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히브리 언어적 의미

조회 수 739 추천 수 4 2013.04.16 19:16:29
창조의 히브리 언어적 의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히브리 어법과 언어는 회화적이고 묘사적이다. 추상적 용어들을 동원하여 상징적 암시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발생했던 어떤 사실을 단순하게 그냥 있는 그대로만 말한다. 그림에 비유컨대 추상화는 물론 인상파 축에도 들지 않고 아주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특징이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도 여실히 더 드러난다. 고대의 여러 다른 창조 설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환상이나 상상의 산물인 동화, 전설, 신화 같은 요소들이 전혀 없다. 그 표현에 과장 혹은 미화시키는 군더더기 또한 일절 없다. 시적인 묘사, 암시, 상징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창세기 1:1 말씀을 보라.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네 단어뿐이다. 여기에 태초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천지는 무엇인지, 창조는 어떤 방식으로 되었는지 상세한 설명이 아예 없다. 그냥 이 땅에 실존하는 모든 것을 한분이 창조함으로써 존재케 되었다는 것이다.

만물이 창조되는 과정 또한 그렇다. 하나님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말씀하신 그대로 있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분의 말씀 외에는 만물이 존재하게 된 그 어떤 근거, 능력, 발단도 있지 않고 있을 수도 없다. 또 모든 피조물이 계속 잔존(물질)하고 생존(생물)하고 있는 것 또한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을 다시 묵상해보라. 이 간단한 선언은 굉장히 저돌적이고 독선적이고 일방적이며 절대적 뉘앙스를 지니고 다가오지 않는가? 거기에는 종교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원시적 다신론에서 점차 유일신론으로 발전되었다는 의미는 아예 없다. 또 다른 민족의 창조 설화를 모방, 인용, 답습했다는 흔적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창조 자체가 하나님 그분의 절대적 주도 하에 독단적으로(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라는 뜻임) 이뤄졌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로 순간적인 창조가 있었다. 만물이 창조 된 과정 자체가 그러하고, 그분의 절대적 주권의 특성 또한 그러하기에 이런 선언적 표현 외에는 창조를 묘사할 길이 없다. 창조를 더 아름답고 풍성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려드는 것은 오히려 창조의 성격은 물론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훼손시킬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유일신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말로 인간으로 당신의 그런 창조의 선언적인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 것도 그분이라는 뜻이다. 인간만이 완전한 창조의 배경에 완전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또 인간만이 그 깨달은 의미를 언어로 담아낼 수 있게끔 그분이 만드셨다는 것이 본문의 또 다른 의미다.

동물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한다. 그러나 종족 유지와 번식이라는 한 가지 목적 즉, 본능을 충족하려는 의도 외에는 소통이 없고 할 수도 없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언어를 가졌다. 어떤 사실을 표현해내고 그 일에 일정한 의미도 부여할 수 있다. 또 그 부여한 의미에 따라 의지를 동원해 새로운 일을 계획 수행하는데도 인간의 언어가 중추적 역할을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사실을 개념화할 수 있는 언어를 주신 것은 바로 당신과 교통이 가능토록 하기 위한 뜻이다. 또 그것은 당신이 인간에게 반드시 계시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 전제된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그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지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 가운데 당신이 태초에 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계시해 놓았는데, 인간만이 그런 계시를 깨닫고 이미 선물로 받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본문이다.

