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아는 것이 왜 나쁜가?
선악과에 대한 둘째 의문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동물은 선악(善惡)과는 전혀 무관하다.  

선악과 금령에 대한 대표적인 세 의문 중에 둘째 질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데 왜 나쁜 일이 되는가? 그것도 정녕 죽어야 하는 벌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는 일로 벌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 일 자체는 상을 받아야 할 만큼 선한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다른 말로 선악을 아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선 인간이 무엇이 선과 악인지 분별하는 일이 아주 힘들다는 뜻일 수 있다 또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의 본질도 흔히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현대의 콧대 높은 최고 지성인과 도덕가들조차 이구동성으로 선악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며,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지만, 또 시대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 달라진다고 합의하고 있지 않는가?  

본문이 일차적으로 말하는 바는 실과를 따먹는 것과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약품이나 아편처럼 열매에 특수한 성분이 들어있어서 먹자마자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나타났던 열매를 따먹은 효과는 선한 일을 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겼거나 반대로 죄를 범하려는 악한 생각이 엄습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가 이미 행한 행동으로 인해 두렵고 부끄러워졌을 뿐이다. 열매를 먹기 전후로 이미 죄를 범한 것이지 열매 자체가 양심을 심어주거나 악한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 금령을 주신 단계에선 에덴동산에 선만 있고 아직 악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물질계를 만들기 전에 영계의 천사들을 창조하셨는데 그중에 가장 뛰어난 천사가 하나님을 배역해 쫓겨났다. 그 사탄이 아담과 이브를 통해 악을 세상에 뿌리려 에덴동산까지 숨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14:12-14)

사탄이 선재(先在)한 경위는 어쨌든, 에덴동산은 아직 악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최초 인간과 악의 연결된 고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선악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선과 악은 인간을 통해서만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간만이 선악의 행동주체가 된다. 인간이 아니면 세상에 어떤 선악도 드러날 수 없다. 인간 외의 어떤 피조물도 선악과는 무관하다.

예컨대 동물은 아무리 근친상간을 해도, 의외로 그렇게 하는 케이스가 드물긴 해도, 또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을 죽여도 악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나무가 열매를 많게 맺든 적게 맺든 나무 자체가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의 평가에 따라 나무의 품질에 대한 등급만 매겨질 뿐이다.

영혼은 물론 자유의지도 없는 동식물은 오직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에만 따라 움직인다.  반면에 인간은 자유의지로 스스로 판단, 결정, 행동했기에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자유의지와 영혼을 소지한 인격적 존재만이 선악을 실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선악의 두 궁극적 기원

우주에는 인격성을 갖춘 존재는 크게 보아 셋이다.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이다. 천사나 귀신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사탄의 지시에 따른다는 뜻에서 제외된다. 삼위 하나님은 절대적 선의 근원인 반면에 사탄은 절대적 악의 근원이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 나오고 반대로 모든 악한 것은 사탄에게 기인한다.

선과 악의 궁극적인 근원이 공존한다고 해서 동양적인 이원론 사상을 성경이 지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주에 태초부터 선재하고 있던 선과 악의 세력이 세력 다툼을 하면서 시기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승리와 패배를 나눠가진다는 것이 이원론이다. 말하자면 선과 악의 두 기원이 세상에 미치는 주권과 능력의 범위를 대등한 크기로 보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 세상에선 당연히 절대적 선악의 기준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시대와 장소와 사람마다 선악이 각기 달라진다. 또 한 사람이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선악이 변화무쌍하게 바뀐다. 나아가 인간의 구원과 심판에 어떠한 일관성도 생길 수 없다. 두 세력의 승패에 따라 심판과 구원의 기준 및 방도가 매번 달라진다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원론의 세상에선 인간은 자기 세대의 흐름이 선과 악 중에 어느 쪽으로 더 쏠리는지 눈치를 보고 센 쪽에 빌붙어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심지어 나치 독일의 치하에선 기독교 사역자들마저 악의 편에 줄을 서지 않았는가?

그러나 악은 절대 선을 이길 수 없다. 우주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거룩한 주권 하에 있다. 비록 악의 세력이 가공할 위력은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벽한 권위를 벗어날 수는 결코 없다.

욥기의 서론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결코 사단과 협력하지는 않는 반면에,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내지 묵인 없이는 꼼짝도 못하는 존재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공중 권세를 사단더러 잡도록 하나님이 한시적으로 풀어 놓으신 상태다.

