, 예화, 상징, 연구대상물분석, 분임토의, 실험 등의 방식을 적절히 응용했습니다. 예컨대 의도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거나, 사마리아로 통행해서 남편 다섯을 두었던 여인의 내면을 치유한 것들을 제자들로 지켜보게 한 후에 질문을 유도하여 그 의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게 하여 폭풍우를 만남으로써 믿음을 시험하거나, 따로 둘씩 짝을 지어 당신께서 가르치신 대로 전도하는 실습에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 아무리 곤혹스럽고도 난해한 주제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핵심을 파악하고 청중으로 하여금 간결하고도 알기 쉽게 가르쳤습니다. 예컨대 가이사에게 납세 하는 문제나, 간음한 여인의 처벌 문제 등에서 전통적 교훈이나 인간적 사고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답변과 해결책을 잠간의 주저함이나 당혹함이 없이 곧 바로 제시했습니다. 또 주님의 가르침에는 도입, 전개, 끝맺음 같은 논리적 흐름에 단 한 치의 무리나 모순이 없었던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간단명료하게 계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다른 랍비와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당신이 바로 진리였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랍비는 스승 랍비의 가르침을 그대로 답습했기에 반드시 랍비 누구누구에 따르면, 혹은 율법의 어느 조항에 따르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식의 표현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신이 명령하고 선포했습니다. 교훈과 계명의 근원이 바로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때로는 이전의 전통적 가르침이나 율법 규정을 뒤집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당신의 가르침에 절대적 권위를 스스로 부여했습니다. 단지 가르치는 행동의 주체가 아닌, 진리 자체의 주체로서 주어 "내가"를 서슴없이 사용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6,7)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5:38,39)  

대략적으로 살펴본 예수님의 교수법은 한 마디로 당시에 통용되던 현실적 방식을 다 활용하시되, 그에 담긴 내용과 제자들과 상호 교통하는 차원에선 당신만의 신적 지혜와 권위가 충만히 담기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적 권위와 지혜를 담는 교수방식은 우리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교수법을 무작정 따르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원리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전부 실패했다.

주님의 교육 원리를 따지기 전에 먼저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가장 훌륭한 교수법으로 가르쳤습니다. 거기다 정말로 자기 가르침과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삶에서 완벽하게 실천한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는 당신의 가르침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이러므로 여러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0,66) 예수님이 구원을 얻으려면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가르치니까 너무 어렵다고 많은 제자들이 물러 가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이 진술 자체로만도(53절) 너무 어려운데다, 추가로 부연된 설명(54-65절)으로 명확해지기는커녕 혼란만 가중시켰습니다. 지금껏 듣던 구원의 길과는 전혀 달랐고, 또 당시의 철학적 종교적 사고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또 다른, 어쩌면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13:13,14)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도 그들의 영혼이 이미 타락되어 사단에게 미혹되어 있어서 아무래도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또 다른 예언도 실현되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8,9)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인간의 지정의로서 도덕적 종교적 삶을 살아보려고만 했지 자신들의 영적인 실상이 얼마나 비참한지 몰랐습니다. 특별히 선민의식이라는 완악한 교만에 빠져 형식적 위선적 믿음을 갖고도 하나님 앞에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 진리에 대한 가르침에도 아예 귀를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어려운 가르침에도 끝가지 남았던 열두 명이라고 해서 크게 나을 바 못됩니다. 예수님이 그들더러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고 했지만, 여전히 보고 들은 것뿐이지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본인이 좋고 그분을  믿었던 것이지, 그분이 가르친 진리를 완전히 납득 수긍해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결국에는 그들도 스승이 십자가에 죽자, 아니 부활해도 뿔뿔이 흩어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언이 실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작정한 일이며, 예수님도 당신의 가르침이 실패할 것임을 미리 아셨다는 뜻입니다. 아니 아예 실패할 것이 빤함에도 가르쳤기에 실패 자체가 의도된 것입니다.

