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빠진 원숭이 인간

조회 수 532 추천 수 36 2009.11.14 02: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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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 빠진 원숭이 인간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쒸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8:5-8)


일부 신자들도 포함해서 불신자들 모두의 진화와 창조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 하자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어떻게 생겼는지 그 기원을 밝히는 이론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화는 신빙성이 있는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화석이라는 증거로 뒷받침 하지만  창조는 그렇지 못한 것 같으니까 진화가 훨씬 과학적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과학적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과학적이라면 무조건 믿는 오류마저 범합니다. 즉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믿는 일종의 닫힌 신념 체계를 유지합니다. 과학적이라고 해서 진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습니다. 실험이라는 검증요법은 오직 물질에 한해 유효한 것이지 비물질의 경우는 실험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는 사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사안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나아가 창조 뿐 아니라 진화도 사실은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Fred Hoyle은 원시 아미노산이 우연히 합성되어 효소가 될 확률은 10의 20승 분의 1에 불과하다고 추정했습니다. 또 그 효소가 자연계에 현존하는 2천 가지의 서로 다른 효소로 생성되려면 수학적으로 거의 계산이 안 될 만큼의 장구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 이후에도 단백질로부터 DNA가 만들어지고 세포의 복잡한 조직이 생겨 한 개체의 종이 생겨난 후에 수많은 종으로 진화되려면 시간적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기간이 소요됩니다. 요컨대 인간이 그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일관되고도 체계화된 데이터와 실험으로 진화를 측정하여 증명해낸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진화에선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환을 단지 돌연변이로 설명합니다. 돌연변이란 그야말로 합리성이라고는 완전히 결여된 채 오직 우연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진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스스로 진화란 실험으로 입증될 사안이 아니라고 못을 박아 놓은 셈인데도 진화가 오히려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습니다.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면 아직 진리 내지 사실(truth and/or fact)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설 내지 이론(hypothesis and/or theory)일 뿐입니다. 그런데 창조론과 진화론만은 다른 학설들처럼 여러 추정 가능한 이론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오직 그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가 틀립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진리인데 다른 하나가  가설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비진리가 됩니다.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고 해서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로 몰아갈 수 없습니다. 영원토록 입증이 불가능한 진화나 창조 둘 중의 하나를 주장한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세상에 대한 자신의 믿음 체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진화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어라 그러면 창조가 이해될 것이다”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그는 이미 하나님이 없다는 믿음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눈감고 뺑뺑이 돌리듯이 둘 중 하나를 무조건 선택해서 믿어 보기로 하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완전히 믿어져야 믿는 것입니다. 선택은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을 때만 효용이 나타납니다. 당장 살고 죽는 문제도 아닌데 창조와 선택 중에 고르려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창조와 진화는 분명히 둘 중 하나는 사실인데, 그러나 어느 쪽도 솔직히 완전한 믿음은 생기지 않고, 그렇다고 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니 당장 시급한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면 시급한 과제가 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사는 길 뿐이라는 태도입니다.

그러다가 이 문제가 당장 시급한 문제로 변하는 것은 언제입니까? 바로 죽을 때 아닙니까? 모든 인간이 나이가 들고 죽음이 가까워오는 것을 서서히 느낍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동안 살았던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나라는 존재가 과연 이 땅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던지 되살펴 봅니다. 또 죽은 후에 정말 하나님이 계시면 큰일 날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 모든 죄를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다른 말로 진화와 창조란 결국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련된 과제입니다.  거창하게 인류를 포함한 이 자연계 전체의 기원보다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과제로 옮겨질 때에 절실해집니다. 본인의 정체성을 정말로 확립하고 싶은 자만이 진화와 창조 중에 어느 쪽을 진리로 택할지 심각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인간의 정체성을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라고 합니다. 어떤 분이 진화는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로, 창조는 날개 없는 천사라고 믿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화를 비하하고 창조를 칭찬하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진화는 인간이 원숭이를 조상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원숭이에서 털만 없어진 외모의 차이밖에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인간 스스로 자신을 동물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생존과 종족 보존의 목적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당연히 생존과 종족보존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가시적 현실 세계 안에만 갇혀 있는 것입니다. 설령 죽음 이후의 내세가 있다하더라도 그 때 가서 보자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형통이 급선무입니다. 내가 형통해져야 좀 더 선해질 수 있고 그 후의 성적표를 가지고 죽음 이후를 대비하겠다는 순전히 인간적인 배짱입니다.

왜냐 하면 만약 형통하지 않아서 내가 선을 베풀지 못한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죽은 후에 정말 신이 있어 심판을 한다면 선을 베풀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심판하는 그 신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인간만 편하도록 생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창조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사로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이 땅으로 옮겨와 열매를 맺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됩니다. 죽음 이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으로 염려치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당신의 종으로 만드셨기에 벌써 하늘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죽기 직전에 가서야 자신이 과연 이 땅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따져본다는 것은 그 전까지는 자기가 과연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진화를 믿는 자로선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땅은 우연히 물질로만 이뤄졌고 또 자신도 그 물질에서 장구한 세월을 거쳐 우연히 생성된 것이라고 믿었는데 물질이 어떻게 자기가 누구인지 알 것이며 또 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진화를 주장하는 자들을 진짜 인간 대신 물질로 격하해 비하하고자 하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로 세상이 우연히 물질로 이뤄지고 자신도 그런 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죽기 직전에 신과 영원에 대한 마음이 들 리가 없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진화가 된 존재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자가당착 아닙니까? 역으로 말해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로 이미 인간은 절대로 우연히 물질에서 생성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종교 특유의 교리가 아닙니다. 모든 종교와 사상과 철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과제입니다. 창조가 맞다면 절대적인 신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성경의 첫 선언은 죽기 직전에 절대자에게로 귀향하려는 습성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마음은 절대로 우연히 생길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사실상 그 첫 구절은 하나님이 선언한 것으로 모든 인간을 영원한 본향으로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사실상 그런 범주와도 상관없이 바로 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가장 개인적이고도 시급하게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의 삶을 살면서 최소한 내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해두고 살아야 정말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사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가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는 꼴 아닙니까? 그런 자는 돈을 벌어봐야 과연 왜 돈을 벌었는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아니 자기가 지금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심지어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 아닙니까?

지금껏 한 이야기가 불신자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서두에 신자도 창조와 진화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자가 진화를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신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날개만 안 달린 천사라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털만 빠진 원숭이로 살면서 오히려 날개 달린 천사로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영원한 가치를 이 땅에 심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 땅의 생존과 종족보존을 위해서, 즉 무엇을 먹고 마실까와 그저 내 식구만 건사하려는 것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조금 괜찮은 신자도 단순히 원숭이에게서 털만 빼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죄를 조금 덜 짓고 착한 일 조금 더 하는 것이 신앙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아닙니다. 신자는 날개만 안 달렸다 뿐이지 세상에서 남을, 특별히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어 새 생명으로 살리는 천사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천사로 만들기 위해서 죽으셨지 털 빠진 원숭이에 머물러 있으라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2-24,28,29)

당신은 털 빠진 원숭이입니까? 날개 달리지 않은 천사입니까? 다른 말로 죽음 이후를 일부러 잊어버리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 이후는 이미 영원한 면류관으로 보장되어 있으니 전혀 염려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까?

11/29/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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