군대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자 귀신들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눅8:31) 했고, 또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라고 종말의 시기가 그 때 벌써 닥쳤는지 염려했다. 자기들에게 허락해준 공중 권세를 제발 당장 회수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을 세상에 당분간 군림하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은 결국 인간은 당신과 사탄 둘 중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중간에 회색 지대는 없다. 인간은 영적 존재인 하나님과 사단 어느 쪽과도 영적 교통이 가능토록 영혼을 지음 받은 유일한 존재다. 또 자유의지는 그 교통을 스스로 판단하여 어느 쪽과 지속적 교제를 할지 선택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탄과 별도로 떨어져 자존(自存)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사탄을 택하여 넘어가는 한이 있어도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특별히 기꺼이 자발적으로 사탄보다는 당신과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내리신 이유는 에덴동산에 아직은 선악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곧 그 음흉한 본색을 드러낼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선악이 아담을 통해 이 땅에 최초로 구현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선하게 만들거나 그 반대로 악에게 농간 당하게 할 키를 그가 쥐고 있었다. 절대적 선과 악의 근원에 그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세상에 구체화 될 판국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다.

선과 악의 궁극적 기원이 따로 있다는 것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사실상 그 두 기원에서 받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과 악이 흔히 세상에서 인식하듯이 인간 행동의 품질(Quality)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 두 근원 중 어느 쪽에 인간이 붙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나타난 모습일 뿐이다.

바꿔 말해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사단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행동의 품질도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과실을 따먹으니까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명령의 준행 여부로 인간이 속한 영역이 선과 악으로 확연히 나눠지는 법이다. 금령을 순종하고 있으면 하나님 쪽에 붙어 있는 것이고, 어기면 사단에게 붙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이상이 없으면 당연히 그 금령을 순종하게 되며 반대로 그 관계에 이상이 생기면 순종할 수 없게 된다.  

기독교를 제외한 여타 모든 종교의 구원 기준은 무엇인가? 거짓말, 강도, 폭행, 간음, 살인 등 인간끼리 서로 피해 입히며 도덕적으로 나쁘게 행동한 것만 죄다. 또 죽을 때에 평생 동안 그런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 여부만 따진다. 인간의 행동 자체를, 선하든 악하든 간에, 하나님이나 사단과 전혀 연결시키지 않는다. 인간이 순전히 자기 재량과 능력으로 행한 것이다. 인간을 그 재량과 능력에 따라 선악 간의 등급을 매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과 사단은 인간과 아무 연관이 없다. 인간은 그 둘과 별도로 떨어져 혼자 존재한다. 아니 그 둘부터 평소 인간 만사에 아무 관심도 없고 어떻게 되어가든 전혀 상관도 않으며 별도로 떨어져서 존재한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선언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게 만들어졌고 그분의 생기가 부어진 유일한 존재다. 인간의 인격이 올바르게 서려면 그분과의 지속적인 영적 교제가 있어야만 한다. 선의 기원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선의 기원에서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악의 기원에 가서 들어붙게 된다.

요컨대 인간 사이에 저지르는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배역한 결과라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그분께 불순종하여 선악과 금령을 어기자 다른 이를 비방하고, 하나님 앞에 억지 핑계 대기 바쁘며, 서로 간에는 부끄러워졌다.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둘 사이에 부부임에도 악한 행위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구원과 심판의 궁극적이며 절대적 주체는 누구인가? 단연코 하나님이다. 사단이 절대 될 수 없다. 세상 모든 종교에서도, 사탄숭배교를 빼고는, 이 점에 대한 이견(異見)의 여지는 일절 없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구원을 주시겠는가? 이미 하나님을 배역하여 사단에게 붙어 있던 자가 저지른 행동의 질과 양을 심사하여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겠는가? 아니면 그전부터 오직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를, 비록 때로는 악행을 저질렀어도, 구원해 주겠는가?

나아가 평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할 마음이 전혀 없이 단지 몇 가지 선행한 공적만 가지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를 과연 구원해주겠는가? 또 생전의 선행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조차 없이 저지른 수많은 악행에 대해선 뻔뻔스럽게 전혀 회개하지 않고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자신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과연 긍휼을 베푸시겠는가? 당신께 붙어 있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사탄의 종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당신만큼 잘 아시는 분이 없는데도 말이다.  