흥미롭게도 불신자들이 인간의 기원을 창조냐 진화냐고 따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창조를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이 만약 순전히 진화된 존재라면 그 유전자 안에는 진화의 유전자만 있어야 한다. 창조를 인식하는 유전자는 없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물론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절대자에 대한 의식이 있고 창조의 가능성도 떠올린다. 거의 모든 종족들의 선조에 대한 설화가 하늘에서 알이 떨어졌다는 식으로 하늘과 연관되어 있다. 사실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간되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의 유전자 안에는 창조 유전자밖에 없었다. 진화의 유전자란 존재치도 않았고 그것은 단지 후천적 교육의 습득물일 뿐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이라는 주어만 50군데 가량 나온다. 건조하기까지 한 사실적인 단문들 안에 성경의 어떤 장보다 하나님의 주도적 행동이 많이 등장한다. 창조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그분의 창조를 인식하였고, 또 그분이 주신 자기들 언어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창조에는 인간이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인이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고 그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인간은 창조 후에만 비로소 존재케 되었다. 인간으로선 창조의 시작과 과정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니 인간에겐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창조로 실존케 되었다는 그 근원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려 주어야만 한다. 또 그 창조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창조주 그분을 자신의 머릿속에 분명하게 인식되고, 하나님이 심어놓은 의미를 깨달아, 그 의미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언어를 주신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반대로 진화가 옳다 해도 수십 억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친 그 과정은 물론, 그 최초의 발단을 인간 스스로는 절대 알 수 없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아를 발견하려면 창세기 1:1의 신적 계시에 의존하느냐, 아니면 단순히 물질로 회귀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다른 방도는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으니 무조건 둘 중 하나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것, 다른 말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는 뜻이 아니다. 제반 조건이 동일한 범주에 속한 것들 끼리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어야만 바른 선택이 가능하다. 여러 대체 가능한 방안 중에 최적의 방안을 고르는 것이 선택이다. 요컨대 비슷한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다.

성격이 전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대표적 예로 선과 악의 경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선택 이전에 본인이 선하느냐 악하느냐에 따라 자동적, 필연적으로 정해질 뿐이다. 기본적으로 선한 자가 악을, 악한 자가 선을 고를 수는 없다. 더 쉽게 비유하면 초등학생은 구구셈을, 대학생은 미적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필연이다.

창조와 진화가 바로 그런 성격이다. 이 둘을 도무지 동일한 범주에 넣을 수 없다. 전혀 다르다. 하나가 옳으면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는 하나님께 감사 경배할 마음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설령 둘 중 창조가 더 합리적인 것 같다고 인정해도 하나님을 경배할 마음이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성경대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살아서 자기 삶을 주도하고 계신데 어찌 그런 분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있는가? 창조가 옳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경배하지 않으면 괜히 종교인처럼 경건한 시늉만 한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진화가 옳다고 믿는 셈이다.  

반대로 진화를 선택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자신은 물질에서 스스로 자기 힘으로 발전된 것이다. 오직 물질로만 내 생애를 풍성하고 화려하게 내가 이끌다가 물질로 끝내면 그만이다. 바꿔 말해 창조와 진화의 경우는 선택한 후에 그 선택한 것에 따라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미 본인의 믿음에 따라, 말하자면 스스로 본인의 정체성과 자아를 나름대로 인식한 결과에 따라 선택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신자더러 본문을 읽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창조를 믿고 있는 자만이 본문이 본문대로 믿어지는 법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창세기 1:1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후 성경을 계속해서 깊이 공부하다 보면 본문이 믿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까지 부인하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경우도 어쨌든 믿어진 후에 본문이 믿어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앞에서 본문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신적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인간의 정체성과 자아를 확립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자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려면 가장 먼저 신적계시에 의한 창조의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인생을 절대로 온전히 살 수 없다.

반면에 진화를 주장하는 불신자들의 인생은 항상 갈급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단순히 물질에서 찾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기 존재의 출발이 그것이 아닌데도 그것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고아가 친부모가 아닌 다른 이에게 부모가 되어 달라고 계속 조르는 꼴이다. 그 어른이 아무리 성숙하고 그럴싸해 보여도 절대로 친부모가 될 수 없다. 그럼 아무래도 고아인 채로 남아 있게 된다. 불신자의 상태이자 운명이다.

본문은 단순히 기독교의 첫째 교리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첫 걸음이다. 본문을 절대적으로 인식하고서 온전히 창조주께 순종 헌신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아무런 행복, 만족, 평강, 자유, 안식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으로 이 땅에 살아갈 의미도 전혀 없다. 히브리 어법이 아주 단순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처럼 그 또한 아주 단순한 사실이자 진리다. 모든 인간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음이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부인해도 그 사실이 거짓으로 변할 수는 절대 없다.

여기에 어떤 부연설명도 필요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의 이유, 목적, 계획, 뜻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본문은 모든 인간에게 엄숙히 선포하고 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 자녀로 살라! 그렇지 않으면 기다라는 것은 영원한 멸망이다.”라고 말이다. 즉 평생 고아로 남아 있게 된다는 사실을 그냥 사실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런 인생은 이 땅에 그냥 내팽겨쳐진  물질, 물건, 물품으로 끝날 것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고도 영영한 말씀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3/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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