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후에도 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하는가?

조회 수 619 추천 수 9 2012.07.16 22:56:38
구원 후에도 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하는가?


[질문]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단번에 죄 사함을 이루시려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저희의 모든 죄는,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짓는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사함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0:14) 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까? 또한 요한일서 1:9 에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거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백을 하지 않으면 그 죄는 용서받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루신 죄 사함은 각각 개인이 “appropriate for themselves when they confess their sins and ask for forgiveness each time when they sin” - 죄 지을 때마다 그 죄들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구해야만 용서가 주어지는 것 입니까? 아니면 각 각 개인이 그런 죄를 고백하던, 죄 사함을 구하든 않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용서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답변]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질문하신 주제에 대해 올바르게 정리되어 있지 못한 것을 봅니다. 구원에서 죄와 연관하여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를 ‘원죄’와 ‘죄들’로 나눠 접근해야 함에도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 조상 아담이 지은 죄가 어떤 것인 지부터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하나님이 천지와 인간을 창조한 후에 아담더러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동산의 모든 실과는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고 즉, 피조 세계의 소유권이 아닌 관리권을 완전히 아담의 임의 재량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모든 것을 그분의 뜻대로만 사용해야 하는 청지기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선악과만은 먹으면 정녕 죽으니 절대 먹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단순히 열매를 따 먹느냐 안 먹느냐 즉,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는지 보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는 동산 중앙에 둠으로써 아담이 어디에 있든 항상 보이게 했습니다. 그 뜻은 에덴동산은 물론 아담의 자신과 삶과 인생의 참 주인이 하나님임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손길을 놓으면 정녕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담이 금령을 어기자 그 타락한 채로 영생하는 것을 방지코자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습니다. 즉, 죄로 인해 육체적 사망이 온 것은 분명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반면에 예수 믿는 신자에겐 영생을 주시는데 육체적 부활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

죽음의 더 근본적인 차원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대신할 청지기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가야할 목적, 의미, 가치가 바로 그분을 기뻐하며 그분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거부해버리면 아예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자의 인생은 향방 없는 달음박질이자 허공만 치는 싸움으로 일관합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화려하고 풍성해져도 항상 갈급하고 허무하며 평강과 자유와 기쁨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 금령은 위반하면 사망을 주겠다는 위협이 아닙니다. 정죄를 하려고 쳐놓은 덫도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인파로 떠밀리는 복잡한 쇼핑 몰에서 캔디 가게에 현혹되어 엄마 손을 놓치면 죽음과 방불한 처지에 빠집니다. 마찬가지로 이 금령은 인간더러 제발 하나님 당신의 손을 놓치지 말라는 사랑의 호소입니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면 평강, 자유, 기쁨을 그분께서 보장해주신다는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죄의 기원

아담은 이브와 함께 얼마 동안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에덴동산에서 그분만 바라보며 정말로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단의 꾐에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 찬 선악과 금령임에도 사단은 인간더러 그분이 인간을 시샘하여 독선적으로 인간을 조종하려는 목적이라고 오해하게끔 만듭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이브는 그 동안 사랑하고 따랐던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질투, 분노, 정죄,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라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꾐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하나님이 잘못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인간더러 하나님처럼 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천사장이었던 사단이 하나님 보좌에 오르려다 타락했던 길을 인간도 그대로 따르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최초 인간이 저지른 죄는 하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또 그 전에 인간이 그분보다 더 높아지려 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과 이 땅의 주인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거부하자 육신적 영적 죽음이 온 것입니다. 거기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끊기자 선악과가 갑자기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져서 금령을 위반하고 그 열매를 따먹는 불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았고 선악과가 눈에 환이 보이는데다 자의로 사단의 꾐을 물리칠 수 있는 의지까지 받았음에도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죄의 기원이 사단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채 자기가 이 땅을 제 멋대로 다스리려는 자기중심성이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과 인류 역사의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완전한 주관자입니다. 특별히 죄에서의 인간 구원은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최초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한 것을 원죄(the original sin)라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아담과 이브가 지은 원죄로는 인간끼리는 아주 신나고 좋았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서로 나눠먹었으니 그 자체로는 외양적으로 나쁠 것이 하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인간(자기)중심성이 원죄의 본질이니까 당연한 결과입니다. 여전히 아담과 이브는 서로 사랑하며 그 사이가 좋았습니다. 원죄가 도덕적 죄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죄가 죄들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 부인했고 인간끼리는 좋았던 원죄가 얼마 안가서 전혀 부정적 방향으로 진전되었습니다. 각 자에게 두려움과 수치가 엄습했습니다. 눈이 밝아 선악을 알고 하나님 같이 된다는 사단의 유혹과는 정반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부인하자 영적인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버렸습니다.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손길을 뿌리쳤으므로 - 너무나 두려워진 것입니다. 또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했었는데(창2:25), 갑자기 서먹서먹해졌습니다. 죄 자체에서 생기는 부정적 감정을 공범들이 동시에 느낀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두려워졌고, 이전과 달라진 자신의 영적 실체를 바라보자 자연적로 부끄러움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자 자신과도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죄를 지은 공범끼리도 그 상대가 이전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결국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여서 그 부끄러움을 인간의 노력으로 벗어보려 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온전히 자기들끼리 모든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죄의 기원이자 본질 것입니다.