인간에게만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와 영혼이 둘 다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구원의 길은 하나뿐이다. 하나님께 처음부터 끝까지 붙어 있는 자다. 불신자처럼 인간에게 자유의지만 있고 영혼이 없다면, 다른 말로 동물과 같은 차원의 존재라면,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그 행동으로 밖에 평가될 수 없지만 말이다.

영혼이 있어 동물과 다른 차원의 인간이란 영을 통해 하나님과 사탄과 교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자유의지는 어느 쪽으로 그 영혼이 교통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된다. 그 반대로 자유의지를 어느 쪽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그 영혼도 그 쪽을 향해 주파수를 맞추게 된다. 결국 인간의 선행과 악행도 영으로 교통하여 따르기로 결정한 궁극적인 선악의 근원에 의해 좌우된다. 행위 구원이 불가능하며, 착한 자가 천국 간다는 상식이 틀린 이유다.    

창조론과 진화론

동양적 이원론이 성립되려면 창조에서 사단도 하나님과 동일하게 반(半)만큼의 역할을 감당했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창조는 없었고 세상은 처음부터 오직 플러스 전기와 마이너스 전기를 띤 두 종류의 물질 뿐이라고 해야 한다. 진화론과 이원론과 무신론이 모든 불신자의 일관된 사상이자 가치관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창조된 세상의 기원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귀속되고 그 운행과 통치도 전적으로 그분의 손 안에 있다. 단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사단을 하나님이 임시로 풀어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은 타락하고 말았다. 그 이후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가시적 모습은 마치 이원론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선과 악이 쟁투하는 무대이고 수시로 그 승리자가 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만사의 실상은 인간의 윤리 기준으로 어떻게 판단하든 간에 하나님 보시기엔 둘 뿐이다. 당신께 속한 것과 사단에 속한 것이다. 생명과 죽음, 빛과 흑암, 의와 죄, 진리와 거짓, 구원과 심판이다. 정반대의 두 쌍의 개념들이다. 생명이 아니면 죽음일 수밖에 없다. 진리가 아니면 거짓이다. 다른 여러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거짓이며 죽음이다.  

현실적 혹은 학문적 사안에 대한 진리는 여럿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출생에서 죽음까지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할 궁극적 진리는 여럿일 수 없다. 오직 하나다. 둘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출생에서 죽음이라는 두 지점을 잊는 선은 하나의 직선뿐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인생이 되려면 설령 그 직선에서 좌우로 들락날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 지점을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다. 아니면 출발은 했는데 목표지점이 없다면 그 인생이 허공에 뜬 모양이 될 수밖에 없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고전9:24-26)  

바울은 신자의 불신자의 삶을 바로 인생이 걸어가는 방향감각에 비추어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먼저 신자는 평생을 달려가 도달해야만 할 골인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모든 면에서 절제하여 결국은 그곳에 도착한다. 여기서 절제한다는 것은 한 방향으로 달리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앤다는 뜻이다. 단순히 도덕적 죄와 인간적 욕심을 제거하거나 줄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목표 지점이 여럿 있거나, 아니면 아예 없다. 전자는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며 사는 것이다. 뒤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인생이다. 후자는 허공을 치는 싸움만 한다. 어쨌든 출발은 했어도 도착지를 전혀 모르거나, 간혹 관심은 있어도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한 자다. 어쨌든 둘 다 헛되고 헛된 삶을 살다 죽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번 뿐인 인생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하다. 어떤 인간적 선행과 위업을 쌓아도 결국은 다 죽는다. 목표지점이 누구에게나 하나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간다.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 지를 먼저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잘 살 것인 지를 좌우한다.

그러나 죽음도 사실은 원천적으로 출생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창조와 진화 둘 중 무엇을  따르느냐에 따라 그 종착지도 이미 확실하게 정해져 버린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진리를 찾으려 구도(求道)하는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셨음을 믿으면 자연히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인생이 된다. 그분이 마지막의 죽음도 책임지신다. 반면에 진화를 믿으면 당연히 그분과는 무관한 인생이 된다. 물질에서 물질로 끝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출발의 기반이 전혀 없는 진화에선 아무리 인간 스스로 노력하여 진리를 추구하며 가치 있는 삶을 살려 해도 이미 허공에 뜬 인생이요 향방 없는 달음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기원을 어디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인 결과도 달라진다. 창조와 진화는 출생이라는 한 지점에서 서로 등을 진 채 정 반대 방향으로 출발한 셈이다. 그 끝에 도착하는 죽음이라는 지점은 서로 정반대의 곳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참되고도 흔들림 없는 선이다. 궁극적인 절대적 선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그냥 끊어진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단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인간은 영적 존재로 하나님과 사단에 그 영이 접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창조는 선이자 진화는 악이다. 진화를 믿는 자들이 도덕적으로 악하고 죄를 많이 짓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다는 면에서 그렇다. 최근에 온갖 변조된 창조론, 창조의 허울을 덮어쓴 진화론 등이 양산되지만 다 사단의 변종들이거나, 잠시 그 놀음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진리와 거짓 사이에 유사 진리나 유사 거짓이란 없다. 진리가 아니면 아무리 진리인 척 해도 거짓일 뿐이다.