그럼 그분의 교수방법(teaching skill, method)은 엄밀히 말해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보다 이 실패에 숨겨진 영적진리(spiritual truth)부터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제일 먼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비록 예수님이 공생애 삼 년간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의 거의 전부를 가르침에 소진하셨지만, 진짜 목적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예수님은 이 땅에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것도 구원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직접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러 온 것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한 교통이 막혀 있었고 스스로도 그분과의 교통을 전혀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그분과 담을 쌓은 원수 된 상태의 모든 인간에게는 사실상 어떤 구원의 가르침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시체에게 스스로 살아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아예 무용하며 그를 살려줄 의사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제자들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할 구세주로 오셨던 것입니다. 당신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가르침도 구원을 주는 방편으로 활용한 것이지, 구원의 길을 안내해주는 이정표 역할만 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교육 원리의 핵심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듣고는 과연 누가 수긍하며, 아니 제대로 깨닫기라도 하겠습니까?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당신께서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당신이 죽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기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본다는 식으로 선포하고 다니는데 어찌 그 교육이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이런 가르침을 주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은 기록조차 안 되던 때입니다. 당시의 정황에다 우리가 제자들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제대로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나는 얼마든지, 아니 그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면 그만큼 교만한 죄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 원리

예수님의 삼년간의 공생애 동안에 제자들을 가르치신 원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라도 땅 끝까지 찾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는 것입니다. 당신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어도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생을 줄 뿐 아니라 당신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르침을 위한 가르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성경교육도 성경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 모두가 메시아인 자신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지 않습니까? 이적, 사역, 치유와 마찬가지로 교육에서의 모든 초점도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에 집중시켰습니다. 당신을 믿는 것이 바로 구원을 얻는 길이었기에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구원을 주는 예비적 방편이었던 셈입니다. 필연적으로  오직 죄인의 영혼을 살려내는 십자가 진리를 계시하고 또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하는 데에만 교육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결코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귀찮아도 생명을 줄 뿐 아니라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단 하나님보다 인간의 의를 더 앞세워서 당신을 완악하게 배척하는 자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7-39)

나아가 당신께서 가난하고 연약하며 소외된 불쌍한 자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이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는 자들부터 찾으셨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오해하고 버리고 불평하고 비방해도, 수제자 베드로의 예에서 보듯이, 그랬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매단 원수들마저 자기들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분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성경을 통달했고 성령의 인도로 천국복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아셨던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얼마 안가 죽으실 골고다 십자가로 초대하지 않고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주제에 모든 교육의 초점이 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바로 본인이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체질이 진토 같음을 너무나 잘 아시고 참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모든 이의 심령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2:2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죄는 철저히 저주하시되 죄인은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간본성에 대한 이런 정확한 이해는 자연히 당신의 교수 방법에도 그대로 묻어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42:1-4)

주님의 교육 원리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해야할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여 삼년 간 동고동락했던 소수의 제자들마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온전한 깨우침을 성령이 오신 후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런 깨우침을 십자가 전에는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Messianic Secret”(우리말 번역이 적합한 것이 없어서 영어로 적었음)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서에는 기적적 치유를 행하거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거나, 변화산에서의 영광을 목격한 후에 다른 이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질문자님이 예를 든 성경본문도 그런 예에 속합니다.

그 이유는 여럿입니다. 우선 괜히 소동을 일으켜 당신의 사역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 하신 것입니다. 아직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을 하셔야만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기적에 대한 온전한 의미는 물론 당신이 가르치신 천국복음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주님은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대신에 진리의 영인 성령이 역사하여야만 모든 숨겨진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삼 년간의 미리 가르친 내용을 주님은 골고다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열방 앞에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임을 명확히 드러내셨지만, 오순절 이후 성령의 간섭으로 믿음으로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만 구원을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말해 주님만의 특별한 교육수단은 바로 당신의 죽음과 성령의 감화 두 가지뿐이었던 셈입니다.  

오늘 날의 성경교사도 예수님의 가르치는 기술보다 그 바탕이 되신 이런 원리부터 배워야 합니다. 가장 먼저 또 마땅히 신구약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통달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십자가 복음이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진리임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교수 방법에도 능숙해져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과 계획을 온전히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불쌍한 영혼에 대한 애끓는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누구라도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어려운 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항상 겸손하게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오직 성령의 인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영적 교훈을 몸소 실천해 보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신 살리신 것입니다. 그분은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해 진리를 가르쳤다기보다는, 그렇게 안 한 것은 결코 아님,  진리 그 자체이신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른 이의 묶인 영혼을 풀어내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궁극 목적이라면 현대의 스승도 역할 모델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기 모든 것을 상대에게 주는 희생과 참 사랑으로 섬겨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진정으로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서 실제로 자기의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또 그러면 그분께서 인간 교사에게 가르치고 전할 말씀을 입술에 심어주며 교수 방법에 대한 지혜도 깨닫게 해주십니다.  

6/5/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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