원죄와 죄들

하나님을 피해 숨어 있는 아담을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애타게 찾았습니다. 그분이 아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를 리 없습니다. 네가 지금 반드시 있어야만 할 자리인 당신의 품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서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당신보다 높아지려 했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담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최초 인간은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을 원망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나님께 핑계를 돌리는 종교적 죄가 나타났습니다. 또 처음 열매를 따먹었을 때만 해도 사이가 좋던 부부사이에 금이 갔습니다. 서로를 정죄하며 원망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남을 해하는 도덕적 죄로 발전된 것입니다.  

죄의 본질을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이 끊긴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가 유일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청지기직으로 만드셨다고 선언하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기독교만 유일하게 죄를 두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고선 인간(자기)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것이 (원)죄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거역되는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죄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순히 죄라고 표현하지만 영어로는 정관사가 붙으면(the sin) 아담이 지은 원죄, 단수로 표현하면 자기중심주의인 죄의 본성(sin), 인간이 행동으로 짓는 여러 종교적 도덕적 죄들은 복수 sins 로 표기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이 끊겨 영적으로 타락했기에(죄), 필연적으로 이 땅에서도 여러 죄들을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들을 짓는 것이지 죄들을 짓기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로 개신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는 후자의 입장을 취합니다. 이런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구원의 방식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죄와 죄들을 구분해 각각의 구원에 대한 온전한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기에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7,18)라고 선포했습니다. 인간 외부의 요인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물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라고 답한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자체가 타락했기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과해선 안 될 점은 마음과 생각을 구분해 죄를 다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마5:28) 생각으로 짓는 죄도 죄들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드는 내면의 고착된 성향 내지 힘입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중심으로만 생각이 흘러가게 만드는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끊어진 상태가 죄의 본질이며, 그로 인해 생각으로 짓는 죄도 포함해 모든 죄들이 파생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같은 맥락으로 인간의 구원 전과 후를 말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육신이란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끊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성향을 뜻합니다. 자연히 삶의 동기와 목적이 이 땅의 것에만 집착하게 되면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생각 밖에 못합니다. 역으로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가 바로 육신의 사람입니다. 그럼 이런 자를 구원하는 길은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도록 하게 해주는 것 하나뿐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중생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9-11)      
  
칭의의 구원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 스스로 주인이 되는 자기중심적 성향입니다. 아담의 타락 후의 모든 이들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끊긴 상태로 태어나기에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분을 스스로 찾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에서 지옥 갈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도덕적 죄들을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죄인으로써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처럼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따르는데도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어서 구원과 거리가 먼 경우도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당신을 완전한 대속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인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이자, 죄의 삯인 죽음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그 보혈의 공로를 믿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영을 임재 내주케 해서 그 존재 자체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찾을 수 있고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준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어 죄 사함을 얻는다는 의미는 그래서 개별적 죄들에 대한 용서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과 끊겼던 영적 교통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리에서 그분의 자녀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스로는 도무지 용서 받을 길이 없어 죽음의 형벌만 기다렸던 한 죄인이, 영원토록 그분의 품에 안기는 의인이(실제적 의인이 아니고 의롭다 칭함만 받은) 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한 인격체 전부가 용서 받은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인간의 자기중심성으로 인한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기에 칭의는 그 원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풀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짐으로 해서 하나님과 부자 관계(Relationship)가 형성된 것입니다. 일단 맺어진 부자관계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함으로써 한 번 얻은 구원(영생)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죄와 연관하면 한 죄인이 “지옥 갈 형벌”에서 완전히 사면 받은 것입니다.(free from the penalty of the sin)