진화론자가 아무리 윤리적으로 선해도 또 아무리 그들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도 악의 근원인 사탄과 연결되어 있다. 그 인생은 허무하게 끝난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했어도 그 전체 인생이 헛되고 헛된 것으로 끝나는 것 만한 악이 따로 없지 않는가? 인생의 출발과 도착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그 중간에 인간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그 전체가 의미 없어지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말이다.  

진리는 절대 타협할 수 없다.

성령 안에서 거듭난 신자는 이미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가 아니다. 벌써 진리를 소유한 자다.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죄에 찌든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진리란 여전히 하자가 있기 마련이다. 절대적 진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 품 안에 있는 것만이 진리를 소유하는 길이며 그 길만이 인간이 참 인간다워지는 유일한 길이다. 평강, 자유, 만족, 행복, 안전 모든 선한 것은 그분께로만 오기 때문이다.

선악과 열매는 바로 그 진리 자체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선악과 열매를 따먹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진리를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이 확보되는 유일한 길이었고 어기면 바로 모든 악과 직통하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는 다시 선악과 앞에 서게 된 셈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조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평생을 두고 선악과를 따먹으려는 생각이 없어진 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가진 도덕성, 종교성, 영성으로는 도무지 그렇게 되지 못하니까 성령이 오셔서 내주해 주심으로, 그리고 평생을 떠나지 않으심으로 하나님 쪽으로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서 고정된 자다.

한 마디로 자기 인생의 출발을 궁극적 선인 창조주 하나님에게 두고 그 도착도 궁극적 심판과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에게 두게 된 자다.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이 그 두 지점을 잊고 있는 직선상에 두고 있기에 좌우로 흔들림이 있더라고 절제하면서 목표 지점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자는 정말로 자기 속에 보배 되신 예수를 소지하게 된 것에 대한 온전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마음껏 누리고 주위에 증거하고 나눠주어야 한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세력 앞에 진짜 당당해져야 한다. 진리를 아는, 아니 소지한 자이기에 교만해지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정상 궤도에 들어섰기에 더 이상 요동함이 없어야 한다. 갈급하고 허망한 것과는 거리가 완전히 멀어졌다.

그리고 그분이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해서 더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인생에 대해서, 특별히 하나님을 따르는 여부로 선악이 결정되어짐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한 통찰과 분별과 실행이 따라야 한다. 그분께 붙어 있지 않음은 그분의 간절한 호소대로 “정녕 죽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부터 철저하게 체험해야 한다. 또 자신의 삶에서 그 영원한 진리를 다른 이에게 온전히 드러내 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있는 자들을 비방, 멸시, 배척하기보다는 관용과 포용으로 대하면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섬겨야 한다. 그들과 무조건 타협 조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진리는 하나다. 삼위일체 외에 우리의 전 인생을 걸만한 궁극적 대상은 절대로 없다. 아무리 진화론자가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고, 타인을 위해 큰 업적을 이루어도 진화론 자체를 인정해선 안 된다. 진화는 오직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서 하나님을 지워서 없애려는 지성적 시도일 뿐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없어지지 않으며 그분만이 당신께서 창조한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 진리가 된다는 사실도 결코 부인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선이 인간의 배타적 태도에 따라 악이 되지 않고, 그 반대로 악도 인간의 관용적 자세로 선으로 둔갑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자신이 연결된 절대적 선과 악의 근원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로 나눠질 뿐이다. 진화를 믿는 자는 사단에게 미혹되어 멸망으로 걸어가는 악한, 도덕적이 아닌 영적으로, 인생일 뿐이므로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할 뿐이다.

신자는 진리 자체는 절대 타협을 하지 말되 그 진리 밖에 있는 자들은 사랑해야 한다. 왜냐 하면 신자만이 진리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선악인지 이제 정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생의 정상궤도에 올라서 있는 자가 그 반대편에서 헤매는 자를 보면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진리를 거짓과 타협하면서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주자고 한다. 사단과는 타협하고 그 수하에 노예로 묶여 있는 자들을 건져올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큰소리치면서 말이다.

만약에 그 주장이 옳다면 바로 이 선악과 명령부터 성경에서 지워 없어져야 한다. 선악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여부로만 나뉜다고 했고 또 당신께 순종하지 않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히 선언했지 않는가? 하나님을 하나님 당신께서 계시하신 성경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죄에 찌든 인간의 생각 안에 그분을 제한하려 드는 짓이다.

선악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비결은?

비록 아담이 자유의지로 불순종을 선택했지만 악의 근원인 사단의 유혹이 끝까지 없었다면 그는 악을 몰랐을 것이다. 사단이 존재했기에 그는 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인간 죄악의 원흉이 사단이고 심지어 사단을 허용하신 하나님에게 궁극적 책임이 귀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의지에는 사단과 하나님 둘 중에 어떤 쪽이든 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고 그 결단도 오직 인간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은 이렇게 바꿔서 읽어야 한다. 열매를 끝까지 따먹지 않는 것 즉, 하나님 품 안에서 남는 것만이 선이다. 대신에 열매를 따먹으면 즉, 하나님 품에서 벗어나면 자동으로 즉각적으로 악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래서 도덕적 선악을 잘 분별하여 실행하는지 여부는 구원과 심판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생전부터 하나님 품 안에 있는 자는 죽어서도 계속 그런 상태가 유지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흔히 이해하는 도덕적 선과 악은 결국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지에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신자는 선악에 대해 새롭고도 확고한 개념을 가져야 한다. 아담의 원죄 이전에 절대적 선과 악의 근원이 따로 존재했다. 인간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은 확연히 나눠졌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은 했지만 실제로 선을 행할 소원, 열망, 기회, 능력, 평가, 열매 등 그 모두를 두 근원에서 인간이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은 그 근원인 하나님과 사단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통해서만 겉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선악을 구체화할 인간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과 악은 반드시 드러나야만 선과 악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선을 안다고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안 되는 것이다. 악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지 않는 것과도 다른 것이다. 요컨대 악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악이 된다. 또 선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것을 인간에게 바로 주신다.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당신의 품성과 뜻과 역사를 당신께 진심으로 순종하는 인간과 공유하신다. 인간을 청지기 삼아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려 하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단은 강도, 간음, 살인 등을 행할 소원, 열정, 기회, 능력 등을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심어주지는 않는다. 악은 겉으로 드러나면 아무리 아직은 도덕적으로 중립이었던 최초 인간이라도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단박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사단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떨어지게만 만들려 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떨어지기만 하면 덜 선하고 덜 악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단 자신의 수하로 변해 철두철미 악의 하수인이 되기 때문이다. 아담에게도 하나님께 바로 불순종하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 타락 기사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아주 교묘하고도 음흉하게 유혹하여 하나님과 서서히 등지게 만들었다. 빛의 하나님과 등지면 수준 낮은 천사나, 인간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단의 흑암만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이 아담더러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절대부정의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뜻이 바로 이것이다. 빛과 흑암 사이에 중간 완충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인간이 의지할 인격적 존재는 하나님과 사단뿐이기 때문이다. 진리 아니면 거짓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벗어나는 것은 진짜로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정녕 죽으리라고 명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디 따 먹기만 따먹어봐라 당장 죽여 버릴 테다”라고 벼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오히려 “제발, 제발 두 손 모아 비니 따먹지 말라.”는 너무나 간절한 호소다.

신자마저 선이 좋은 줄 알고도 실행하기 힘든 이유는 사단의 방해가 집요하기 때문이며, 악이 나쁜 줄 알고도 빠져드는 이유는 사단이 선과 비슷하게 악을 제시하기에 인간으로 혼돈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절대로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사단을 물리치면 된다. 그러나 사단이 워낙 교묘한 위장의 최고 전문가이기에 스스로의 실력으로는 물리치기 힘들다. 사단이 인간으로 하나님을 벗어나게만 하면 자동적으로 자기 부하가 되듯이, 인간도 끝까지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면 자동적으로 사단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의 비밀은 바로 인간의 기원과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이 그분을 벗어나면 인간답지 못하게 되고 실제 삶도 비정상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도 제발 인간답게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소원이 있다면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던 것이다.  

4/2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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