내면의 자기중심성이 외부의 행동으로(사고활동 포함) 나타나는 것은 죄들(sins)입니다. 신자가 예수 믿어 칭의의 구원을 받으면 과거에 지은 죄들, 현재에 짓고 있는 죄들, 미래에 지을 죄들에서 다 용서함을 받는다는 뜻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신분과 특권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에서 사면 받은 것이 결코 취소되지 않고 또 절대로 지옥 갈 형벌이 다시 부과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한 인격체 전체가 용서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개별적인 잘못으로 그 관계를 취소시킬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4)고 하는 뜻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한 대상은 예수님의 대속 제물 되심을 믿어서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각각의 죄들이 아닙니다. 또 그 자를 영원히 온전케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은 매년 일차씩 드리는 동물의 대속제사와 예수님의 영단번의 제사를 비교하는 내용입니다. 매년 드리는 동물 제물은 그 해에 지은 죄들에 대한 속죄용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 제물은 성령으로 한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만드는 목적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거듭났다는 가장 근본적 의미는 하나님을 부인하여 그분과 원수 된 상태로 살았던 지난 모든 삶이 완전한 실패요, 그대로는 아무 소망도 없었다는 처절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했으므로 그분의 벌을 받아 죽어 마땅하다고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품을 벗어났더니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어떤 평강, 자유, 기쁨, 감사, 안식도 없더라는 뜻입니다. 또 모든 도덕적 죄들도 하나님과 관계가 끊긴 데서 기인했음을 실감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중심주의로 삶의 방향을 유턴한 것입니다.

과거의 일회적 구원으로 처음 예수 믿는 것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과 화목 되는 것, 그분의 자녀 혹은 백성이 되는 것,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회심하는 것, 삶의 방향을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바꾸는 것,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는 것, 하나님의 영이 임재 내주하는 일,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헌신하는 것,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 지옥 형벌에서 면제 되는 것 등등입니다. 성화의 구원에서 사용되는 용어나 표현들과 잘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화의 구원      

칭의의 구원을 알기 쉽게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용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지옥 갈 수밖에 없던 자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분을 거부했던 지난 모든 잘못을 회개함으로써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지옥에 가야할 형벌만 벗은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죄인에서 용서 받은 죄인이 된 것뿐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용납되어진 것입니다.

그럼 이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 헌신해야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분 자녀답게 자신의 성품부터 거룩하게 가꾸고 세상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하늘을 목표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은 성령님을 신자에게 영원토록 내주토록 하여 당신과 언제든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었습니다. 물론 그전에 육신의 사람으로는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기에 성령으로 예수를 믿고 회심케 만들었습니다.  

칭의로는 “용서 받은 죄인”이 된 것뿐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 완전히 거룩한 성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 내면에는 이전과 같은 죄의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려는 끈질긴 습성이 신자의 내면에 성령과 함께 공존합니다. 또 그로 인해서 영적, 종교적, 도덕적 죄들을 짓게 됩니다.

이제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는(free from the power of the sin) 현재 진행형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는 신자의 전적 책임에 맡겨져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신자가  평생토록 피 흘리기까지 죄들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앞에서 살펴봤던 에덴동산의 타락 사건에 비추어보면, 칭의의 구원은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부르심에 화답하여 그분께로 회개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성화의 구원은 그분께 돌아갔으니 이전에 하나님께 모든 핑계를 대었고 또 부부사이(인간관계)를 왜곡 내지 파괴했던 죄들을 하나씩 고쳐나가면서 거룩하게 자라나가는 씨름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3)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이는 분명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죄의 본성을 벗고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거룩해지는 일은 신자의 책임입니다. 명백히 “옛사람을 벗어버리라”, 또 “새사람을 입으라”는 명령형입니다. 죄들에서 자유로워지는 싸움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2-14)

구원을 이루라고 해서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거나, 한 번 얻은 구원을 잘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이루라”는 동사는 농부가 토지를 경작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가꿔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문맥 전체의 요점은 빌립보 교인끼리 교제할 때에(2:1)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는” 방식으로 서로 위로 권면하며 성화의 구원을 이뤄나가라는 것입니다.    

자백하여 용서받을 죄들

요한일서에서 회개하여 용서 받아야할 죄는 하나님을 멀리했던 죄가 아니라 바로 종교적, 도덕적 “죄들”입니다. 우리말로는 구분이 없지만 영어로는 분명히 복수로 표현했습니다.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요일 1;9, KJV) 예수 믿어 구원 얻은 후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데도 아직도 남아 있는 자기중심적 경향에 넘어가 알게 모르게 행동으로 짓게 되는 여러 죄들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중심주의 때문에 하나님을 열심히 위한다면서도 사실은 자기 의를 높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자기 삶의 형통과 안일을 위해서 하나님보다 그분의 능력만 바랄 때도 많습니다. 나아가 인간관계에서도 모든 이에게 주께 대하듯 하지 못하고, 최소한 불쌍한 영혼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기적 욕심을 채우려다 서로 상처와 흠집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선한 것은 선악의 절대적 기준 되시고 선 그 자체이신 그분께로만 나오는데도 그분을 잠시 멀리하며 자기를 앞세우다 죄들을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쳤는데 그 죄도 바로 죄들에 해당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라는 우리말 표현은 무슨 죄인지 언뜻 분간이 안 됩니다. 영어로 보면 그 의미가 확실해집니다.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KJV) 인간끼리 지은 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수로 표현되었습니다.

내가 어떤 이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히는 잘못을 범했는데도 미처 모르고 있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종교적 도덕적 죄들이 하나님을 잠시 멀리해서 생긴 것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신자로서 거룩하게 살지 못해 하나님께 지은 죄이기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이는 인간관계에서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입힌 자들을 먼저 용서하라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내가 남을 용서해준 바탕에서 그런 기도를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만약 이 권면이 인간관계에서 파생하는 여러 도덕적 죄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멀리한 죄에 관한 것이라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하나님께 원수진 죄를 사해줄 수는 결코 없습니다. 또 그런 바탕에서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결국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가 평소 세상에서 범한, 특별히 남에게 피해를 끼친 죄들을 반드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들을 회개”해야 할(죄인이 “그 중심을 바꾸는 회심”이 아님) 이유는 구체화된 행동의 죄들을 이겨내고 또 그로 인해 더렵혀진 영혼과 육체를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끗케 하려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께 용서 받아야 하는 대상이 죄인인 반면에 성화는 자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범죄입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자신의 성품부터 죄들에 의해 차츰 오염되어지며, 또 하나님과의 교제에 수시로 방해를 받으며, 나아가 회개치 않고 계속 죄들을 지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관계(relationship)에는 하등 이상 없으나 그분과의 영적소통(fellowship)이 왜곡되며 필연적으로 인간관계까지 파손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구원 이후의 신자는 하나님께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판”은 결코 받지 않지만, 성품이 거룩해지고 믿음이 자라게 하려는 목적의 일시적인 “징계”는 받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4-8)


결론적으로 정리해보면, 한 죄인이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얻는 칭의의 구원을 하나님께 선물로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한 죄인 전체가 용서함을 받아 그분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진노 아래 지옥 가는 형벌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바뀌어 하나님의 심판에서 사면된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죄들로도 결코 심판받지 않는다는 의미도 신자 자신이 영단번의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신자는 용서 받은 죄인이긴 해도 여전히 죄의 본성인 자기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비록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그분 뜻대로 살기로 결심은 했지만 완전히 실천하기에는 희생과 수고를 동반한 많고도 힘겨운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그 죄의 본성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굽어지게 해서 여러 종교적 도덕적 죄들을 짓게 만듭니다. 자신의 성품을 거룩하게 바꾸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온전히 회복시키며 나아가 그분의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선, 개별적 죄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회개하여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이는 평생 걸어가야만 하는 죄의 본성에서 자유롭게 되어지는 여정입니다.  

요컨대 “회심으로 죄(the sin)의 심판에서 자유케 되는 칭의”와, “죄들(sins)의 징계를 받지 않으려 회개하고 고쳐나는 씨름인 성화”의 구원을 구분하면 이 질문은 쉽게 해결됩니다.

7/5/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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